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슴 한쪽이 시리다. 책을 잡았을 때 내처 읽지 못하고 끊어 읽었던 것은 슬픔 때문이었다. 한 노동자 가족의 불안하고 지난한 삶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난 후 떠오른 것은 허연의 시 '상수동'이었다.

강물에 잠겼다 당신

밥솥에 김이 피어오를 때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그 시절은 왜 이름조차 없는지

당신이 울지 않아서 더 아팠다
꽃 이름 나무 이름
가득 쓰여 있던 당신의 노트도 늙어갔고
(하략)

이 시는 그와 그녀, 때로 남편과 아내로 명명되는 그들의 삶을 적확히 비춘다. 그들의 사랑은 식었고 삶에도 지쳐있다. 대학의 운동권 조직에서 만나 노동자 혁명의 꿈을 꿨던 그들은 오랜 연애 후 결혼했지만,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외상으로 다치고 곪아있다. 노동 현장에서 만난 현실과 일상에서 만난 현실은 이제 거대한 장벽이 되어 그들을 압박한다.

언젠가부터 가정을 꾸리는 것이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반듯했던 그는 술을 마시고 그녀를 때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동 운동가라 불리지만 그의 삶은 피폐하고 고단하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수시로 고발 당하고, 벌금은 족쇄가 되어 그의 삶마저 저당 잡는다. 내몰린 그는 살기 위해 공장 굴뚝에까지 오르고, 연애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아내는 일상의 중압에 눌려 "사랑 같은 거, 필요 없"다며 힘겨움을 내비친다.

어른들의 삶은 아이들에게도 투영되어, 아이들은 그들대로 고분분투한다. 그러나 어릴 때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겠다던 아들은 명문 외고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 고생을 하다 의식을 놓아버린다. 어린 딸은 외국인 노동자의 자살과 정서불안으로 손발이 없는 그림을 그리며 퇴행한다.

이 책에는 표제작 <자연사박물관>을 포함 총 7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왜곡된 현실에 저항하며 살지만 그들이 지키고 건진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운동가라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아이들과 그녀, 소수의 동료 뿐이고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그녀는 고된 일상과 염려에 함몰되어 시들어버렸다.

그러나 낡고 구멍 뚫린 구두 같은 삶이지만 그는 여전히 그만의 보폭으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녀가 힘겹게라도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눌려 노동운동가라는 자부심도 희석되었지만 그녀가 있기에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그였고, 보이지 않는 축이었다. 그래서 슬퍼도 슬픈 것이 아니었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

" 절망의 순간, 시골 마을 '아를'의 빛나는 태양 아래서 그토록 밝은 색을 칠했던 예술가와, 낡고 초라한 집에서 슬픔과 광기의 밤을 보낸 노동자가 닮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잠시 반짝이던 햇살 때문이었으리라.
재이아빠는 소파에서 일어나 작업복을 입고 코트를 걸쳤다.
"어디로 가려고?"
내가 재이아빠에게 물었다.
"회사에 나가봐야지."
재이아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는 노동자처럼 집을 나섰다. "
<고흐의 빛> 139쪽~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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