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직전의 우리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4
김나정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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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남겨진 자에서 떠난 자로 생의 자리를 바꾸게 된다. 남겨진 자의 삶은 떠난 자의 죽음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태어난 순서를 뒤집은 죽음,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생이 마감된 죽음은 폭발적인 힘으로 남겨진 자를 몰아붙인다. 그런데 이 둘이 하나 되어 불어닥친 죽음이 있다. 자식의 피살이 그렇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를 생지옥으로 밀어넣고도 모자라는지 남은 시간마저 파괴한다. 자연사도 아니고 죽임을 당했단다, 내 자식이. 멸종 직전의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룬다. 부모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은 소설로 읽히지 않고 실제 있었던 이야기 혹은 경고로 읽혔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옆의 아이가 우리 아이를 때려서 자신이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간단한 문자였다. 문자를 보는 순간  피가 솟구친다는 게 이런 느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어떻게 됐길래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을까?’ 난감해 하셨을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됐지만 이토록 건조한 문체로 보내실 수 있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밖에서 하던 모임이 끝나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가다 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교문에서 만난 딸 아이는 덤덤하게 말하며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문자나 전화가 오면 혹시 안 좋은 일인가 싶어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작은 일도 자식과 연관되면 부모에게는 특별한 일일 수밖에 없다. 부모라는 자리가 그렇다.

 

이 책은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마치 한편의 장중한 서사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한다. 20년이 지나도 현재진행형인 과거와 그에서 비롯된 상처와 망각은 부모가 생을 끝내야만 지워지고 잊혀질 수 있는 일임을 드러내준다. 이세황과 권희자는 아직도 자신들의 딸인 나림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버릴 수 있었을으리라. 그러나 허무하게 지고 말았고 나림이의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시간도 정지되었다. 나림이를 죽게 만든 김선주를 향한 그들의 촉수는 그래서 아직까지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림이의 죽음은 피살이라기보다는 김선주를 방패막이로 한 자살에 가까웠다. 선주가 휘두르려다 멈칫한 손을 나림이가 붙잡고 눌렀기 때문이다. 나림이가 죽으면서 나림이네와 선주네는 장마철의 축대마냥 붕괴되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나림이 엄마의 과욕이 부른 비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림이 밖에 없었, 그 죽음은 엄마에게 의문만을 남긴채 증오를 양산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라는 엄마의 강요에 손가락 마비까지 온 나림이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인 선주를 그간 은근하고도 야비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선주가 나림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나림이는 해방을, 선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나림이의 죽음으로 권희자는 엄마의 기쁨을 영원히 잃었고, 이세황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채 고통을 달래며 산다. 선주네는 살인자 가족이 되어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가고, 선주는 그곳에서 피자 한판 사만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며 연명한다. 사만다가 된 선주는 미혼모 윤숙이가 되고 아들 안도를 낳은 후엔 수인이가 되어 새 삶을 시작한다. 안도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권희자는 죽은 남편의 방을 정리하며 선주가 한국에 있음을 암시하는 다잉 메시지를 본다. 사람의 생명을 앗은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나림이의 죽음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채 증오만을 키운 권희자는 안도를 유괴해 자신의 가게에 둔 후 선주와 거래한다. 나림이를 죽인 이유를 말해주면 안도를 데려다주겠다고 말이다. 모든 것에 지치고 만 선주는 권희자를 겨누던 줄칼을 자신에게 돌리고, 권희자는 선주의 얼굴에서 그토록 그리던 나림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나림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권희자. 그녀는 그제서야  자식을 생각하라며 어미의 본성으로 칼을 빼앗는다. 그 시각 안도는 가게에서 홀로 나와 집으로 오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때때로 아이를 지치게 하는 엄마들을 볼 때가 있다. 아이가 어리다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엄마들 말이다. 그 엄마들의 아이는 초등학생인데도 이미 탈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하지만 그 엄마들만 그런가 하는 자문이 책 읽는 내내 계속  일었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바람을 강요한 적은 없는지, 더 솔직하자면 내 안의 권희자는 없는지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권희자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림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 방식이 아이를 그토록 힘들게 할 줄 알았다면 즉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처참한 결과가 나을 때까지 밀어부친 것이다. 댓가는 혹독했다. 아이가 죽었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었으니까. 또한 자신은 왜 이런 일이 생긴지도 모른채 상실과 증오를 통해 지옥을 맛보아야 했으니까. 

