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
David J. Griffiths 지음, 권영준 옮김 / 청범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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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쓴 Griffiths의 전자기학 교재에 대한 서평에서도 말했지만 Griffiths는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한 물리학자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물리교육에 관심이 더 많은 학자이다. 실제로 물리교육 논문집인 American Journal of Physics를 훑어보면 Griffiths가 쓴 논문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저자에 대한 정보는 아래 Wikipedia에 가보면 간략하게 볼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David_Griffiths_(physicist

물리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자 답게 Griffiths가 쓴 전자기학 교재와 양자역학 교재는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사용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나 또한 물리교육과 양자역학 강의에서 한번 이 책을 교재로 선택한 적이 있다.     

 

이 Griffiths의 양자역학 책은 학부 수준에 맞춰 쓴 기타 양자역학 책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점이 많다. 한 때 많이 사용되었던 Liboff의 Introductory Quantum Mechanics (위 그림. 판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두꺼워진 교과서 -.-)처럼 학부교과서는 양자역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부터 쓴 책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바로 Schroedinger 방정식을 도입한다. 그러니까, 일단 한번 풀어 봐, 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저자가 양자역학을 가르치면서 고민한 부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통적인 방법이 더 교육적이냐, 아님 이 책처럼 바로 양자역학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게 더 좋은가 하는 판단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부분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교육방법에서의 논쟁거리이기도 하니까 여기서 그 논의는 피하겠다. 하지만 학문에 있어서 그 학문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하는 역사적인 고찰은 교육적인 면에서도 무시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자역학 발생사 또는 발전사를 간략하나마 학부 양자역학 과정에 넣는 게 필요하다.  

이 Griffiths 교과서는 양자역학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는다. 그냥 바로 <파동함수>로 읽는 이들을 이끈다. 이제 갖 수영을 배우는 아이를 물에 던져 놓고 마치 물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려는 듯 처음부터 바로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소개한다. Griffiths의 의도는 분명하다. 최근에 작고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 물리학자 Mott가 양자역학 관련 교육 논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Mott는 Wave mechanics라는 양자역학 교과서를 기술한 적이 있다). "왜 양자역학은 쉬운 길을 놓아두고 흑체복사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Max Planck가 흑체복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면서 양자론(지금은 고전양자론이라고 부르지만)을 1900년 독일 물리학회(Deutsche Physikalische Tagung)에서 처음 세상에 발표하였을 때를 보통 양자역학의 생일로 본다. 그런 이유로 많은 양자역학 교과서를 보면 이 흑체복사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흑체복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알아야할 물리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제 막 3학년이 된 물리학과 학생들에게 양자역학을 가르치면서 흑체복사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준비도 안 된 학생들을 자칫 잘못하면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는 역사적 순서와 같이 양자역학을 가르치는 게 초급과정에서는 무리일 수도 있다. Griffiths는 이 점을 잘 았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Schroedinger 방정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물리적인 계에 적용하다 보면 자연스레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거라는 게 Griffiths의 생각이다.  

이 Griffiths의 교육 방식에 동의하고 나면 이 책은 아주 잘 쓴 양자역학 교과서이다. Griffiths의 전자기학 교재도 그렇지만 이 책 또한 참신한 문제를 많이 담고 있다. 좋은 문제를 많이 제공해준다는 건 좋은 교과서가 지녀야 할 덕목 제1호다. 물리를 처음 접하는 학생이 반드시 해야할 과정이 바로 혼자 힘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 또한 간결하고 핵심을 잘 짚어준다. 하지만 학부 수준의 양자역학을 마스터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과서 한권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쓴 양자역학 교과서(Gasiorowicz가 쓴 책 또는 Liboff가 쓴 교과서)를 참고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Griffiths 책을 잘 소화한 학생이라면 그 다음 단계인 Sakurai나, Schiff, Merzbacher가 쓴 대학원 수준의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기초는 갖춘 셈이다.  

