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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평점 :
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기세로 시를 쓰던 시인이 있었다. 강렬하고 거침없는 시어는 세상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힘이 있었고, 그녀의 시를 읽으면 내 고통쯤은 별 것 아니라는 자각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의 힘이 삶의 처철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안 순간 그녀가 가여워 견딜 수 없었다. 시인의 숙명을 내려놓고 차라리 평범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녀의 삶이 덜 아리지 않았을까. 가슴이 시렸다. 시인의 시는 사랑을 받았지만 시인의 삶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 토해냈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인은 은둔이라도 하듯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적잖은 기간 동안 시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단 소식은 나중에서야 알려졌다. 그녀 혼자 겪었을 아픈 세월에 그만 처연해지고 말았다.
이미 짐작했듯이 그 시인이 바로 최승자다. 「개 같은 가을이」라는 시를 통해 가을의 이미지를 전복해버린 언어의 투사. 그러나 파죽지세로 시작했던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중략...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아, 뒷심이 이렇게 약해서야. 뻔뻔함이라도 있거나 그도 아니면 그 결기로 계속 밀었어야지 칼을 뽑고는 마무리를 못한 것처럼 시는 흐릿해지고 만다. 그녀의 시에서 나는 약한 자의 선제 공격을 느낀다. 소리 큰 사람이 약한 자다. 시를 읽으면 온몸으로 저항하는 그녀가 측은해 울컥해지고 만다.
『쓸쓸해서 머나먼』은 최승자가 10여 년이란 긴 공백을 두고 2010년 낸 시집이다. 이제 웬만한 아픔쯤은 잊은 것 같은 초연한 느낌이 시집의 정서를 지배한다. 조금 안심이 된다. 시집으로 만난 그녀는 물가에 홀로 둔 아이같았으니까. 사랑하는 이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은 마음도, 세상을 향해 쏟아내던 분노의 외침도 세월 앞에 녹아든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는 시간이 제재가 된다. 나이든 자에게 시간은 자유가 되거나 채찍이 되어 중요한 것들을 붙들게 한다. 젊음 자체가 힘이었던 시절을 지나 힘 빠진 최승자의 시는 한결 자유롭다. 이는 삶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될 것일 테다. 어쩌면 스스로를 옥죄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저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비하가 아닌 측은히 여김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니까.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여
아무래도 좋다
이 종달새가 더더욱이든 저 종달새가 더더욱이든
(어느 때인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만져보면
모두가 造花였다
또 어느 때인가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게 이뻐서
만져보면 모두가 生花였다 造花보다 이뻤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의 고백 같다. 시간은 우리가 잠시 왔다 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케하는 교사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는 게 아니라 이러저러해서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 함을 가르치니 말이다. 당위를 따지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버릴 것을 버리고 간직할 것을 간추리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최승자는 당위에서 벗어난다. 생화여야 했는데 조화라서 속았다고 생각치 않고, 하도 속아 당연히 조화려니 했는데 생화여서 더 이뻤던것을 기뻐했다. 이는 시간과의 야합이나 시간에 의해 꺾인 의지를 말함이 아니다. 시간의 다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정황이 맞물려 모멸감을 느끼게 한 삶이었지만 최승자는 시인으로서의 삶만큼은 깊게 사랑했다. 그녀가 아픈 중에 쓴 시에는 시를 쓸 때 자신이 얼마나 충일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책상 앞에서
병원 안 컴퓨터실
고요한 실내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웠던 부운몽, 그러나
여실했었던 부운몽
누군가의 시 구절처럼
가히 아름답다
'책상 앞에서'
(경주는 내륙, 해안은 구룡포.
구룡포 너머의 바다와 하늘
아직도 길가메시의 神話는
억겁의 시간 밖인가 안인가
나는 모른다)
자신과의 화해를 최승자가 이뤘는지 모르겠다. 생명이 붙어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뤄야 할 모두의 숙제이니 여전히 진행형이리라.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녀가 아픈 중에도 시인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중에도 시를 썼고 시인으로서의 외연을 넓혀갔다. 불처럼 뜨거웠던 분노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선연한 아픔도 자신으로 갈고 부숴 녹여낸 후 다시 시의 옷을 입혔다.
내 詩는 지금 이사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몇 년 전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허무와 절망이 자신의 운명이라 최승자는 말했다. 자신은 홀로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구경하며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시가 시인의 삶을 추동한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운명으로 시를 선택한 것인가? 잘 모르겠다. 무엇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단지 놀라고 있을 뿐이다. 최승자의 시를 가리켜 김현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라 했단다. 그러나 나는 '삶을 시로 살아낸 자의 몸부림'이라 말하고 싶다. 그녀의 몸부림은 시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의 본능적 행위였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사랑 받은 사람은 그에 따른 책무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랬기에 시 앞에서의 단독자의 삶을 택했으리라. 무엇으로 산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준 시인. 그녀의 한 세월과 한 사막, 홀로됨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시의 세례를 받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