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만남은 이전과 이후를 가른다고 했던가? 최근 한 에세이집을 만났다. 흰색 표지에 파스텔톤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넣은 후, 여백에 책 제목과 지은이의 이름을 작게 넣어, 더도 덜도 아닌 적정함으로 완벽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글이라고는 이 외에 없고 뒷표지엔 아무런 설명조차 없지만 북디자인만으로도 이미 특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에 쥐는 느낌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편집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이런 느낌의 책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함은 이제 없지만, 좋은 것이 모여 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 뭐지? 왜 이렇게 아늑한 거야.'
"친구와 함께 언 강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혹독한 사별이 몇 차례 그녀를 관통했다. 그러고도 다시 웃으며 지내는 듯 보였지만, 웃음과 웃음 사이에 캄캄한 허방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위로의 불가능을 절감할 뿐이었다. 위로의 말은 아무리 공들여 건네도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위로의 한계이자 말의 한계일 것이다." 18쪽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중에서
"나와 아저씨들은 끝까지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아랑곳 않고 곁을 내주었다. 집 앞 담벼락과 트럭 밑처럼, 거기 둥근 밥그릇처럼, 질박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55쪽 <과일이 둥근 것은>중에서
읽다 보니 교집합이 커져갔다. 한정원은 자신과 시간을 함께 했던 에밀리 디킨슨과 실비아 플라스, 가네코 미스즈등 적잖은 시인들을 불러와 차분히 소개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된다던가. 그녀의 한 부분을 만들었던 시어들과 나긋한 느낌이 조용히 전해졌다. 이 책은 한 서점의 2020년 디자인 전문가가 뽑은 최애 북 커버로 선정되었고, 2020년 작가, 출판인, 기자, MD 50인의 뽑은 '올해의 책'로도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