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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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은 이전과 이후를 가른다고 했던가? 최근 한 에세이집을 만났다. 흰색 표지에 파스텔톤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넣은 후, 여백에 책 제목과 지은이의 이름을 작게 넣어, 더도 덜도 아닌 적정함으로 완벽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글이라고는 이 외에 없고 뒷표지엔 아무런 설명조차 없지만 북디자인만으로도 이미 특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에 걸맞도록 천천히 책을 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처럼 책에도 서로 다른 물성이 있다. 이 책은 불필요한 것을 덜어 내 있는 것을 돋보이게 한 후 읽는 이를 완만하게 끌어당겼다. 작가나 출판사는 최소한으로만 드러나는데도 그들의 특질은 오롯이 드러나 광휘롭기만 했다.

손에 쥐는 느낌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편집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이런 느낌의 책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함은 이제 없지만, 좋은 것이 모여 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 뭐지? 왜 이렇게 아늑한 거야.'

"친구와 함께 언 강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혹독한 사별이 몇 차례 그녀를 관통했다. 그러고도 다시 웃으며 지내는 듯 보였지만, 웃음과 웃음 사이에 캄캄한 허방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위로의 불가능을 절감할 뿐이었다. 위로의 말은 아무리 공들여 건네도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위로의 한계이자 말의 한계일 것이다." 18쪽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중에서

책에 담긴 스물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어느 곳을 열어도 반짝였다. 무연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 속에 머물며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교류하여 만든 호흡과 위로는 견디기 힘든 삶을 버티게 하는 작고도 큰 힘이었다. 그들의 시간은 때로 길고 때로 짧지만 순간을 살아내며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을 넘기면 그 다음도 넘길 수 있으니까.

"나와 아저씨들은 끝까지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아랑곳 않고 곁을 내주었다. 집 앞 담벼락과 트럭 밑처럼, 거기 둥근 밥그릇처럼, 질박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55쪽 <과일이 둥근 것은>중에서

읽다 보니 교집합이 커져갔다. 한정원은 자신과 시간을 함께 했던 에밀리 디킨슨과 실비아 플라스, 가네코 미스즈등 적잖은 시인들을 불러와 차분히 소개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된다던가. 그녀의 한 부분을 만들었던 시어들과 나긋한 느낌이 조용히 전해졌다. 이 책은 한 서점의 2020년 디자인 전문가가 뽑은 최애 북 커버로 선정되었고, 2020년 작가, 출판인, 기자, MD 50인의 뽑은 '올해의 책'로도 선정되었다.

자신이 대개는 싱숭생숭하고, 계절을 가리지 않고 타며 조용하지만 조금 이상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 책에 탑승하기를 권한다. 모두에 이야기했지만 결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테고 그래도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다. 아니 넘치도록 따뜻해서 서로에게 시가 되고 산책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다.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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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리의 힘 -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전략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
김민태 지음 / 혜화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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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부를 걸고 일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돌아갈 길마저 끊어버린 후 비장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모든 것을 던졌으니 기대하던 결과가 나오면 좋겠다. 하지만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배수진을 칠만큼 절실한 심정이 오죽하겠냐만 간절하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같이 시계가 불투명할 때는 더더욱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퇴직한 후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창업했다가 사업을 접은 이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상공업이나 자영업의 비중이 유독 높은데, OECD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중은 G7국가의 13.7%의 2배에 육박하는 25.1%라고 한다.


작년 초 모 기업의 공장 앞에 음식점을 열었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직격탄을 맞아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몸만 나오게 된 이들의 사연을 신문에서 보았다. 아무 상관없는 나도 가슴이 먹먹했는데 당사자와 가족들은 어떠했을까. 피눈물이 난다는 건 저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전략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는 부제를 단 이 책을 보면서 이들이 생각났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패는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혹여 실패를 대비한 어떤 전략이나 한 발을 다른 어딘가에 걸쳐두었다면 그토록 가슴 아픈 일은 겪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은 『양다리의 힘』이란 제목답게 양다리를 걸쳐 성공한 이들의 사례를 들려준다. 그 중에는 스타트업의 신화인 '배달의 민족'의 김봉진과 '카카오 스토리'의 김범수를 비롯,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아인슈타인, 괴테,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어떻게 오늘의 자리에 다다를 수 있었는지를 짚어준다.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의외로 낯설다. 이들에게서 맨땅에 헤딩이라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찾을 수 있다면 절실하지 않음의 역설이다. 그러고보니 부담 되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종종 보았다.


