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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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공중보건의로 일했고, 지금은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인 김승섭 교수가 세상에 내놓은 첫 책이랍니다. 언론의 극찬을 받은 책이라하여 작년 말 사놓고는, 제법 되는 두께에 눌려 책장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더랬습니다. 언젠가부터 책 읽기가 힘겨워지고 밀도있는 글도 쓰지 못하는 터라,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평에 끌려 제게 오게 하였습니다.

인문교양서나 사회비평서로 분류되는 글인데 어쩜 이리 아름다운지요. 기저에 슬픔이 깔려서일까요? 이 책을 통해 아름다운 글은 문장 자체가 가진 고유의 힘에 의해서도 나오지만, 대상을 대하는 사람의 애정에도 크게 기인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처연한 느낌이 계속 저를 잡고 있습니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저이기에 어쩌면 저 자신에 대한 애처로움이 투사되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고 리뷰라는 이름의 글을 올리는 것이 이 책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리뷰를 무용하게 하는 책이랄까요? 조금 과장되이 말하자면,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어떤 문장을 올려도 평균 수준의 리뷰보다 낫지 싶습니다. 이 책을 읽고 감상을 올리지 않는다면 선악을 분별하지만 침묵하는 자의 비겁함이 되지 싶어 책의 일부분을 올리는 것으로 면피코자 합니다.

<건강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개개인으로만 바라볼 때 그런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난 100년간 거대한 혁신을 이뤄낸 현대의학으로도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을, 현상 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중략...

그러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위험한 작업장을 방치했던 일터가 금연율을 낮췄고, HIV 치료약 공급을 전적으로 민간보험에 맡겨둔 지역사회가 AIDS 사망률을 높였고, 경제 위기 속에서 공공보건의료 영역의 투자를 줄이기로한 국가의 결정이 결핵 사망률을 증가시켰습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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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유혹에 영혼을 던진 렘브란트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외국편 5
노성두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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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주된 기능이 무엇이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위로 '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좋다'라는 이 한 마디의 말이 나왔다면 예술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영혼으로 만들어낸 작품이 음악이건, 미술이건, 또 다른 무엇이건간에 누군가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내거나 '어때, 멋있니?' 라는 말을 물어온다면 예술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 맞다. 예술이 '예술을 위한 자리'가 아닌 '인간을 위한 자리'로 내려올 때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발휘된다. 더 깊숙히 들어가면 실상 예술은 '보여지는 세계' 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잔잔한 초대장인 거다.

그 예술의 자리로 안내하는 책이 있어 마치 추천서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무엇보다 작가의 성실함이 글 전반에 담겨 있었고 글의 유려함과 여운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특히나 글 자체가 주는 매력이 그림과 더불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에게 내 가슴의 이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이 책은 어린이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단다. 덧붙여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며, 작품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다양한 맥락에서 살펴보게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한다. 그 기획 의도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책을 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렘브란트이다. 렘브란트에 대해서는 이름만 많이 들었다 뿐이지 그닥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변명 같은 말을 하자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사람들도 많고 르네상스 이후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제대로 안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렘브란트를 가리켜 '빛의 화가'라 한다. 우리는 빛에 대해 무덤덤하지만 화가들에게 빛은 무척 경이로운 대상인 듯 하다. 그들은 빛과 그림자를 통해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형태를 빚어내고 음영의 효과를 이용해 마치 손에 잡힐 듯한 입체감도 만들어낸다. 빛과 어둠은 단순히 평면 위에 입체감만 부여하는게 아니라 캔버스의 균형감까지도 조율하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빛과 어둠을 통해 도덕성까지도 드러낼 수 있단다. 경이롭기만 하다.


렘브란트는 온종일 빛과 더불어 그림을 그렸지만 그러나 그의 생에 내린 어둠은 무척 짙었다. 그의 작품성은 자신의 공방을 차리기 전인 19살부터 인정 받았지만 그의 생은 인간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의 시간들로 채워졌다. 렘브란트가 2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7살에 결혼해 얻은 첫 아이는 생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뜨며, 3년 뒤에 얻은 둘째 아이도 한 달이 못 돼 이별을 하고 만다. 그후 2년 뒤에 태어난 셋째도 한 달이 못 돼 사망하고, 그 해에는 자신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게 된다.


