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직전의 우리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4
김나정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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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남겨진 자에서 떠난 자로 생의 자리를 바꾸게 된다. 남겨진 자의 삶은 떠난 자의 죽음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태어난 순서를 뒤집은 죽음,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생이 마감된 죽음은 폭발적인 힘으로 남겨진 자를 몰아붙인다. 그런데 이 둘이 하나 되어 불어닥친 죽음이 있다. 자식의 피살이 그렇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를 생지옥으로 밀어넣고도 모자라는지 남은 시간마저 파괴한다. 자연사도 아니고 죽임을 당했단다, 내 자식이. 멸종 직전의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룬다. 부모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은 소설로 읽히지 않고 실제 있었던 이야기 혹은 경고로 읽혔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옆의 아이가 우리 아이를 때려서 자신이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간단한 문자였다. 문자를 보는 순간  피가 솟구친다는 게 이런 느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어떻게 됐길래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을까?’ 난감해 하셨을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됐지만 이토록 건조한 문체로 보내실 수 있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밖에서 하던 모임이 끝나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가다 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교문에서 만난 딸 아이는 덤덤하게 말하며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문자나 전화가 오면 혹시 안 좋은 일인가 싶어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작은 일도 자식과 연관되면 부모에게는 특별한 일일 수밖에 없다. 부모라는 자리가 그렇다.

 

이 책은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마치 한편의 장중한 서사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한다. 20년이 지나도 현재진행형인 과거와 그에서 비롯된 상처와 망각은 부모가 생을 끝내야만 지워지고 잊혀질 수 있는 일임을 드러내준다. 이세황과 권희자는 아직도 자신들의 딸인 나림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버릴 수 있었을으리라. 그러나 허무하게 지고 말았고 나림이의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시간도 정지되었다. 나림이를 죽게 만든 김선주를 향한 그들의 촉수는 그래서 아직까지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림이의 죽음은 피살이라기보다는 김선주를 방패막이로 한 자살에 가까웠다. 선주가 휘두르려다 멈칫한 손을 나림이가 붙잡고 눌렀기 때문이다. 나림이가 죽으면서 나림이네와 선주네는 장마철의 축대마냥 붕괴되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나림이 엄마의 과욕이 부른 비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림이 밖에 없었, 그 죽음은 엄마에게 의문만을 남긴채 증오를 양산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라는 엄마의 강요에 손가락 마비까지 온 나림이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인 선주를 그간 은근하고도 야비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선주가 나림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나림이는 해방을, 선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나림이의 죽음으로 권희자는 엄마의 기쁨을 영원히 잃었고, 이세황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채 고통을 달래며 산다. 선주네는 살인자 가족이 되어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가고, 선주는 그곳에서 피자 한판 사만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며 연명한다. 사만다가 된 선주는 미혼모 윤숙이가 되고 아들 안도를 낳은 후엔 수인이가 되어 새 삶을 시작한다. 안도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권희자는 죽은 남편의 방을 정리하며 선주가 한국에 있음을 암시하는 다잉 메시지를 본다. 사람의 생명을 앗은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나림이의 죽음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채 증오만을 키운 권희자는 안도를 유괴해 자신의 가게에 둔 후 선주와 거래한다. 나림이를 죽인 이유를 말해주면 안도를 데려다주겠다고 말이다. 모든 것에 지치고 만 선주는 권희자를 겨누던 줄칼을 자신에게 돌리고, 권희자는 선주의 얼굴에서 그토록 그리던 나림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나림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권희자. 그녀는 그제서야  자식을 생각하라며 어미의 본성으로 칼을 빼앗는다. 그 시각 안도는 가게에서 홀로 나와 집으로 오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때때로 아이를 지치게 하는 엄마들을 볼 때가 있다. 아이가 어리다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엄마들 말이다. 그 엄마들의 아이는 초등학생인데도 이미 탈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하지만 그 엄마들만 그런가 하는 자문이 책 읽는 내내 계속  일었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바람을 강요한 적은 없는지, 더 솔직하자면 내 안의 권희자는 없는지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권희자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림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 방식이 아이를 그토록 힘들게 할 줄 알았다면 즉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처참한 결과가 나을 때까지 밀어부친 것이다. 댓가는 혹독했다. 아이가 죽었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었으니까. 또한 자신은 왜 이런 일이 생긴지도 모른채 상실과 증오를 통해 지옥을 맛보아야 했으니까. 

 

참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설이었다. 사실을 대면케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그래도 권희자가 멸종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다행이다. 그랬다고 죽은 나림이가 다시 살아날 것도, 선주를 깨끗하게 용서할 수도 없지만 증오하면서 악에 받쳐 사느니보다, 또 자신을 향해 이유를 캐물으며 단죄하느니보다는 낫다. 이제 권희자에겐 아무도 없고 껍데기뿐인 늙고 추한 자신만 남았다. 그러나 선주의 줄칼을 빼앗음으로써 선주와 안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권희자의 마지막 돌발적 행동이 있어 우리는 멸종 직전에 구원 받았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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