 

참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설이었다. 사실을 대면케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그래도 권희자가 멸종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다행이다. 그랬다고 죽은 나림이가 다시 살아날 것도, 선주를 깨끗하게 용서할 수도 없지만 증오하면서 악에 받쳐 사느니보다, 또 자신을 향해 이유를 캐물으며 단죄하느니보다는 낫다. 이제 권희자에겐 아무도 없고 껍데기뿐인 늙고 추한 자신만 남았다. 그러나 선주의 줄칼을 빼앗음으로써 선주와 안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권희자의 마지막 돌발적 행동이 있어 우리는 멸종 직전에 구원 받았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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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 시인선 455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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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행숙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로 시작되는 '하이네 보석가게에서'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언니라는 첫 글자를 읽는데 지금은 이국 땅에 있는 사촌 동생이 마치 옆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니라는 낱말 하나로 지나가버린 시간이 그리움이 되어 물밀듯 다가왔다. 내가 불렸던 호칭의 하나인 언니라는 말과, 언니였던 나를 사랑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시어 하나로 가슴이 요동치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조금은 슬프면서도 화자에게서 전달되는 치기와 경박스러움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겉치레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 날 것의 삶이 오히려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뭘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순간의 느낌대로 살아가는 인생, 그저 그런 부박한 인생을 그려 더 애잔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김행숙에 대한 그 같은 인상을 안고 에코의 초상을 집었다.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들은 여전히 발랄했지만 전에 비해 시어들이 한결 편안해졌고 의미는 더 묵직해졌다. 시인의 생각을 알고 싶어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더니 머리가 아파지면서 내 언어로는 표현이 힘들 것 같은 생각에 절망에 가까운 좌절감이 밀려왔다. 괜히 심각해져 며칠을 끙끙데다 내 느낌으로 찾고 내 느낌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 먹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다른 이의 생각과 말이 아닌 내 생각과 말로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시를 읽고 느낌을 나누고 싶어졌다.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는 72가지 방법

 

누군가를 미행하는 기분으로 걷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말입니다

한 가지 방법에서 사거리가 나오고, 또 오거리가

나옵니다.

또 사람들은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개 한 마리도 보았습니다.

 

뒤돌아서는 개는

, 라고 짖을까요?

개와 나의 관계를 생각할까요?

 

개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걷는 것도 한 가지 방

법인데 말입니다

오늘은 누군가를 미행하는 기분으로 걷다가

그의 뒤에서 닫힌 문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앞에서 닫힌 문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사람이었다면 매우 슬펐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사람이었다면

나는 엉뚱한 슬픔에게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뭐 하니?

 

산책하는 72가지 방법을 궁리하며 걷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햇빛이 더 기울고

햇빛이 완전히 일자로 누워버릴 때까지

왼쪽 얼굴만 서쪽 하늘처럼 발갛게 태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말입니다만

 

김행숙 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가볍고 상큼하게 생의 슬픔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김행숙 외에 누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빠져들고 말았다. 앞에서 닫힌 문과 뒤에서 닫힌 문, 누군가와 나,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일상이 슬프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만난 개를 보며 개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그녀에게서, 그러다 결국은 개의 서글픈 한 생까지 찾아갈 그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산책을 통해 그녀가 마침내 도달하게 될 종착지는 우려했듯이 생의 슬픔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산책할 수 있는 72가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응당 박수로 그녀를 응원할 것이고……편히 읽을 수 있는 시에서 굳이 슬픔을 발견하는 나는 그녀의 슬픔을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내 슬픔이 발화되어 그녀에게 반사된 것일까. 우리는 둘인가, 아니면 멀리 떨어진 하나인가. 잘 모르겠다. 계속 읽어가야겠다.

 

문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

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마음에 드는 시가 많았지만 굳이 이 시를 골랐다. 길지 않아 좋았고 이해하기 쉬워 좋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찔끔 눈물이 날 뻔 했다. 타자의 부정을 통해 자신을 더 부정했을 화자가 측은해졌고, 일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부정한 화자가 스스로를 털 깍인 짐승처럼 낮설게 여길 걸 생각하니 한없이 가여워졌다. 매몰차게 대하고 잊고, 또 매몰차게 대하고 잊은 후, 세상이 다 그런 거라며 위로하지 못하는 화자가 더 없이 안 되었다. 오늘을 견뎌야 하고 내일은 계속 되어야 하므로, 천직을 버릴 수 없는 못난 자식처럼 끌어안은 화자가 조금의 시차를 둔 우리들의 모습, 아니 내 모습 같았다. 맞다. 그래서 내 가슴이 사막같고 가뭄에 벌어진 땅 같은지도 모르겠다.