자식을 셋이나 잃은 충격으로 아내는 시름시름 앓게 되고, 네째 아들을 낳은 후 그의 아내는 제대로 키워보지도 못한 채 생후 1년도 안된 아기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다. 36살의 남자가 7명의 가족을 떠나보내는 엄청난 슬픔을 만나고 있다. 그 후 렘브란트는 어린 아이를 키우기 위해 유모를 들이는데 그의 명성을 탐낸 유모가 결혼을 요구하는 바람에 재판까지 가는 시끄러운 일을 겪게된다. 결국 유모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만다.


몇 년 후 첫번째 부인을 떠나 보낸 상처도 잊을 만큼 예쁜 처녀를 유모로 들이게 되지만 첫 부인의 유언서 작성으로 정식으로 재혼을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긴다. 졸지에 동거녀가 된 그의 아내는 결국 교회 법정에 서게 되고 결혼도 못한 상태로 딸을 낳게 된다. 이 일은 렘브란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두번째 아내도 9년 후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첫 부인이 낳은 아들은 자신이 결혼한 그 해에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차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할지,어떤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지 잠시 생각해 본다. 하지만 입도 떨어지지 않는다. 입을 닫고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리라. 빗장 닫힌 그의 방은 열릴 줄 모르고 그는 그림과 더불어 하루 하루를 보낸다. 절망이 가득한 삶, 너무한 가혹한 삶. 그러나 이 속에서 예술이 나온다. 예술은 이렇듯 인간의 고통을 먹고 출생한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삶의 질곡을 통과하면서 더 깊어진다. 모든 잔가지들을 쳐내고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그의 눈은 오히려 고요하다. 내면에 폭풍이 휘몰아칠수록 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렘브란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빛이 아니라 고뇌, 또는 어둠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빛의 화가'라 부른다. 말년의 그의 자화상도 그가 '빛의 화가'로 불리는데 손색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아픔들을 어둠으로 덮지 않았다. 그리곤 그 절규의 시간들을 그림과 더불어 싸우며 통과했다. 한 인간이 지난한 고통과 혹독한 운명의 굴레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던졌을 때 예술은 아주 작고도 작은 수식어 하나를 던져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빛의 화가'로 등극하였고 그의 그림은 세월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감동을 작품 안에 가득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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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죽지 않는다 - 종이책의 미래를 짊어진 서점 장인들의 분투기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백원근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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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이 가진 안정적이고도 차분한 분위기를 나는 사랑한다. 서점이란 공간이 만들어내는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은, 내 집은 아니지만 내 집보다 더 좋은 어떤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책만이 낼 수 있는 향훈과 그 질감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 고백은 순전하지 않다. 사랑하면 좋으나 싫으나 한결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인터넷 서점에 비해 할인율이 적다는 이유로 한때 잘 가지도 않았고, 때로는 이용만 했다. 원래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지는 게임이다. 사랑과 이용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나를, 그럼에도 서점은 온전히 품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서점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무심한 사이 서점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1994년 5,683개였던 서점이 근 20여년 만에 4,100 곳이 넘게 폐업해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서점 수는 1,559 곳으로 줄어들었다.(한국서점편람 2016)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지역 서점들이 사라졌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물론 최근 도서정가제로 인한 경쟁력 강화로 지역 서점의 숨통이 트이고, 독립서점의 출현 등 반가운 소식이 들리긴 해도 지역 서점은 여전히 위기 속에서 허덕이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난 뭘하고 있었던 걸까? 서점을 사랑한다며, 책을 많이 읽는다며 자만하고 있을 때 서점은 벼랑 끝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점의 부재야말로 우리의 미래와 직결된다는 것을 왜 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예전 직장에 다닐 때 지진 몸을 잠시 쉴 겸 서점에 가면, 몸보다 더 지친 마음이 쉴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 몇 장 넘기고 나면 피곤함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동화책은 정말 좋았다. 읽을수록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렇게 환상적인 책들이 나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삶이 서럽게 느껴질 때 서점 안에 있으면,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다. 잔잔하지만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따스함에 힘을 낼 수 있었고, 씩씩하게 다시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젊어 한동안, 서점에 대한 내 감정이 나만의 짝사랑인줄 알았다. 당시는 인터넷 서점도 없었고, 생긴 후에도 굳이 이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하고 서점을 자주 찾지 않게 되면서, 서점은 내 기억 속의 아름다운 장소로만 남게 되었다. 자주 들르지 않게 되니 마음에서도 멀어졌다. 서점이 나란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임을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책을 파는 곳, 그래서 좋은 곳으로만 한정짓고 있었다. 쥰쿠도서점의 후쿠시마 아키라가 그의 책 '희망의 서점론'에서 "독자란 책의 후원자"라 정의한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책을 읽는 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내 짧은 소견이  부끄러웠다. 어떻게 그런 의식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는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채 물신주의적 사고에 물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름 인문학 책을 읽는다는 사람이, 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비루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니...사람만이 미래라고 하면서, 서점인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나를 누가 죽비로 등이 아니라 머리를 쳐줬으면 싶었다. 그길로 딸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을 찾았다. 그래야 미안한 마음이 가실 것 같았다.    