참고로 이 책의 오타 수정은 아래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찾을 수 있다. 

http://academic.reed.edu/physics/faculty/griffith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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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hanics (Paperback, 3, Revised)
Symon, Keith R. / Addison-Wesley / 197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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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과정에서 역학은 일반물리을 마친 다음,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과목이다. 보통 고급과정에서는 양자역학의 반대말로 고전역학이라고 부르지만 학부에서는 통상 역학 또는 일반역학이라고 부른다. 역학 교과서는 기본 과목 답게 시장에 나와 있는 교과서가 무척 많다. 그 중에서 이 K.R. Symon의 역학 교과서는 3판이 1971년에 나왔으니까 벌써 40년이나 지났으니까, 고전(?)의 반열에 든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Symon 역학 교과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1. Elements of Newtonian Mechanics 
2. Motion of a particle in one dimension
3. Motion of a particle in Two or three dimensions
4. The motion of a system of particles
5. Rigid bodies. Rotation about an axis. Statics
6. Gravitation
7. Moving coordinate systems
8. Introduction to the mechanics of continuous media
9. Lagrange's equations
10. Tensor algebra. Intertia and stress tensors
11. The rotation of a rigid body
12. Theory of small vibrations
13. Basic postulates of the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14. Relativistic dynamics 

와 같이 총 14장에 걸쳐 학부생이 알아야 할 역학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먼저 학생들이 일반물리에서 배운 역학 순서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큰 충격 없이 이미 배운 내용을 심화시킨다는 생각으로 따라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역으로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이미 배운 내용을 다시 깊이 있게 배운다는 점에서는 역시 장점이다. 이 부분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조금 뒤에 다시 말하겠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은 매 장마다 다양한 문제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학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문제를 풀어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모두 풀어보기엔 버거울 정도로 연습문제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많은 문제를 제공해준다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다. 세 번째로 요즘 나오는 역학 교과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연속체에 관한 내용도 이 책에서는 충실히 다루고 있다. 어떤 내용은 대학원 수준에 비추어 봐도 그리 내용의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진동 문제도 아주 자세히 잘 다루어 놓았다.  

반면에 이 책은 단점도 분명하다. 오늘날 학부과정에서 역학을 배울 때 가능하면 빨리 변분법과 해석역학을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비교적 늦게 해석역학을 다룬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 이 부분이 크게 단점이 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책으로 일년 동안 역학을 배운다고 생각해보면 2학기 중간고사 때 쯤에나 해석역학을 다루게 된다. 그리고 해석역학 부분도 지나치게 짧게 다루어 놓아 학생들이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해석역학의 중요한 개념을 잡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해석 역학의 기본인 가상 힘(Virtual force), 해밀턴 역학을 좀 더 세밀하게 다뤘으면 좀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두 번째 단점은 상대성이론을 좀 무미건조하게 다루어 놓았다. 물론 이 상대성이론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과목이 전자기학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첫 번째 단점에 비해 그리 큰 단점은 아닐 것이다. 
 

물리학과정에서 역학을 배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양자역학으로 가는 길을 다지는 것인데, 이 교과서는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 그 이유는 앞에서 지적은 첫 번째 단점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인데, 이건 아주 큰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학 그 자체로만 봐서는 이 책은 목표에 아주 충실한 교과서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나온지 이미 40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동안 발전한 비선형역학 부분이 빠져 있다.  

정리하면, 이 책은 장점과 단점이 분명한 책이지만, 역학 그 자체를 공부하는 데는 표준교과서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저런 점에서 별 3개 반이 적당하겠지만 별 4개면 이 책에 대한 평가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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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덴탈리즘 - 반서양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이안 부루마 외 지음, 송충기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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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Occidentalism: The West in the eyes ofits enemies
by Ian Buruma and Avishai Margalit


바루마와 마갤릿이 쓴 <옥시덴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오리엔탈리즘>에 빗대어 쓴 책이기는 하지만 <오리엔탈리즘>과는 달리 쉽게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옥시덴탈리즘에 담겨 있는 서양에 대한 편견은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과거의 여러 예를 이용하여 보여준다. 저자는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미주의 또한 옥시덴탈리즘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한다. 특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서양의 중요한 한 정치적 틀로 볼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그 옥시덴탈리즘은 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각장에 나와 있는 저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장-서양에 대한 전쟁: 1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불었던 민족주의적 움직임을 예로 들어 옥시덴탈리즘을 설명한다. 1942년 7월, 일본 교토에서 열렸던 학술대회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은 "어떻게 근대를 극복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는데, 이 대회에 참석한 일본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었다고 한다. 저자는 1942년 교토 학회에서 다룬 근대는 바로 서양을 의미한다고 했다. 전시였던 일본에서 열린 학회인 만큼 민족주의적이었을 테고 그 주적이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극복 대상은 미국이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기서 더 발전해서 개인적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일본 입장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 중심으로 형성된 옥시덴탈리즘의 뿌리를 찾기 위하여 메이지 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유신 동안 일본은 문명개화라는 슬로건 하에 서양으로부터, 즉 유럽으로부터 과학기술과 서구인문학을 받아들였다. 그 유신은 성공적이었지만 도시와 농촌 사이의 심각한 격차를 불러왔다. 이 도시와 농촌 사이의 이질감은 저자가 옥시덴탈리즘을 해석하는 데 키워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학회에서 논의된 근대 극복 방안은 일본 과거의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유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말은 옥시덴탈리스트의 눈에는 서양은 탈 인간화가 된 사회이고 그 안에서 정신적인 것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게 된 사회로 본다. 하지만 저자는 이 옥시덴탈리즘의 근원은 단순히 일본이나 이슬람국가에서 일어난 하나의 현상으로 환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유럽에서 먼저 발생하여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하나의 주의로 본다. 저자는 전체주의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가 이 옥시덴탈리즘이라고 한다. 저자는 1942년 일본의 교토 학술대회에서도 그랬듯이 이 옥시덴탈리즘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생각이 다소 방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바루마와 마갤릿은 이 책의 저술 목적을 1장 말미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옥시덴탈리즘의 특성은 도시, 서구정신, 부르주아지, 무신론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이 옥시덴탈리즘이 등장했는지 이해하고 이 주의가 한 지역의 산물로 환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일관된 사상적 흐름에서부터 촉발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다.