저자 김민태는 한 분야에서 안전성을 확보하면 다른 분야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다며 양다리의 힘을 주창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꾼 독창성은 성취 욕구가 낮은 상태에서 꽃 피웠다며 양다리어가 되라고 권유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안전은 반드시 필요하고, 도전은 위험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위험을 낮추는 능력이라 설득하며 말이다.

배달의 민족의 김봉진의 경우 배민 앱을 만들기 전 일반 회사의 평사원을 거쳐 오래도록 열망했던 수제 가구점을 차렸다. 그러나 1년 만에 전세 보증금을 까먹고 빚까지 지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지인들과 뜻을 같이해 공동창업으로 배민 앱을 만드는데, 멤버들이 다같이 모인 것은 앱이 완성된 후였다. 다들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가볍게 만든 서비스가 어쩌다 사업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저는 배수의 진을 절대 치지 말라고 강조해요. 배수의 진이라는 건 어렵고 절박한 상황이잖아요. 왜 스스로 그런 상황을 만드냐는 거죠. 오히려 무언가를 꼭 해내야겠다고 독하게 결심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져요. 즐기면서 작은 성장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아주 비장한 각오로 한다? 사업이 나라를 구하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 25쪽

저자는 적극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을 양다리어로 명명하며 그들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솔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권지안은 가수와 화가를 겸하고 있고 아나운서 최송현은 방송국을 퇴사한 후에도 여전히 사회를 보며 스킨스쿠버, 영화배우, 유튜버로 활동중이다. 요즘 '준며든다'라는 말을 유행시킨 개그맨 최준은 카페 사장과 쿨제이라는 부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심지어 그는 개그맨도 부케로 그의 본명은 김재준이다.


저자는 이어 천직의 개념마저도 살짝 비트는데 그가 정의하는 천직은 내가 만족해 하는 일이며, 범위는 한시적이고 개방적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적지 않은 대가들도 처음부터 그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며, 우연하게 시작했던 일이 잘 되어 기존에 하던 일을 접게 되거나, 우연을 기회로 만들어 새 길을 냈다고 한다. 요리 연구가이자 기업인인 백종원도 처음에는 중고차의 딜러였고,어떤 일을 계기로 방향을 틀게 되면서 오늘의 백종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요즘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시기에 하고 싶은 일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것도 없지 싶다. 일이라는 것이 어떻게 단순히 돈벌이로만 한정될 수 있겠는가. 일을 통해 자아의 실현이라는 영혼의 갈망까지 이루고 있는데 말이다. 어떤 일을 제한하지 않고 단정 짓지 않으며 하나씩 점을 잇듯 넓혀갈 때, 하고 싶은 일을 더 나이 들어서까지 우리는 안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에 단초를 줄 작은 책을 미래로 걸치며 다리처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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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문서정 소설집
문서정 지음 / 강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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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려진 칼처럼 날이 선 사람들이 있다. 곤두선 신경과는 달리 마음은 약해 그들은 조금만 다쳐도 아파 견디질 못한다. 생에 시달리다 못해 화가 나 있는 그들에겐 사소한 말도 버겁다.