 

서점은 여전했다. 잔잔한 음악에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책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었다. '그래, 이 느낌이었어.' 이 느낌을 내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삶이 힘들 때 책 속에서 다시 힘을 찾았던 엄마처럼 내 아이도 그리 되길 간절히 바랐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있는지조차 모를 직원은 움직임마저 조용했다. '만일 이 서점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내 아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서점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던, 서점은 우리 동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점이 단순히 그리움의 장소로만 기억되면 안될 것 같다. 사람들의 발길을 서점으로 돌릴 수 있도록 진지하고도 꾸준한 변화가 선행되어야지 싶다. 종이책의 위기를 말하지만, 서점의 미래는 앞으로 더 혹독할지 모른다. 어디를 가나 딱딱하고 비슷한 서가의 배열은, 서점을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매력없는 공간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각 서점만의 특장점을 부각시키고, 지역이 요구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서점 운영에 반영해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서점인들도 스스로 책과 책 사이의 숨겨진 스토리를 개발하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 자생력을 키워야하지 싶다. 그래야 서점이 단순한 책 판매장이 아닌 책으로 인해 꿈 꿀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어쩌면 이미 시도해 왔고 별 효과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서점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준엄한 숙제이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불확실할지도 모를 효과에도 불구하고 고객으로서 이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아이들이 존재하는 한 그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며, 서점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는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서점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사명감을 갖고 맡겨진 일을 해왔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고객이 찾아올 수 있을지, 서점은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 일에 독자이자 서점의 수혜를 입은 나도 작은 발걸음이지만 동참할 계획이다. 책의 후원자란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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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직전의 우리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4
김나정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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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남겨진 자에서 떠난 자로 생의 자리를 바꾸게 된다. 남겨진 자의 삶은 떠난 자의 죽음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태어난 순서를 뒤집은 죽음,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생이 마감된 죽음은 폭발적인 힘으로 남겨진 자를 몰아붙인다. 그런데 이 둘이 하나 되어 불어닥친 죽음이 있다. 자식의 피살이 그렇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를 생지옥으로 밀어넣고도 모자라는지 남은 시간마저 파괴한다. 자연사도 아니고 죽임을 당했단다, 내 자식이. 멸종 직전의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룬다. 부모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은 소설로 읽히지 않고 실제 있었던 이야기 혹은 경고로 읽혔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옆의 아이가 우리 아이를 때려서 자신이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간단한 문자였다. 문자를 보는 순간  피가 솟구친다는 게 이런 느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어떻게 됐길래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을까?’ 난감해 하셨을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됐지만 이토록 건조한 문체로 보내실 수 있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밖에서 하던 모임이 끝나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가다 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교문에서 만난 딸 아이는 덤덤하게 말하며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문자나 전화가 오면 혹시 안 좋은 일인가 싶어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작은 일도 자식과 연관되면 부모에게는 특별한 일일 수밖에 없다. 부모라는 자리가 그렇다.