2장-서양의 도시: 2장에서 저자는 1장에서 말한 옥시덴탈리즘이 적대감을 표출하는 첫 번째 대상인 서양의 도시와 그 적대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2장은 9.11 테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쌍둥이 빌딩의 붕괴는 빈 라덴과 같은 옥시덴탈리스트의 눈에 타락한 도시의 멸망으로 비쳤을 것이다. 도시는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유희와 상업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종교를 외면한다. 세속화, 오만함, 제국건설, 개인주의, 돈, 권력, 성의 상품화로 이미지화된 도시는 그런 것들을 적대시하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파괴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미지화로 인간 도시는 인간성을 상실한 곳으로 규정지어 진다. 이것이 도시를, 특히 서양도시를 적대시하는 옥시덴탈리즘의 시각이다. 9.11 테러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뉴욕은 테러리스트들이 막연히 선택한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가장 타락한 인간의 도시의 대표로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뉴욕 중에서도 쌍둥이 빌딩이 주공격 대상이 된 것 또한 테러리스트들이 자신들의 복수의 대상으로 그들에게 바벨탑 같아 보이는 그 빌딩을 세심하게 선택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저자는 도시를 적대시하는 저 옥시덴탈리즘이 이슬람 문명의 원래 모습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수 세기 동안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인들에게 무지를 깨우쳐주는 도시로 인식되었지 결코 파괴하여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저자는 도시를 적대시하는 옥시덴탈리즘의 뿌리를 유럽에서 찾는다.
19세기 유럽에 인간을 욕망만을 좇는 열등한 동물로 가두어 놓는 대표적인 대도시는 프랑스 파리, 영국의 런던, 맨체스터 같은 곳이었다. 도시는 거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시기심과 공포심을 갖게 했다. 도시는 그들에게 돈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저자는 19세기 유럽에서 도시에 대한 적대심이 유대인에게로 모아졌다는 것을 말한다. 2장에서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자는 어떻게 해서 도시에 대한 적대감이 유대인에게로 집중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유대인 자본가를 가난한 사람의 피를 뽑아 먹고 사는 추악한 기생충으로 묘사한 카를 마르크스, 유대인을 반(反)생산자, 거간꾼, 사기꾼, 기생충으로 묘사한 피에르 조세프 프루동. 그리고 나치 사상가들도 똑같은 논조를 들고 나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부분 또한 저자의 논조가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보인다. 결국 저자는 나치로 시선을 모은다. 결국 1942년 일본 지식인들은 1920년대, 30년대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이들의 반서구적이고 반도시적인 사고에 영향을 입은 셈이다.
근대 유럽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되었다. 공화주의에 반대하는 프랑스인들의 음모론에서 반유대주의가 싹을 틔웠다는 것이다. 그 망상이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된 곳은 독일이었고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반유대주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도시에 대한 대결을 역사에서 여러 가지 예를 찾아 든다. 중국 마오쩌둥 치하에서 일어났던 문화혁명 또한 도시와 농촌 간의 대결이었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군대가 파괴한 도시 프놈펜, 카불에서 행한 탈리반의 악정, 사라예보를 불태운 니콜라 제비크, 이 모두는 인간성을 상실한 도시에 대항해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옥시덴탈리스트들의 편견 때문이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3장-영웅과 상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에 독일 사회과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쓴 <상인과 영웅>이라는 책은 모든 측면에서 옥시덴탈리즘의 핵심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3장의 제목을 이 책 제목에 따서 영웅과 상인이라고 했다. 좀바르트는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 자유·평등·박애를 상인들의 이상과 동일시하였다. 그는 이를 물질 상품과 육체적 안일만을 목표로 하는 상인의 세계관으로 자유·평등·박애를 이해했다. 좀바르트는 이를 영웅주의의 반대말로 안일주의(Komfortismus)라고 불렀다. 3장에서 저자는 부르주아지에 적대적인 옥시덴탈리즘을 논한다. 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적대감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이익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좀바르트가 부른 그 안일주의와 일맥상통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영웅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이 영웅주의는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바로 서양의 반동적인 사상으로 원주민의 전통(사무라이정신)이 재해석되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가미카제 특공대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일본학자들은 유럽이 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유럽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고 잘못 이해하고 거기에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천황에 대한 숭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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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뿌리 - 서구 세계를 바꾼 사상 혁명
이사야 벌린 지음, 나현영 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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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이 쓴 책 중에서 <고슴도치와 여우>는 읽어 보았고 <자유론>는 읽으려고 사 놓았고 <낭만주의의 뿌리>는 지금 읽고 있다. 서구 사상이든, 동양 사상이든, 큰 줄기는 늘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어쩌면 인간들의 사상 체계라는 것이 원초적으로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늘 두 가지 상이한 사상은 평행선을 긋는 듯 하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는 서로 보합 관계인 듯 하기도 하고 또 한 면은 경쟁적으로 서로를 발전시키는 듯 하다.

