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ㅣ 박준

그곳의 아이들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창작과비평, 2018
.......

어딘들 쉬운 삶이 있겠는가마는 하늘마저 검다는 탄광촌엔 서러움이 켜켜로 쌓여있다.
먹을 것을 캐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사내들은 바짝 선 신경을 감당하지 못해 취기를 빌린다.

가난은 아이들을 빨리 자라게 한다. 아이들의 눈치는 백단이다.
아이들은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씩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아빠가 울지 못한 울음을 아이들의 심장이 대신해 울기 때문이다.

광부들의 사인이 매몰에 의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닌 익사라는 사실은 의외이면서 불가항력이다. 광부들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 있고 타인의 죽음을 통해 아이들은 아빠의 죽음을 예비한다.
때로 아이들의 눈물은 흐르고 흘러 내를 이루고 마침내 장마마저 부른다.

화자인 나는 지금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갱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광부들의 이야기는 썼다가 이내 지웠다.
미래를 함께 하고픈 그녀에게 이런 소식은 슬프고도 무겁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 함께 장마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로 새로운 답장을 쓴다.

삶은 그렇게 흐르고 시작한다. 가고 보내고 또 오고 맞이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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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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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은 이전과 이후를 가른다고 했던가? 최근 한 에세이집을 만났다. 흰색 표지에 파스텔톤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넣은 후, 여백에 책 제목과 지은이의 이름을 작게 넣어, 더도 덜도 아닌 적정함으로 완벽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글이라고는 이 외에 없고 뒷표지엔 아무런 설명조차 없지만 북디자인만으로도 이미 특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에 걸맞도록 천천히 책을 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처럼 책에도 서로 다른 물성이 있다. 이 책은 불필요한 것을 덜어 내 있는 것을 돋보이게 한 후 읽는 이를 완만하게 끌어당겼다. 작가나 출판사는 최소한으로만 드러나는데도 그들의 특질은 오롯이 드러나 광휘롭기만 했다.

손에 쥐는 느낌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편집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이런 느낌의 책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함은 이제 없지만, 좋은 것이 모여 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 뭐지? 왜 이렇게 아늑한 거야.'

"친구와 함께 언 강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혹독한 사별이 몇 차례 그녀를 관통했다. 그러고도 다시 웃으며 지내는 듯 보였지만, 웃음과 웃음 사이에 캄캄한 허방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위로의 불가능을 절감할 뿐이었다. 위로의 말은 아무리 공들여 건네도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위로의 한계이자 말의 한계일 것이다." 18쪽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중에서

책에 담긴 스물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어느 곳을 열어도 반짝였다. 무연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 속에 머물며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교류하여 만든 호흡과 위로는 견디기 힘든 삶을 버티게 하는 작고도 큰 힘이었다. 그들의 시간은 때로 길고 때로 짧지만 순간을 살아내며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을 넘기면 그 다음도 넘길 수 있으니까.

"나와 아저씨들은 끝까지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아랑곳 않고 곁을 내주었다. 집 앞 담벼락과 트럭 밑처럼, 거기 둥근 밥그릇처럼, 질박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55쪽 <과일이 둥근 것은>중에서

읽다 보니 교집합이 커져갔다. 한정원은 자신과 시간을 함께 했던 에밀리 디킨슨과 실비아 플라스, 가네코 미스즈등 적잖은 시인들을 불러와 차분히 소개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된다던가. 그녀의 한 부분을 만들었던 시어들과 나긋한 느낌이 조용히 전해졌다. 이 책은 한 서점의 2020년 디자인 전문가가 뽑은 최애 북 커버로 선정되었고, 2020년 작가, 출판인, 기자, MD 50인의 뽑은 '올해의 책'로도 선정되었다.