그러나 살짝만 닿아도 살을 가를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그들이 지닌 칼은 무디다. 누군가를 해치려는 용도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쓰임에서다. 칼을 들고라도 나서지 않으면 생을 이어가기 힘든 이들은 먼저 찌르거나 외면하고, 은폐하거나 버리면서 도리어 버려지는 모순 속에 산다.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삶이란 숙제를 안고 피 흘리며 사는 이들의 격통이 담긴 문서정의 소설집이다. 책에는 평생에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한 사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여덟 편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배우가 여러 인물로 분해 연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슴과 손에 번뜩이는 칼을 품은 「밤의 소리」의 희명은 어릴 때 입은 화상으로 인조 귀를 붙이고 다니는 스물일곱 살의 아가씨다. 다른 한 쪽의 청력마저 잃어 보청기를 끼지만 희명은 거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한데 기이한 일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밤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희명은 들리지 않는 낮의 세계와 세미한 소리마저 들리는 밤의 세계를 산다.

희명은 P시청 본관에 있는 도서관의 사서로, 같은 장애인 공무원이자 관 내 갤러리의 큐레이터 겸 실장인 조승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조승우의 집을 방문하던 날 희명은 자신의 왼쪽 귀가 인조임을 알게 된 그와 다투게 되고, 서로를 수용하지 못한 채 뺨을 때리며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희명은 자신의 옆 호에 사는 말더듬이 총각이 생을 멈추려는 것을 보고 구해준 후 세상과 맞서 나갈 수 있도록 욕을 가르친다. 빨간 셰퍼드라는 별명에 맞게 공격적 수비법을 가르치면서 이런 날 조승우에게 연락이 오면 행복한 밤이 될 거라 생각한다. 벼려진 칼이 되어 자신을 지키는 희명의 이야기는, 사회적 약자의 생존이 물어뜯기라는 처절함 속에 나온다는 것을 아프게 보여준다.

첫 작인 「레일 위의 집」의 서준과 마지막 작인 「소파 밑의 방」의 수현은 다르고도 흡사하다. 기간제 교사인 서준과 주간지의 훈남 기자 수현은 제목에서 전해지는 느낌 그대로 불안한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 분투하며 산다. 그들은 어릴 적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 인해 위선조차 부리지 못하는 용렬함과 분노 조절 장애라는 생의 부산물에 각기 눌려있다.

서준은 역사에서 만난 오갈 데 없는 수영과의 짧았던 일탈로 자신의 생이 꼬일까 두려워 연거푸 그녀를 외면한다. 버림받은 수영은 자기처럼 구질구질한 인생을 구원해준다는 미명 하에 노숙자의 살인까지 감행한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파혼 했던 수현은 이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정원을 추억하며, 그녀와의 사랑을 떠올리는 소파를 과감히 정리한다. 버리고 외면하는 서준에게 생은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까. 자신을 직시하고 생이 새긴 상처를 받아들인 수현은 또 어떤 삶을 짤까.

「개를 완벽하게 버리는 방법」의 은성과 「밀봉의 시간」의 나는 다른 이에 의해 삶이 무너지거나, 다른 이를 추락하게 만든 상처로 괴로워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거나, 가해의 상처를 지우고 싶어 기억을 잃은 물고 물리는 삶의 정경은 인생의 불가해성과 함께 인생이 지난한 숙제이자 범접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임을 처연히 보여준다.

소설 속의 그들은 삶의 격랑 안에 일그러지고 부서지며 벼랑 끝이나 폭풍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건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뿐인데 그들은 버티며 내일을 기약한다. 그런 그들의 눈물은 삶의 결정체이고, 수많은 버려짐을 통해 터득한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눈물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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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Hello,Stranger 2021-07-08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초딩님의 당선작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
 
저 청소일 하는데요? -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김예지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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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그녀의 책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 인생의 짐을 제가 들고 가는 사람을 어른으로 정의한다. 그렇다.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다. 어른이 되려면 여러 요소들이 갖춰져야 하지만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제적인 자립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성품이 좋아도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 자기 앞가림은 일, 즉 돈 벌이를 통해 이뤄진다.


