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평전
데니스 브라이언 지음, 승영조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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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브라이언이 쓴 아인슈타인 평전은 아인슈타인의 삶과 학문을 연대별로 나눠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저자가 아인슈타인에 대해 문헌 조사와 주위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성실하게 한 내용을 바탕으로 써 나갔기 때문인지 책을 읽으면서 꽤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애썼다는 표가 난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전기나 평전을 쓰려고 했던 사람들은 오토 네이선과 헬렌 두카스 라는 두 명의 충성스러운 케르베로스 때문에 자료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오토 네이선은 아인슈타인의 유언집행자였고 헬렌 두카스는 아인슈타인이 죽는 날까지 곁에서 보좌했던 개인 비서였다.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개인적인 편지와 아인슈타인에 대한 기록 등을 보호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고 한다. 오토 네이선의 경우, 아인슈타인의 기록을 보호하려고 재판까지 불사하였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집조차 아인슈타인 사후 32년 후인 1987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고 하니 그 사람의 정성을 알만 하다. 참고로 오토 네이선은 1987년에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아인슈타인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슈뢰딩거의 삶>이라는 전기를 쓴 월터 무어가 인용한 몽테뉴의 “우리 인생은 어리석음과 신중함 사이를 오간다. 존경할 만 하고 규범적인 생애만 기록하려는 작가는 반쪽 진실을 덮어 버리는 셈이다”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평전은 그 사람의 삶을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데니스 브라이언의 이 책은 그 점에서 그 전에 나왔던 위인전 수준의 책이나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깎아 내리려고 의도적으로 쓴 책들과는 구분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기록에 의존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상상력인지 (실제로 상상하려 들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잘 구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이 아인슈타인 평전은 1장부터 11장까지는 탄생부터 1905년 Annalen der Physik에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학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실을 때까지인 1879년부터 26세까지를 기술하였고 12장부터 24장까지는 유명해지고 나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인 1906년에서 1932년까지의 아인슈타인의 학문적인 업적과 삶을 다루었다. 24장부터 42장까지는 미국에 망명한 후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이 평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후기의 삶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제삼제국을 거치면서 독일 내에 있던 아인슈타인에 관한 자료보다는 미국 내에 있는 자료를 접하기가 더 수월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그가 사회의 약자 편에 서서 어떤 일을 하였는가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부분이 이 책의 약점으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이 주는 감동은 바로 그러한 아인슈타인의 모습 때문에 온다. 그의 학문에 있어서나 세계를 바라보는 눈에서나 많은 점이 일치한다. 그는 학문에서도 일관성을 지니려 노력하였지만 세계를 보는 눈에서도 늘 자신의 철학에 근거하여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이 점을 비록 당시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말년에 통일장 이론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고자 하는 이론)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던 점에서도 자신과 토론하는 대상이 유명한 물리학자이든 평범한 대학원생이든 늘 같은 자세로 토론에 임했던 그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명예나 부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옷차림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점만 빼면 오히려 동양의 선비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평생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양자역학의 문을 여는 데 가장 크게 공언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고전 물리에 속한 아집 센 물리학자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자연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신은 노회하지만 심술궂지 않다 (Raffiniert ist der Herr Gott, aber boschaft ist Er nicht: 이 말은 아인슈타인이 노년을 보낸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에 쓰여 있다고 한다)“에서 보듯이 아인슈타인에게는 자기만의 독특한 우주관이 있었다. 그가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가 결정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지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아마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그의 학문과 그의 세계관의 일치다. 그가 약자 편에 섰던 것은 그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세계관에 따라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 조화와 통일에 대한 세계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개의치 않고 늘 약자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은 정작 FBI가 자신을 오랫동안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지만 매카시 선풍이 몰아쳤을 당시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로젠버그 부부를 위해 그토록 열성적으로 노력하였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전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적 산물이라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세상에 내어놓을 때 아인슈타인은 장장 5주에 걸쳐 철야를 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의 건강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학자로서의 열정을 찾아볼 수 있다. 학문과 삶에 있어서의 조화 그리고 통일성,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의 열정,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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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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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달 전에 잡았다가 바빠서 팽겨쳐둔 책인데 6월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정독하기로 작정하고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 나가며 노트에 정리하고 있다. 첫 장을 자세히 읽었는데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그냥 사실과 역사적 사실의 차이. 학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단어의 정의가 중요하다.
수학에서 항상 정의에서 출발해서 작은 정리(Lemma)를 세우고 다시 정리(Theorem)를 유도하고 다시 그 정리에서 proposition을 유도하듯 타 학문도 수학만큼 정식화 되어있진 않아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정리가 정의가 되고 혹은 그 역이 되듯 관점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자질구레한 것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도 안 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역사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역사의 개념을 먼저 이해하여야지만 역사학을 올바로 연구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건 여느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에서 닮고 싶은 천재들의 삶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학문에 임한 사람들이다. 와인버그. 생존하고 있는 물리학자들 중에서 이 분의 학문하는 스타일을 참 배우고 싶다. 와인버그는 논문을 깔끔하게 쓰기도 하지만 이 분이 쓴 교과서를 보면 한 분야를 연구할 때 역사적으로 그 발전해 온 과정과 동기를 먼저 샅샅이 연구한다. 역사란 비단 역사학자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기타 학문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래야지만 안목을 갖고 연구할 수 있으니까. 결국 학문이란 과거에 이루어 놓은 업적을 현재의 눈으로 살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기도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가끔 breakthrough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과거에 이루어놓은 업적과 문제점 때문에 bias되어서 paradigm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 늦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과거를 살필 필요가 있는 법이다.

