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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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모호하고 아득하며 몽환적이고 뜻밖이죠. 실제와 환상을 전복하고 이어가며 생각지도 못할 상황 속에 독자를 밀어넣고는 외면합니다. 설명은 뜬금없고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소설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거나 삶의 지침을 제공하겠다는 의도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삶의 어떤 답도 주지 않겠다는 자세, 책임지지 않는 자의 자유만이 엿보입니다. 그럼에도 매혹되어 하루키를 읽습니다.


하루키는 다릅니다. 에세이와 소설에서의 하루키가 다르고, 장편과 단편소설에서의 하루키가 다릅니다. 그는 단어를 선별하기도 하지만 단어를 만들기도 합니다. 때로 자신이 문체가 되기도 하죠. 그의 이야기는 같은 듯 다르고 촉촉하고 나긋하며 황당하고 괴이합니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며 너인 독자를 혼돈 속에 가둡니다. 도저한 흡인력, 지금껏 그와 함께 하는 이유입니다.

『일인칭 단수』는 『여자 없는 남자』를 낸 후 하루키가 6년만에 낸 소설집입니다. 저는 『여자 없는 남자』의 연장선 상에서 읽었습니다. 두 책은 마치 쌍둥이 같았어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로 만들고 째즈나 클래식을 BGM으로 만들어, 한 편의 영화처럼 들고오는 작가로 하루키를 따를 사람이 있을까요? 육체의 나이는 들어가고 그래서 과거를 자꾸 반추하지만 하루키는 여전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하루키를 연호할 때 저는 무라카미 류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69_sixty nine』은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러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Q84』로 하루키를 만났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루키를 거명하는지 그제서야 알겠더군요. 거대 서사의 압도적인 힘을 느끼며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전설적인 새 붕(鵬)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에는 8편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음악과 관련된 3편의 이야기, 잠시 스쳐간 여자 친구와 여인에 대한 3편의 이야기, 그리고 특별한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와 표제작이 있습니다. 하루키를 관통하는 소재들이 골고루 포진되어 있죠. 째즈, 팝, 야구, 섹스, 현실에서 비현실로의 이동, 운명적인 사건 등이요. 모든 만남과 사건들은 한때 각별했으나 이제는 잊혀진 듯 묻혀있고 어느 순간 지층을 뚫고 기억 저 밑에서 살아 꿈틀거립니다.

하루키는 삶에서 특별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취합합니다. 그 시간들은 특별한 시간인 카이로스이며 다시 올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아 가두어 둘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지워지지 않죠. 하루키가 포착하는 것은 일상의 어느 한 순간입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하루키의 탁월함이지만 평이한 그의 글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특별한 시간을 잡아내는 포착력에 있습니다.

"실제로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도 그 재킷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만약 비틀스의 재킷 사진이 없었더라면 내가 느낀 매혹도 그토록 강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음악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것은 음악을 포함하면서도 음악을 넘어선, 더욱 커다란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정경은 순식간에 내 마음 속 인화지에 선명히 아로새겨졌다.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장소 한 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위드 더 비틀스 83쪽

현실은 대개 지루하고 지저분하며 추하죠. 드물게 감동을 주는 날도 없지 않지만 밋밋하고 나른합니다. 다른 세계로의 여행, 혹은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나는 것은 이토록 곤혹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마법입니다. 잠시지만 현실을 잊게 하니까요. 그러나 어디에나 있는 화자인 나는 주체가 되기보다 전하는 자가 되어 자신을 이야기 합니다.

“궁극의 연애와 궁극의 고독ㅡ나는 그뒤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작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 다락방에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늙은 원숭이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면서 그와 함께 먹었던 감씨과자와 진미채를 생각한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214쪽

이야기 속에는 누군가를 전하는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하는 대상은 다를지라도 타자를 통해 전하는 것은 결국 나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존재인 호모 에로스이고, 예술하는 존재인 호모 아르텍스이며, 이야기하는 존재인 호모 나렌스입니다. 나는 타자를 통해 나를 만나고 나를 이해하고 아직도 모르는 나를 탐구합니다. 그 탐구 속에 하루키는 독자인 나를 초대합니다.

때로 읽었던 이야기 같은 그의 글을 또 만나면서도 하루키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 때문입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각기 다르고 때로 비슷하지만 결국 하나로 수렴됩니다. 그가 일인칭 단수로 이야기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루키이면서 하루키가 아닌 나, 그 나를 찾는 여정에 나도 일인칭 단수로 함께 합니다. 봄날의 곰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한 하루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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