돈을 버는 것은 단순한 벌이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자아 실현까지 이루게 한다. 돈을 번다는 것은 이렇게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의 저자 김예지는 청소 일을 한다. 대학 졸업 후 잘 다니던 직장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때려 치우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섰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수입은 없는데 꼬박꼬박 돈은 나가고 이력서를 냈던 곳들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런 그녀에게 청소 일을 하셨던 어머니가 같이 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하였다. 이왕 할 바엔 제대로 하자 싶어 개인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대표가 되어 현재까지 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다. 스물일곱에 시작했던 일이 서른을 넘기고서도 계속 되었고, 생각 외로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느냐고 사람들이 물어오면 말문부터 막혔다. 이럴 때 머리와 가슴은 얼마나 먼지 청소 요정을 자청했건만 이같은 질문 앞에선 맥을 못 췄다.


그녀 안에는 청소하는 나와 그림을 그리는 나가 공존한다. 전자는 부끄러움에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한 직업을 가진 나이고, 후자는 설명은 필요 없지만 밥 벌이를 못하니 확실하지 않은 직업을 가진 나이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30대 중반 다시 학생이 되어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 삶의 방향을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선배 언니이자 멘토인 선교사님이 네가 사람은 착한데 시건방진 데가 있다며-나는 잘 모르겠는데- 된 사람이 되어보라는 조언에 간병인을 하게 되었다.

대학 병원에서 10개월 동안 13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내 의지로 시작한 일이고 좋은 분들을 만났지만 마음은 무척 힘들었다. 그녀처럼 두 명의 내가 공존했고 감정이 수시로 비집고 나와 마음을 헤집었다.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간병인이냐며 말리다 내 고집을 꺽지 못한 엄마가 간병인을 하러 가는 나를 보고 우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올케에게 들었다. 먹을려고 먹는 게 아니라 바람을 쐬고 싶어 먹는 거라 음식도 부실한데다 밤에도 수시로 깨야 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자 그 기간 내내 두피에 발진이 났고, 얼굴도 꺼칠하니 몸도 좋지 않았다. 건강한 선택이었고 마음을 다해 했으며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받은 경험이었지만, 머리와 가슴의 괴리로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씩씩하게 웃어넘기는 그녀가 읽는 내내 애처로웠다. 그 무렵 나는 30대 중반이었지만 그녀는 20대였으니 얼마나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었을까.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거나 혹은 의아하게 보는 시선 속에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에 작가가 되어 독자와 만났을 때, 남의 시선을 어떻게 이겼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기지 못하고 그냥 견뎠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청소 일은 자리를 잡았지만 퇴사한 목적에서 자꾸 멀어지자 그녀의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내려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자아의 성취를 통한 자존감의 고양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것은 허영된 마음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건강한 욕구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그림으로 전하고 싶었다. 그러다 떠올린 것이 독립출판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허접한 이야기지만 자신처럼 헤매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출판 강좌를 듣고 난 후 책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책을 보기 시작했다. 기대 이상으로 책이 팔렸고 들어온 인세로 작업실을 마련했다.

청소 일을 하며 그녀는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무시와 냉대를 받았다. 어머니와 함께 했고 웃으며 잘 대응해 보려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을 꾸준히 해냈고 그 시간을 기록하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말풍선을 채워 책으로 만들었다. 청소 일은 그녀를 힘들게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해 주었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과 취향이 다르며 관점도 다르다. 하물며 인생 길이 같을 수 있을까. 청소 일이 선망할만한 직업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그림 그리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삶을 안정적으로 꾸릴 수 있었다면 청소 일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내 직업에 관한 의미와 가치는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이가 아무리 인정해주고 부러워해도 내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일이 있을 때 내일이 있다는 글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청소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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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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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모호하고 아득하며 몽환적이고 뜻밖이죠. 실제와 환상을 전복하고 이어가며 생각지도 못할 상황 속에 독자를 밀어넣고는 외면합니다. 설명은 뜬금없고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소설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거나 삶의 지침을 제공하겠다는 의도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삶의 어떤 답도 주지 않겠다는 자세, 책임지지 않는 자의 자유만이 엿보입니다. 그럼에도 매혹되어 하루키를 읽습니다.