 

김행숙은 권두에서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라고 했다. 그렇다. 내와 네가 우리가 됐을 때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솔직하자면 아프고 시린 우리들이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의 이름이 되고, 격려의 낱말이 됐으면 싶다. 초등학교 3,4학년만 돼도 알 수 있는 이 지난한 여정을 김행숙은 자문과 자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사랑이라는 말은 저 멀리 밀어둔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허우적거리는 아주 작은 새로 비유된 너와 나에게 그녀의 시가 그녀의 바람처럼 앉았다 쉬어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나 또한 그런 나무의자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군다. 소박하고도 매우 커다란 꿈을 꾸는 호사를 나는 지금 그녀를 통해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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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고 싶은 토끼
칼 요한 포셴 엘린 글.그림, 이나미 옮김 / 박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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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밤에 잠 안자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만큼 엄마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있을까 싶다. 엄마의 사정은 봐주지 않은채 자신과 같이 밤을 보내자는 아이의 요구는 종일 아이를 건사한 엄마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제 그만 잤으면 좋겠는데 아이에게 그럴 마음이 전혀 없을 때 엄마는 무척이나 긴 밤을 맞이하게 된다. 아이가 자야 엄마도 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자는 아이의 얼굴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건 없는 것 같다. 아이의 자는 얼굴을 보노라면 언제 힘들게 했나 싶게 낮에 제대로 못 놀아줬던 일도 떠오르고, 더 잘 돌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엄마는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도 잠깐,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또 밤이 되면 잠자지 않는 아이로 인해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게 된다.

 

 

잠자고 싶은 토끼는 그런 엄마들의 고충을 아는 저자가 자비를 들여 제작한 책이다. 자비를 들여 만들었다고 하니 아이들의 잠재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리라. 이 책은 동화책이라기보다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으로 저자가 알려주는 대로만 하면 아이들이 쉽게 잠들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의 수면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만큼 이 책에는 요구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되도록이면 아이가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썼을 때, 가장 편안한 목소리로,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 읽어주라고 말이다. 이야기를 듣다가 아이가 잠들었다고 해도 금새 책을 덮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라며 책을 보는 상태보다는 듣는 상태가 되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잠자고 싶은 토끼에는 잠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고 싶지 않은 로저라는 토끼가 등장한다. 엄마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겼는데 로저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로저가 속히 잠들 수 있도록 엄마는 잠으로의 여행에 로저를 초대하고, 이런 이야기 속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책을 읽는 엄마는 이 책에서 알려주는 대로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단어나 문장을 강조하며, 때로는 동작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면 된다. 이야기와 구성이 아이가 잠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어 책을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아이는 잠들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제 시간에 잠들지 않을 때 안그래도 힘든 몸에 수면 부족까지 더해진 엄마는 힘겨울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는 원찮아도 아이와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고, 엄마는 가족을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자책하게 되어 가정에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된다. 사랑과는 별개로 육아 스트레스도 분명 존재하는 현실에서 지친 엄마들에게 이 책이 희소식을 주는 고마운 책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예쁘게 잠든 아이를 행복하게 보는 엄마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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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보석가게에서

 

 

                                                                         김행숙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 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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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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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기세로 시를 쓰던 시인이 있었다. 강렬하고 거침없는 시어는 세상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힘이 있었고, 그녀의 시를 읽으면 내 고통쯤은 별 것 아니라는 자각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의 힘이 삶의 처철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안 순간 그녀가 가여워 견딜 수 없었다. 시인의 숙명을 내려놓고 차라리 평범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녀의 삶이 덜 아리지 않았을까. 가슴이 시렸다. 시인의 시는 사랑을 받았지만 시인의 삶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 토해냈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인은 은둔이라도 하듯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적잖은 기간 동안 시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단 소식은 나중에서야 알려졌다. 그녀 혼자 겪었을 아픈 세월에 그만 처연해지고 말았다.