자신이 대개는 싱숭생숭하고, 계절을 가리지 않고 타며 조용하지만 조금 이상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 책에 탑승하기를 권한다. 모두에 이야기했지만 결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테고 그래도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다. 아니 넘치도록 따뜻해서 서로에게 시가 되고 산책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다.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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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리의 힘 -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전략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
김민태 지음 / 혜화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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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부를 걸고 일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돌아갈 길마저 끊어버린 후 비장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모든 것을 던졌으니 기대하던 결과가 나오면 좋겠다. 하지만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배수진을 칠만큼 절실한 심정이 오죽하겠냐만 간절하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같이 시계가 불투명할 때는 더더욱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퇴직한 후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창업했다가 사업을 접은 이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상공업이나 자영업의 비중이 유독 높은데, OECD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중은 G7국가의 13.7%의 2배에 육박하는 25.1%라고 한다.


작년 초 모 기업의 공장 앞에 음식점을 열었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직격탄을 맞아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몸만 나오게 된 이들의 사연을 신문에서 보았다. 아무 상관없는 나도 가슴이 먹먹했는데 당사자와 가족들은 어떠했을까. 피눈물이 난다는 건 저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전략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는 부제를 단 이 책을 보면서 이들이 생각났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패는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혹여 실패를 대비한 어떤 전략이나 한 발을 다른 어딘가에 걸쳐두었다면 그토록 가슴 아픈 일은 겪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은 『양다리의 힘』이란 제목답게 양다리를 걸쳐 성공한 이들의 사례를 들려준다. 그 중에는 스타트업의 신화인 '배달의 민족'의 김봉진과 '카카오 스토리'의 김범수를 비롯,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아인슈타인, 괴테,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어떻게 오늘의 자리에 다다를 수 있었는지를 짚어준다.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의외로 낯설다. 이들에게서 맨땅에 헤딩이라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찾을 수 있다면 절실하지 않음의 역설이다. 그러고보니 부담 되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종종 보았다.


저자 김민태는 한 분야에서 안전성을 확보하면 다른 분야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다며 양다리의 힘을 주창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꾼 독창성은 성취 욕구가 낮은 상태에서 꽃 피웠다며 양다리어가 되라고 권유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안전은 반드시 필요하고, 도전은 위험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위험을 낮추는 능력이라 설득하며 말이다.

배달의 민족의 김봉진의 경우 배민 앱을 만들기 전 일반 회사의 평사원을 거쳐 오래도록 열망했던 수제 가구점을 차렸다. 그러나 1년 만에 전세 보증금을 까먹고 빚까지 지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지인들과 뜻을 같이해 공동창업으로 배민 앱을 만드는데, 멤버들이 다같이 모인 것은 앱이 완성된 후였다. 다들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가볍게 만든 서비스가 어쩌다 사업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저는 배수의 진을 절대 치지 말라고 강조해요. 배수의 진이라는 건 어렵고 절박한 상황이잖아요. 왜 스스로 그런 상황을 만드냐는 거죠. 오히려 무언가를 꼭 해내야겠다고 독하게 결심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져요. 즐기면서 작은 성장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아주 비장한 각오로 한다? 사업이 나라를 구하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 25쪽

저자는 적극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을 양다리어로 명명하며 그들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솔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권지안은 가수와 화가를 겸하고 있고 아나운서 최송현은 방송국을 퇴사한 후에도 여전히 사회를 보며 스킨스쿠버, 영화배우, 유튜버로 활동중이다. 요즘 '준며든다'라는 말을 유행시킨 개그맨 최준은 카페 사장과 쿨제이라는 부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심지어 그는 개그맨도 부케로 그의 본명은 김재준이다.