낭만주의의 탄생은 계몽주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확신에 대한  반발과 도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 19세기, 계몽주의가 유럽 대륙을 관류할 때 당시 유럽의 변방이던 독일에서 이성으로는 모든 것에 답할 수 없다는 반발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19세기 너머 20세기의 저 실존주의와 20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그 영향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어쩌면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 사조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뚫고 살아남은 사조사상들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문법으로, 비록 지나치게 단순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해독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사고의 엄밀성과 기민함, 그 세밀도는 시대가 감에 따라 점점 더 발전해 가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틀은 이 둘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고는, 면밀하게 살펴 보면, 자연과학 내에도 내재되어 있다. 환원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 물리학과 환원주의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생물학적 관점 내지는 복잡계의 관점. 거기서 더 나아가 학문 간의 통섭을 주장하는 사상들. 그 둘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래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긴장감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득이 되지 않는 법. 20세기를 피로 물들였던 파시즘 또한 이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저 역사주의적, 사회공학적인 막시즘은 이성에 더 가까울까. 아니면 오히려 선지자적인 또는 메시아적 낭만주의에 더 가까울까. 사회를 보는 시선을 날카롭게 키우는 방법은 이들 사상의 흐름을 깊이 살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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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철학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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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읽은 두 번째 책은 우리학교 철학과에 있는 김진석 교수가 쓴 <더러운 철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앞 몇 장은 자조적인 느낌이라 - 뭐, 순수물리를 하는 사람들도 그 비슷한 자조 어린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라 익숙하지만 - 갑갑한 느낌이 들었지만 저자의 의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우리식으로 풀어보면 고매한 이상, 거대담론으로서의 철학, 위대한 사상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마치 똥통에 한발을 담구고 있는 듯한 현실적인 의미로서의 철학, 좀 더 물리적으로 말하면 현상론적인(철학에서 말하는 현상론이 아니라)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방 후 이땅의 철학자들이 범한 오류의 대표적인 것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지나치게 고문서들의 책갈피 속으로 던져 버렸다는 데 있을 거라는 것. 그 말은 지당하신 말씀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구의 현대 사상가들 중 그 누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철학을 논한 적이 있던가. 우리가 보기에 형이상학적일뿐이라고 욕해도 그들이 하는 말마다 세상에 대해 얼마나 고민했는가가 느껴지니까 말이다. 그게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역할이지 않을까. 세상의 껍질을 가차 없이 벗겨내서 보여 주는 것. 사실, 해답이란 없다. 그 현상이라는 게 어디 좀 복잡한가. 그 껍질를 샅샅이 벗겨 낸다는 게 어디 가당하기는 하단 말인가. 하지만 적어도 그 껍질을 벗겨 내려는 시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우리가 실험 사실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행위와 비슷한 것이다. 찌질한 논문 몇편일지라도 그 논문에 적어도 이 땅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지평을 제공해준다면 설령 그 논문들이 찌질하고 별 인용을 못 받는다고 해도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철학이 더러워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한표를 던진다. 사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땅의 논리가 가당치 않게만 느껴지는 이때,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게 촌스럽게 말하자면 시의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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