하루키는 다릅니다. 에세이와 소설에서의 하루키가 다르고, 장편과 단편소설에서의 하루키가 다릅니다. 그는 단어를 선별하기도 하지만 단어를 만들기도 합니다. 때로 자신이 문체가 되기도 하죠. 그의 이야기는 같은 듯 다르고 촉촉하고 나긋하며 황당하고 괴이합니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며 너인 독자를 혼돈 속에 가둡니다. 도저한 흡인력, 지금껏 그와 함께 하는 이유입니다.

『일인칭 단수』는 『여자 없는 남자』를 낸 후 하루키가 6년만에 낸 소설집입니다. 저는 『여자 없는 남자』의 연장선 상에서 읽었습니다. 두 책은 마치 쌍둥이 같았어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로 만들고 째즈나 클래식을 BGM으로 만들어, 한 편의 영화처럼 들고오는 작가로 하루키를 따를 사람이 있을까요? 육체의 나이는 들어가고 그래서 과거를 자꾸 반추하지만 하루키는 여전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하루키를 연호할 때 저는 무라카미 류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69_sixty nine』은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러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Q84』로 하루키를 만났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루키를 거명하는지 그제서야 알겠더군요. 거대 서사의 압도적인 힘을 느끼며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전설적인 새 붕(鵬)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에는 8편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음악과 관련된 3편의 이야기, 잠시 스쳐간 여자 친구와 여인에 대한 3편의 이야기, 그리고 특별한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와 표제작이 있습니다. 하루키를 관통하는 소재들이 골고루 포진되어 있죠. 째즈, 팝, 야구, 섹스, 현실에서 비현실로의 이동, 운명적인 사건 등이요. 모든 만남과 사건들은 한때 각별했으나 이제는 잊혀진 듯 묻혀있고 어느 순간 지층을 뚫고 기억 저 밑에서 살아 꿈틀거립니다.

하루키는 삶에서 특별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취합합니다. 그 시간들은 특별한 시간인 카이로스이며 다시 올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아 가두어 둘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지워지지 않죠. 하루키가 포착하는 것은 일상의 어느 한 순간입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하루키의 탁월함이지만 평이한 그의 글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특별한 시간을 잡아내는 포착력에 있습니다.

"실제로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도 그 재킷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만약 비틀스의 재킷 사진이 없었더라면 내가 느낀 매혹도 그토록 강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음악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것은 음악을 포함하면서도 음악을 넘어선, 더욱 커다란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정경은 순식간에 내 마음 속 인화지에 선명히 아로새겨졌다.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장소 한 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위드 더 비틀스 83쪽

현실은 대개 지루하고 지저분하며 추하죠. 드물게 감동을 주는 날도 없지 않지만 밋밋하고 나른합니다. 다른 세계로의 여행, 혹은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나는 것은 이토록 곤혹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마법입니다. 잠시지만 현실을 잊게 하니까요. 그러나 어디에나 있는 화자인 나는 주체가 되기보다 전하는 자가 되어 자신을 이야기 합니다.

“궁극의 연애와 궁극의 고독ㅡ나는 그뒤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작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 다락방에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늙은 원숭이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면서 그와 함께 먹었던 감씨과자와 진미채를 생각한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214쪽

이야기 속에는 누군가를 전하는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하는 대상은 다를지라도 타자를 통해 전하는 것은 결국 나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존재인 호모 에로스이고, 예술하는 존재인 호모 아르텍스이며, 이야기하는 존재인 호모 나렌스입니다. 나는 타자를 통해 나를 만나고 나를 이해하고 아직도 모르는 나를 탐구합니다. 그 탐구 속에 하루키는 독자인 나를 초대합니다.

때로 읽었던 이야기 같은 그의 글을 또 만나면서도 하루키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 때문입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각기 다르고 때로 비슷하지만 결국 하나로 수렴됩니다. 그가 일인칭 단수로 이야기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루키이면서 하루키가 아닌 나, 그 나를 찾는 여정에 나도 일인칭 단수로 함께 합니다. 봄날의 곰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한 하루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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