2.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여태 읽고 있다. 읽을만한 책이다. 그러나 읽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칼 포퍼가 쓴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책을 비판하고 있다. 인문학에서 비판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자연과학과 짐짓 다르게 보인다. 근원적으로 같을지 모르지만 표피 층위에서 보면 확실히 다르다. 보는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다. 결국 인문학에서 불변하는 가치들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언가 주장하려면 의도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의 포퍼 비판은 논리적으로 합당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포퍼 자신이 과학철학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 좁은 틀 안에서 사회를 분석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퍼가 쓴 책에서도 건질 것들이 있다. 포퍼는 역사주의라는 틀 안에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가두어 두었지만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 들어있는 독소 조항을 살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물론 역사가 카는 이 역사주의라는 말을 혐오하는 듯 하다.
어쩌면 긴 시간을 두고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섭렵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전공이 아니라 부담은 되지만 사람 살아가는 것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런 지루한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게 느껴진다. 아, 이 불가피하다는 말. 카가 비판했던 말이다. 역사에서의 불가피성, 결정론적 사고 말이다. 역사에서의 결정론, 그게 세계 정신이든 보이지 않는 손이든 신의 섭리든 그런 결정론이라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배제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 반대로 우연의 역할 또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이라는 것,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또 다른 우연에 의해 상쇄된다고 하던데....... 그 부분을 읽으며 내 머릿 속에 든 생각은 random variable을 적분할 때 fluctuation이 크지 않다면 결국 가장 dominant한 놈은 classical path가 된다는 게 떠올랐다.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 어쩌면 엄청난 큰 fluctuation 혹은 역사상 벌어지는 일들의 상호작용이 엄청나게 비선형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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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시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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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시대>는 은퇴한 늙고 병든 여교수의 눈을 통해 본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남아프리카를 보여준다.  <철의 시대>가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건 그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남아프리카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하는 데 있지 않고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지식인이 그 시대 속에서 그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그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바꿔 가는지 담담하게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남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에서 물리학 교수였던 테겐 (Tegen)을 통해서 들은 말이 전부다.  그 또한 흑인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예절 없고, 거지 근성에, 폭력적이다"는 말.  자신도 차를 몰 때엔 항상 권총을 옆자리에 두고 다닌다는 말.  자신의 밑에서 일했던 흑인 포스트닥과 중국인 포스트닥의 비교도 했다.  사람들이란 늘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좌표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기 마련이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위해 투쟁한다지만 궁극적으로는 좌표의 원점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철의 시대>의 주인공 커렌도 마찬가지였다.  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홀로 남아프리카에 남았는데 나이 들어 암에 걸려 딸에게 자신의 남은 생과 경험을 기록하는 서간문체의 소설이다.  딸에 대한 애정이 잔뜩 녹아나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주안점은 주인공 커렌이 자신의 둘레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본의든 본의 아니든 개입되면서 깨달아간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좌표의 중심이 더 이상 자신에게 두는 게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심에 놓여있는 흑인들로 옮겨가는 얘기다.  커렌은 자신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흑인 플로렌스의 아들 베키가 살해된 현장을 목격한다.  비오는 날, 불타버린 집에서 총에 맞은 채 발견된 베키의 시체.  그리고 베키의 친구인 존이 베키를 찾아 커렌의 집에 왔다가 경찰의 손에 죽는다.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커렌은 그 시대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주인공 커렌에게는 동정심이 있었다.  퍼케일에 대해 가졌던 동정심, 하지만 정작 위로받는 건 커렌이다.  퍼케일이라는 이름 모를 부랑자, 바다에서 조난당한 뒤 한손을 못 쓰는 부랑자에게서 말이다.  

수치심과 동정심.  아마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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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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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식당 앞 노상에서 책 세일을 한다길래 전시된 책들을 보다가 책 네 권을 샀다.  세일이라지만 내가 고른 책들은 20%만 깎아준다 한다.  하긴, 남들이 애써서 쓴 책을 헐값에 사겠다고 하는 심보가 그리 좋은 건 아닐 것이다. 