저자는 이어 천직의 개념마저도 살짝 비트는데 그가 정의하는 천직은 내가 만족해 하는 일이며, 범위는 한시적이고 개방적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적지 않은 대가들도 처음부터 그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며, 우연하게 시작했던 일이 잘 되어 기존에 하던 일을 접게 되거나, 우연을 기회로 만들어 새 길을 냈다고 한다. 요리 연구가이자 기업인인 백종원도 처음에는 중고차의 딜러였고,어떤 일을 계기로 방향을 틀게 되면서 오늘의 백종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요즘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시기에 하고 싶은 일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것도 없지 싶다. 일이라는 것이 어떻게 단순히 돈벌이로만 한정될 수 있겠는가. 일을 통해 자아의 실현이라는 영혼의 갈망까지 이루고 있는데 말이다. 어떤 일을 제한하지 않고 단정 짓지 않으며 하나씩 점을 잇듯 넓혀갈 때, 하고 싶은 일을 더 나이 들어서까지 우리는 안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에 단초를 줄 작은 책을 미래로 걸치며 다리처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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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슴 한쪽이 시리다. 책을 잡았을 때 내처 읽지 못하고 끊어 읽었던 것은 슬픔 때문이었다. 한 노동자 가족의 불안하고 지난한 삶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난 후 떠오른 것은 허연의 시 '상수동'이었다.

강물에 잠겼다 당신

밥솥에 김이 피어오를 때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그 시절은 왜 이름조차 없는지

당신이 울지 않아서 더 아팠다
꽃 이름 나무 이름
가득 쓰여 있던 당신의 노트도 늙어갔고
(하략)

이 시는 그와 그녀, 때로 남편과 아내로 명명되는 그들의 삶을 적확히 비춘다. 그들의 사랑은 식었고 삶에도 지쳐있다. 대학의 운동권 조직에서 만나 노동자 혁명의 꿈을 꿨던 그들은 오랜 연애 후 결혼했지만,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외상으로 다치고 곪아있다. 노동 현장에서 만난 현실과 일상에서 만난 현실은 이제 거대한 장벽이 되어 그들을 압박한다.

언젠가부터 가정을 꾸리는 것이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반듯했던 그는 술을 마시고 그녀를 때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동 운동가라 불리지만 그의 삶은 피폐하고 고단하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수시로 고발 당하고, 벌금은 족쇄가 되어 그의 삶마저 저당 잡는다. 내몰린 그는 살기 위해 공장 굴뚝에까지 오르고, 연애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아내는 일상의 중압에 눌려 "사랑 같은 거, 필요 없"다며 힘겨움을 내비친다.

어른들의 삶은 아이들에게도 투영되어, 아이들은 그들대로 고분분투한다. 그러나 어릴 때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겠다던 아들은 명문 외고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 고생을 하다 의식을 놓아버린다. 어린 딸은 외국인 노동자의 자살과 정서불안으로 손발이 없는 그림을 그리며 퇴행한다.

이 책에는 표제작 <자연사박물관>을 포함 총 7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왜곡된 현실에 저항하며 살지만 그들이 지키고 건진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운동가라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아이들과 그녀, 소수의 동료 뿐이고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그녀는 고된 일상과 염려에 함몰되어 시들어버렸다.

그러나 낡고 구멍 뚫린 구두 같은 삶이지만 그는 여전히 그만의 보폭으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녀가 힘겹게라도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눌려 노동운동가라는 자부심도 희석되었지만 그녀가 있기에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그였고, 보이지 않는 축이었다. 그래서 슬퍼도 슬픈 것이 아니었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

" 절망의 순간, 시골 마을 '아를'의 빛나는 태양 아래서 그토록 밝은 색을 칠했던 예술가와, 낡고 초라한 집에서 슬픔과 광기의 밤을 보낸 노동자가 닮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잠시 반짝이던 햇살 때문이었으리라.
재이아빠는 소파에서 일어나 작업복을 입고 코트를 걸쳤다.
"어디로 가려고?"
내가 재이아빠에게 물었다.
"회사에 나가봐야지."
재이아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는 노동자처럼 집을 나섰다. "
<고흐의 빛> 139쪽~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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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문서정 소설집
문서정 지음 / 강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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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려진 칼처럼 날이 선 사람들이 있다. 곤두선 신경과는 달리 마음은 약해 그들은 조금만 다쳐도 아파 견디질 못한다. 생에 시달리다 못해 화가 나 있는 그들에겐 사소한 말도 버겁다.