 

이미 짐작했듯이 그 시인이 바로 최승자다. 「개 같은 가을이」라는 시를 통해 가을의 이미지를 전복해버린 언어의 투사. 그러나 파죽지세로 시작했던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중략...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아, 뒷심이 이렇게 약해서야. 뻔뻔함이라도 있거나 그도 아니면 그 결기로 계속 밀었어야지 칼을 뽑고는 마무리를 못한 것처럼 시는 흐릿해지고 만다. 그녀의 시에서 나는 약한 자의 선제 공격을 느낀다. 소리 큰 사람이 약한 자다. 시를 읽으면 온몸으로 저항하는 그녀가 측은해 울컥해지고 만다.  

 

『쓸쓸해서 머나먼』은 최승자가 10여 년이란 긴 공백을 두고 2010년 낸 시집이다. 이제 웬만한 아픔쯤은 잊은 것 같은 초연한 느낌이 시집의 정서를 지배한다. 조금 안심이 된다. 시집으로 만난 그녀는 물가에 홀로 둔 아이같았으니까. 사랑하는 이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은 마음도, 세상을 향해 쏟아내던 분노의 외침도 세월 앞에 녹아든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는 시간이 제재가 된다. 나이든 자에게 시간은 자유가 되거나 채찍이 되어 중요한 것들을 붙들게 한다. 젊음 자체가 힘이었던 시절을 지나 힘 빠진 최승자의 시는 한결 자유롭다. 이는 삶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될 것일 테다. 어쩌면 스스로를 옥죄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저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비하가 아닌 측은히 여김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니까.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여

아무래도 좋다

 

이 종달새가 더더욱이든 저 종달새가 더더욱이든

 

(어느 때인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만져보면

모두가 造花였다

또 어느 때인가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게 이뻐서

만져보면 모두가 生花였다 造花보다 이뻤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의 고백 같다. 시간은 우리가 잠시 왔다 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케하는 교사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는 게 아니라 이러저러해서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 함을 가르치니 말이다. 당위를 따지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버릴 것을 버리고 간직할 것을 간추리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최승자는 당위에서 벗어난다. 생화여야 했는데 조화라서 속았다고 생각치 않고, 하도 속아 당연히 조화려니 했는데 생화여서 더 이뻤던것을 기뻐했다. 이는 시간과의 야합이나 시간에 의해 꺾인 의지를 말함이 아니다. 시간의 다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정황이 맞물려 모멸감을 느끼게 한 삶이었지만 최승자는 시인으로서의 삶만큼은 깊게 사랑했다. 그녀가 아픈 중에 쓴 시에는 시를 쓸 때 자신이 얼마나 충일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책상 앞에서

 

병원 안 컴퓨터실

고요한 실내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웠던 부운몽, 그러나

여실했었던 부운몽

 

누군가의 시 구절처럼

가히 아름답다

'책상 앞에서'

 

(경주는 내륙, 해안은 구룡포.

구룡포 너머의 바다와 하늘

아직도 길가메시의 神話는

억겁의 시간 밖인가 안인가

나는 모른다) 

 

자신과의 화해를 최승자가 이뤘는지 모르겠다. 생명이 붙어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뤄야 할 모두의 숙제이니 여전히 진행형이리라.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녀가 아픈 중에도 시인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중에도 시를 썼고 시인으로서의 외연을 넓혀갔다. 불처럼 뜨거웠던 분노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선연한 아픔도 자신으로 갈고 부숴 녹여낸 후 다시 시의 옷을 입혔다. 

 

는 지금 이사가고 있는 중

                                                                                  

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몇 년 전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허무와 절망이 자신의 운명이라 최승자는 말했다. 자신은 홀로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구경하며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시가 시인의 삶을 추동한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운명으로 시를 선택한 것인가? 잘 모르겠다. 무엇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단지 놀라고 있을 뿐이다. 최승자의 시를 가리켜 김현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라 했단다. 그러나 나는 '삶을 시로 살아낸 자의 몸부림'이라 말하고 싶다. 그녀의 몸부림은 시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의 본능적 행위였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사랑 받은 사람은 그에 따른 책무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랬기에 시 앞에서의 단독자의 삶을 택했으리라. 무엇으로 산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준 시인. 그녀의 한 세월과 한 사막, 홀로됨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시의 세례를 받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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