오늘 산 책 중 한 권은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쓴 <교양>이라는 책이다.  원제는 Alles, was Man wissen muss.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이 책은 실종된 독일 교육부터 시작한다.  요즘 신문 지상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평준화 문제가 이 땅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독일 땅에서도 문제가 되는가 보다.  교사들에 대한 말들도 그렇고.  독일어에서 교양은 Bildung이라고 부른다.  흔히 교육이라는 단어인 Ausbildung과는 구분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하면 bilden이라는 단어에서 온 명사 Bildung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Aus라는 접두어가 무엇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의미가 있으니까 Ausbildung이 가능하려면 Bildung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현 독일 교육 제도를 Gorgons 자매들 세 명에 비유하고 있다.  붏가실성,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자의성의 지배를 표현하기 위해 메타포로 이 고르곤 자매를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독이 교육의 근본 문제는 바로 교양의 실종에 있다고 한다.   

어쩌면 저자가 서두에 하고 있는 말은 이 땅에서도 고스란이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년 대학에서도 학생들 가르치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는 것이 느껴진다.  교육, 특히 대학에서의 교육이라는 것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굳이 교양을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험을 위한 공부에 치중을 해온 학생들은 지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요즘 가르치고 있는 물리과학의 세계 강의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뼈져리게 느낀다.  지적인 무관심.  이 무관심은 자신의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소통을 막게 하고 깊이 있는 전문 지식을 얻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땅의 교육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 올바른 궤도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 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만 잘해서 대학을 갈 수 있는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스스로 알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평준화 같은 문제는 어쩌면 지엽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1968년 학생 혁명 이후,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지금 이 시간, 가장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 고등학교 때를 돌아보곤 한다.  그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떠올리면 내 생애 중 고등학교 3년은 무덤에 묻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다.  내게 더 넒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스승은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없었다.  함께 동굴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앞을 지나가는 그림자만 보고 산 격이었으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의 정신의 지주가 되는 많은 내용들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괄적이긴 하지만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뚜렷하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유럽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 문학, 역사, 사회, 회화......  언뜻 살펴보면 한 사람이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한 양이 아닌가 싶지만 이 많은 내용을 유기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시대을 살면서 살아야 할 방식 그리고 그 지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양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말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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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결 - 전3권
김용 지음 / 중원문화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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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소설은 무협지 장르에 포함시키기엔 그 작품성이 너무 훌륭하다.  2003년 7, 8월 독일에서 머무는 동안 김용의 소설 전권을 모두 읽었다.  대개의 무협지들이 논리의 비약과 서사구조의 부재에 시달리는 반면, 김용의 소설은 그 서사 구조가 탄탄하다.  뿐만 아니라 김용의 소설은 재미도 재미이지만 무림이라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하지만 완전한 가상 세계도 아닌 세계를 통해 인간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보여주는 황당무개한 내용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에 김용의 작품을 포함시키면 그 작품의 황당무개성은 그다지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서양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황당무개한 내용과 비교하여 오히려 나은 점도 있으니까 말이다.  무림에서는 노력, 공부를 높게 치니까 말이다. 

 

김용이 쓴 작품 중 이 연성결이라는 작품은 돈 앞에서 인간들의 신의와 의리가 어떻게 망가뜨려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당대의 협의로 알려진 철골묵악(鐵骨墨鄂) 매념생에게는 제자가 세 명이 있었는데 이 세 제자 (만진산, 언달평, 척장발)는 스승인 매념생이 혈도파의 우두머리와 대결 후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스승을 습격한다.  습격한 이유는 매념생의 무공 절학인 연성검법이 적혀있는 책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매념생은 크게 부상을 입고 정전이라는 의인의 손에 구출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만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정전에게 신조공이라는 내공에 관한 책과 연성결을 전해준다.  이 연성결은 당시선집에 나오는 단어를 조합하여 스물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숫자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스물여섯 글자를 풀어보면

 "강릉성남의 서천영사(西天寧寺)의 대전불상을 향해  경건하게
절을 하고 기도를 하면 석가여래는 왕생극락의 복을  내릴  것이
다."

이라는 뜻이다.  결국 그 서천영사의 석가여래가 보물이었고 그 밑에는 엄청난 보물이 있었다.  하지만 매념생을 공격한 그 세 명의 제자는 그 보물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그 뿐만 아니다.  그 보물에 눈이 어두웠던 많은 사람들은 만진산을 좇아 서천영사로 와서 서로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한다.  칼에 죽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보물에 묻어있던 독에 중독되어 모두 죽고 만다. 

보물에 욕심이 없었던 주인공 적운 만이 그곳에서 살아 남아 서장에 있는 설산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생에게도 돌아간다. 

 

이 소설에서 정파라고 스스로를 부르지만 위선으로 가득 찬 인물이 한 명 나오는게 바로 낙화유수라는 멋진 별호를 지닌 강남사협중의 한명인 화철간이다.  김용의 소설에서는 특히 정파 인물 중 이렇게 위선과 악의로 가득 찬 사람들을 종종 등장시키는데 (예를 들면 소오감호의 영호충의 스승인 악불군) 이 화철간 역시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아무튼 김용의 소설은 무림이라는 황당무개한 얘기가 눈에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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