 

이 책은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마치 한편의 장중한 서사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한다. 20년이 지나도 현재진행형인 과거와 그에서 비롯된 상처와 망각은 부모가 생을 끝내야만 지워지고 잊혀질 수 있는 일임을 드러내준다. 이세황과 권희자는 아직도 자신들의 딸인 나림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버릴 수 있었을으리라. 그러나 허무하게 지고 말았고 나림이의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시간도 정지되었다. 나림이를 죽게 만든 김선주를 향한 그들의 촉수는 그래서 아직까지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림이의 죽음은 피살이라기보다는 김선주를 방패막이로 한 자살에 가까웠다. 선주가 휘두르려다 멈칫한 손을 나림이가 붙잡고 눌렀기 때문이다. 나림이가 죽으면서 나림이네와 선주네는 장마철의 축대마냥 붕괴되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나림이 엄마의 과욕이 부른 비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림이 밖에 없었, 그 죽음은 엄마에게 의문만을 남긴채 증오를 양산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라는 엄마의 강요에 손가락 마비까지 온 나림이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인 선주를 그간 은근하고도 야비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선주가 나림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나림이는 해방을, 선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나림이의 죽음으로 권희자는 엄마의 기쁨을 영원히 잃었고, 이세황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채 고통을 달래며 산다. 선주네는 살인자 가족이 되어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가고, 선주는 그곳에서 피자 한판 사만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며 연명한다. 사만다가 된 선주는 미혼모 윤숙이가 되고 아들 안도를 낳은 후엔 수인이가 되어 새 삶을 시작한다. 안도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권희자는 죽은 남편의 방을 정리하며 선주가 한국에 있음을 암시하는 다잉 메시지를 본다. 사람의 생명을 앗은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나림이의 죽음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채 증오만을 키운 권희자는 안도를 유괴해 자신의 가게에 둔 후 선주와 거래한다. 나림이를 죽인 이유를 말해주면 안도를 데려다주겠다고 말이다. 모든 것에 지치고 만 선주는 권희자를 겨누던 줄칼을 자신에게 돌리고, 권희자는 선주의 얼굴에서 그토록 그리던 나림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나림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권희자. 그녀는 그제서야  자식을 생각하라며 어미의 본성으로 칼을 빼앗는다. 그 시각 안도는 가게에서 홀로 나와 집으로 오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때때로 아이를 지치게 하는 엄마들을 볼 때가 있다. 아이가 어리다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엄마들 말이다. 그 엄마들의 아이는 초등학생인데도 이미 탈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하지만 그 엄마들만 그런가 하는 자문이 책 읽는 내내 계속  일었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바람을 강요한 적은 없는지, 더 솔직하자면 내 안의 권희자는 없는지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권희자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림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 방식이 아이를 그토록 힘들게 할 줄 알았다면 즉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처참한 결과가 나을 때까지 밀어부친 것이다. 댓가는 혹독했다. 아이가 죽었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었으니까. 또한 자신은 왜 이런 일이 생긴지도 모른채 상실과 증오를 통해 지옥을 맛보아야 했으니까. 

 

참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설이었다. 사실을 대면케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그래도 권희자가 멸종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다행이다. 그랬다고 죽은 나림이가 다시 살아날 것도, 선주를 깨끗하게 용서할 수도 없지만 증오하면서 악에 받쳐 사느니보다, 또 자신을 향해 이유를 캐물으며 단죄하느니보다는 낫다. 이제 권희자에겐 아무도 없고 껍데기뿐인 늙고 추한 자신만 남았다. 그러나 선주의 줄칼을 빼앗음으로써 선주와 안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권희자의 마지막 돌발적 행동이 있어 우리는 멸종 직전에 구원 받았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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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 시인선 455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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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행숙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로 시작되는 '하이네 보석가게에서'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언니라는 첫 글자를 읽는데 지금은 이국 땅에 있는 사촌 동생이 마치 옆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니라는 낱말 하나로 지나가버린 시간이 그리움이 되어 물밀듯 다가왔다. 내가 불렸던 호칭의 하나인 언니라는 말과, 언니였던 나를 사랑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시어 하나로 가슴이 요동치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조금은 슬프면서도 화자에게서 전달되는 치기와 경박스러움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겉치레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 날 것의 삶이 오히려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뭘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순간의 느낌대로 살아가는 인생, 그저 그런 부박한 인생을 그려 더 애잔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김행숙에 대한 그 같은 인상을 안고 에코의 초상을 집었다.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들은 여전히 발랄했지만 전에 비해 시어들이 한결 편안해졌고 의미는 더 묵직해졌다. 시인의 생각을 알고 싶어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더니 머리가 아파지면서 내 언어로는 표현이 힘들 것 같은 생각에 절망에 가까운 좌절감이 밀려왔다. 괜히 심각해져 며칠을 끙끙데다 내 느낌으로 찾고 내 느낌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 먹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다른 이의 생각과 말이 아닌 내 생각과 말로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시를 읽고 느낌을 나누고 싶어졌다.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는 72가지 방법

