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 시인선 455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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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행숙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로 시작되는 '하이네 보석가게에서'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언니라는 첫 글자를 읽는데 지금은 이국 땅에 있는 사촌 동생이 마치 옆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니라는 낱말 하나로 지나가버린 시간이 그리움이 되어 물밀듯 다가왔다. 내가 불렸던 호칭의 하나인 언니라는 말과, 언니였던 나를 사랑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시어 하나로 가슴이 요동치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조금은 슬프면서도 화자에게서 전달되는 치기와 경박스러움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겉치레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 날 것의 삶이 오히려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뭘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순간의 느낌대로 살아가는 인생, 그저 그런 부박한 인생을 그려 더 애잔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김행숙에 대한 그 같은 인상을 안고 에코의 초상을 집었다.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들은 여전히 발랄했지만 전에 비해 시어들이 한결 편안해졌고 의미는 더 묵직해졌다. 시인의 생각을 알고 싶어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더니 머리가 아파지면서 내 언어로는 표현이 힘들 것 같은 생각에 절망에 가까운 좌절감이 밀려왔다. 괜히 심각해져 며칠을 끙끙데다 내 느낌으로 찾고 내 느낌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 먹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다른 이의 생각과 말이 아닌 내 생각과 말로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시를 읽고 느낌을 나누고 싶어졌다.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는 72가지 방법

 

누군가를 미행하는 기분으로 걷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말입니다

한 가지 방법에서 사거리가 나오고, 또 오거리가

나옵니다.

또 사람들은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개 한 마리도 보았습니다.

 

뒤돌아서는 개는

, 라고 짖을까요?

개와 나의 관계를 생각할까요?

 

개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걷는 것도 한 가지 방

법인데 말입니다

오늘은 누군가를 미행하는 기분으로 걷다가

그의 뒤에서 닫힌 문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앞에서 닫힌 문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사람이었다면 매우 슬펐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사람이었다면

나는 엉뚱한 슬픔에게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뭐 하니?

 

산책하는 72가지 방법을 궁리하며 걷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햇빛이 더 기울고

햇빛이 완전히 일자로 누워버릴 때까지

왼쪽 얼굴만 서쪽 하늘처럼 발갛게 태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말입니다만

 

김행숙 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가볍고 상큼하게 생의 슬픔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김행숙 외에 누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빠져들고 말았다. 앞에서 닫힌 문과 뒤에서 닫힌 문, 누군가와 나,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일상이 슬프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만난 개를 보며 개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그녀에게서, 그러다 결국은 개의 서글픈 한 생까지 찾아갈 그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산책을 통해 그녀가 마침내 도달하게 될 종착지는 우려했듯이 생의 슬픔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산책할 수 있는 72가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응당 박수로 그녀를 응원할 것이고……편히 읽을 수 있는 시에서 굳이 슬픔을 발견하는 나는 그녀의 슬픔을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내 슬픔이 발화되어 그녀에게 반사된 것일까. 우리는 둘인가, 아니면 멀리 떨어진 하나인가. 잘 모르겠다. 계속 읽어가야겠다.

 

문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

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마음에 드는 시가 많았지만 굳이 이 시를 골랐다. 길지 않아 좋았고 이해하기 쉬워 좋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찔끔 눈물이 날 뻔 했다. 타자의 부정을 통해 자신을 더 부정했을 화자가 측은해졌고, 일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부정한 화자가 스스로를 털 깍인 짐승처럼 낮설게 여길 걸 생각하니 한없이 가여워졌다. 매몰차게 대하고 잊고, 또 매몰차게 대하고 잊은 후, 세상이 다 그런 거라며 위로하지 못하는 화자가 더 없이 안 되었다. 오늘을 견뎌야 하고 내일은 계속 되어야 하므로, 천직을 버릴 수 없는 못난 자식처럼 끌어안은 화자가 조금의 시차를 둔 우리들의 모습, 아니 내 모습 같았다. 맞다. 그래서 내 가슴이 사막같고 가뭄에 벌어진 땅 같은지도 모르겠다.

 

김행숙은 권두에서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라고 했다. 그렇다. 내와 네가 우리가 됐을 때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솔직하자면 아프고 시린 우리들이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의 이름이 되고, 격려의 낱말이 됐으면 싶다. 초등학교 3,4학년만 돼도 알 수 있는 이 지난한 여정을 김행숙은 자문과 자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사랑이라는 말은 저 멀리 밀어둔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허우적거리는 아주 작은 새로 비유된 너와 나에게 그녀의 시가 그녀의 바람처럼 앉았다 쉬어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나 또한 그런 나무의자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군다. 소박하고도 매우 커다란 꿈을 꾸는 호사를 나는 지금 그녀를 통해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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