그러나 살짝만 닿아도 살을 가를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그들이 지닌 칼은 무디다. 누군가를 해치려는 용도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쓰임에서다. 칼을 들고라도 나서지 않으면 생을 이어가기 힘든 이들은 먼저 찌르거나 외면하고, 은폐하거나 버리면서 도리어 버려지는 모순 속에 산다.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삶이란 숙제를 안고 피 흘리며 사는 이들의 격통이 담긴 문서정의 소설집이다. 책에는 평생에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한 사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여덟 편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배우가 여러 인물로 분해 연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슴과 손에 번뜩이는 칼을 품은 「밤의 소리」의 희명은 어릴 때 입은 화상으로 인조 귀를 붙이고 다니는 스물일곱 살의 아가씨다. 다른 한 쪽의 청력마저 잃어 보청기를 끼지만 희명은 거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한데 기이한 일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밤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희명은 들리지 않는 낮의 세계와 세미한 소리마저 들리는 밤의 세계를 산다.

희명은 P시청 본관에 있는 도서관의 사서로, 같은 장애인 공무원이자 관 내 갤러리의 큐레이터 겸 실장인 조승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조승우의 집을 방문하던 날 희명은 자신의 왼쪽 귀가 인조임을 알게 된 그와 다투게 되고, 서로를 수용하지 못한 채 뺨을 때리며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희명은 자신의 옆 호에 사는 말더듬이 총각이 생을 멈추려는 것을 보고 구해준 후 세상과 맞서 나갈 수 있도록 욕을 가르친다. 빨간 셰퍼드라는 별명에 맞게 공격적 수비법을 가르치면서 이런 날 조승우에게 연락이 오면 행복한 밤이 될 거라 생각한다. 벼려진 칼이 되어 자신을 지키는 희명의 이야기는, 사회적 약자의 생존이 물어뜯기라는 처절함 속에 나온다는 것을 아프게 보여준다.

첫 작인 「레일 위의 집」의 서준과 마지막 작인 「소파 밑의 방」의 수현은 다르고도 흡사하다. 기간제 교사인 서준과 주간지의 훈남 기자 수현은 제목에서 전해지는 느낌 그대로 불안한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 분투하며 산다. 그들은 어릴 적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 인해 위선조차 부리지 못하는 용렬함과 분노 조절 장애라는 생의 부산물에 각기 눌려있다.

서준은 역사에서 만난 오갈 데 없는 수영과의 짧았던 일탈로 자신의 생이 꼬일까 두려워 연거푸 그녀를 외면한다. 버림받은 수영은 자기처럼 구질구질한 인생을 구원해준다는 미명 하에 노숙자의 살인까지 감행한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파혼 했던 수현은 이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정원을 추억하며, 그녀와의 사랑을 떠올리는 소파를 과감히 정리한다. 버리고 외면하는 서준에게 생은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까. 자신을 직시하고 생이 새긴 상처를 받아들인 수현은 또 어떤 삶을 짤까.

「개를 완벽하게 버리는 방법」의 은성과 「밀봉의 시간」의 나는 다른 이에 의해 삶이 무너지거나, 다른 이를 추락하게 만든 상처로 괴로워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거나, 가해의 상처를 지우고 싶어 기억을 잃은 물고 물리는 삶의 정경은 인생의 불가해성과 함께 인생이 지난한 숙제이자 범접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임을 처연히 보여준다.

소설 속의 그들은 삶의 격랑 안에 일그러지고 부서지며 벼랑 끝이나 폭풍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건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뿐인데 그들은 버티며 내일을 기약한다. 그런 그들의 눈물은 삶의 결정체이고, 수많은 버려짐을 통해 터득한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눈물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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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Hello,Stranger 2021-07-08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초딩님의 당선작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