 

누군가를 미행하는 기분으로 걷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말입니다

한 가지 방법에서 사거리가 나오고, 또 오거리가

나옵니다.

또 사람들은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개 한 마리도 보았습니다.

 

뒤돌아서는 개는

, 라고 짖을까요?

개와 나의 관계를 생각할까요?

 

개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걷는 것도 한 가지 방

법인데 말입니다

오늘은 누군가를 미행하는 기분으로 걷다가

그의 뒤에서 닫힌 문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앞에서 닫힌 문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사람이었다면 매우 슬펐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사람이었다면

나는 엉뚱한 슬픔에게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뭐 하니?

 

산책하는 72가지 방법을 궁리하며 걷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햇빛이 더 기울고

햇빛이 완전히 일자로 누워버릴 때까지

왼쪽 얼굴만 서쪽 하늘처럼 발갛게 태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말입니다만

 

김행숙 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가볍고 상큼하게 생의 슬픔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김행숙 외에 누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빠져들고 말았다. 앞에서 닫힌 문과 뒤에서 닫힌 문, 누군가와 나,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일상이 슬프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만난 개를 보며 개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그녀에게서, 그러다 결국은 개의 서글픈 한 생까지 찾아갈 그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산책을 통해 그녀가 마침내 도달하게 될 종착지는 우려했듯이 생의 슬픔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산책할 수 있는 72가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응당 박수로 그녀를 응원할 것이고……편히 읽을 수 있는 시에서 굳이 슬픔을 발견하는 나는 그녀의 슬픔을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내 슬픔이 발화되어 그녀에게 반사된 것일까. 우리는 둘인가, 아니면 멀리 떨어진 하나인가. 잘 모르겠다. 계속 읽어가야겠다.

 

문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

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마음에 드는 시가 많았지만 굳이 이 시를 골랐다. 길지 않아 좋았고 이해하기 쉬워 좋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찔끔 눈물이 날 뻔 했다. 타자의 부정을 통해 자신을 더 부정했을 화자가 측은해졌고, 일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부정한 화자가 스스로를 털 깍인 짐승처럼 낮설게 여길 걸 생각하니 한없이 가여워졌다. 매몰차게 대하고 잊고, 또 매몰차게 대하고 잊은 후, 세상이 다 그런 거라며 위로하지 못하는 화자가 더 없이 안 되었다. 오늘을 견뎌야 하고 내일은 계속 되어야 하므로, 천직을 버릴 수 없는 못난 자식처럼 끌어안은 화자가 조금의 시차를 둔 우리들의 모습, 아니 내 모습 같았다. 맞다. 그래서 내 가슴이 사막같고 가뭄에 벌어진 땅 같은지도 모르겠다.

 

김행숙은 권두에서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라고 했다. 그렇다. 내와 네가 우리가 됐을 때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솔직하자면 아프고 시린 우리들이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의 이름이 되고, 격려의 낱말이 됐으면 싶다. 초등학교 3,4학년만 돼도 알 수 있는 이 지난한 여정을 김행숙은 자문과 자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사랑이라는 말은 저 멀리 밀어둔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허우적거리는 아주 작은 새로 비유된 너와 나에게 그녀의 시가 그녀의 바람처럼 앉았다 쉬어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나 또한 그런 나무의자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군다. 소박하고도 매우 커다란 꿈을 꾸는 호사를 나는 지금 그녀를 통해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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