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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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사상가이다.  이사야 벌린이 쓴 자유론이라는 책을 오래 전에 사서 읽으려다가 책 두께에 눌려 미뤄둔 적이 있다.  하지만 이사야 벌린의 사상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많은지라 이사야 벌린이 쓴 책을 한권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이사야 벌린이 쓴 책 중, 가장 얇아 보이는 책이 바로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이다.  책 제목이 동화책 같아서 그 내용도 만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 제목은 원래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쿠스 (Archilochus)가 한 말,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서 왔다.  이 책에서 벌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러시아의 대 작가, 톨스토이를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책이다. 

 

일단 이 책을 좀 제대로 이해하려면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지식이 좀 있어야 한다.  결국 이 <전쟁과 평화>라는 두꺼운 책 (이 책은 러시아 원전 만 가지고 있다)을 사서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새로운 분야를 배울 때 늘 그렇지만 새로운 연구을 해 놓은 논문을 읽기 시작할 때 참고문헌을 찾아서 찾아서 가다 보면 어느새 수십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의 연구를 뒤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독서라는 것도 그렇다.  이사야 벌린이 쓴 이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을 읽다 보면 톨스토이가 쓴 책들을 조금은 비판적 관점에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결국에는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루소, 스땅달, 메스트르 같은 그 이전 작가들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눈길을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사야 벌린은 철학자, 작가를 고슴도치형과 여우형, 이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극명한 예가 아마 단테와 세익스피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고슴도치형은 사상가에 들고 여우형은 다재다능한 천재적인 작가에 든다.  이 두 가지 유형 중, 어느 것이 더 낫느냐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감상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이 이분법적인 카테고리화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분석한다.  이사야 벌린은 러시아의 톨스토이를 여우형의 작가였지만 스스로를 고슴도치형이라고 생각한 게 작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를 미시적으로 살피는 데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미시적이었기 때문에 전체를 살피는 데 실패한 비극적인 작가로 톨스토이를 평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벌린이 한 이 분석은 톨스토이를 비판하는 것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우형으로서 톨스토이가 지닌 천재성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여러 증거를 들어 톨스토이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같은 학문을 대단히 경멸하였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역사나 사회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였다.  이 부분은 19세기 당시 역사학이나 사회학에 관한 연구가 19세기 과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아 결정론적인 사고 체계 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 대해 톨스토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5장에서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 정치가이자 작가인 조제프 마리 드 메스트르와 톨스토이를 대위법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 메스트르라는 작가는 오늘날 꼴통보수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와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다.  톨스토이는 사고 체계가 메스트르와 유사했지만 그가 추구하는 해답은 완전히 달랐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역시 그 역사철학에 있었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를 역사를 지나치게 미소단위로 보는 바람에 스스로 불행해진 천재로 결론 짓고 있다.  이 결론은 이사야 벌린이 20세기 자유주의에 가장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톨스토이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반하는 사상을 지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분간 이 자유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요즘 읽고 있는 상탈 무페의 <민주주의로의 귀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상타 무페의 주장대로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에는 해답이 없다는 점도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여러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좀 정리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반대한다는 사상 속에서도 배울 점은 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사족: 중간중간 번역이랑 편집이 좀 어설픈 부분이 있는데 재판에서 좀 수정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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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원자 -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
데이비드 린들리 지음, 이덕환 옮김 / 승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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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나 수학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가끔씩 시대보다 조금 앞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하고 좌절 속에 스러져간 인물들이 있다. 몇 명 들자면 수학자 갈로와나 아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갈로와나 아벨의 경우, 당대 최고의 수학자 꼬시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데이비드 란들리가 지은 볼츠만의 원자라는 책은 볼츠만의 생애와 더불어 볼츠만이 원자론에 기초해서 통계적인 개념을 어떻게 열물리학과 기체 운동학에 도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불츠만 당시의 물리학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등학교 화학 시간이나 물리 시간에 원자라는 개념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이다. 이 책에서는 원자론의 기원으로 데모크리토스, 그의 스승 레우키포스, 로마 시대의 작가 루크레티우스를 든다. 원자라는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 Atom에서 왔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원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에서 또한 화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19세기말,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고 지키려고 애쓰다 탈진해 끝내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인생을 끝마친 물리학자, 볼츠만을 살벼보아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란들리가 쓴 볼츠만의 원자는 해박하게 문헌 을 조사해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뜨거운 논쟁들로 달구어졌던 물리학의 세계를 조명한다. 특히, 기체운동학을 설명하는 데 볼츠만이 남긴 업적과 그 업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 사람이 남긴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저자는 잘 알고 있다. 또한 당시 시대 상황이 그 사람을 어떻게 끌고 갔는지 이 책에서 잘 보여준다. 오스트리아의 빈 (비엔나), 거기서 사는 사람들(Wiener)의 특징인 우유부단함과 낭만성...... 그 시대의 빈에서 교육을 받은 볼츠만도 그런 사실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볼츠만의 번뜩이는 천재성, 그러나 그 아이 같은 순진함. 10살 연하의 연인과 결혼. 자기가 이루어 낸 업적을 인정 받기 위해 애처러울 정도로 애쓰는 모습, 훗날 벌어지는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와 볼츠만 사이의 논쟁. 이 논쟁 때문에 볼츠만은 물리학보다는 철학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증거로 나이 들어 빈 대학교의 교수로 다시 돌아왔을 때 볼츠만은 철학과 교수로 왔다.
결국 볼츠만은 62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아드리안 바다에 있는 트리에스테 근처 두이노라는 휴양지에서 가족들과 휴가 갔다가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만다. 비록 마흐와 그를 따르는 에너지론자들의 비판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의 업적에 맞게 대접 받으며 살았지만 그 비판을 용납하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신경쇠약과 우울증 때문에 중년 이후 내내 힘들어 했다. 그렇게 자살로 1906년에 자신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적의 해라 일컫는 1905년, 아인스타인의 논문으로 볼츠만이 옳았다는 것을 거의 완벽하게 인정 받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레일리경(Lord Rayleigh)의 말을 빌어 "...어쩌면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젊은 과학자는 위대한 업적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쉽게 그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연구를 한 다음 과학계가 그 자신에 대해 호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되 것"이라고 말한다. 비극 같지만 오늘날에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또한 철학과 물리학 사이의 관계가 모호해질 때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그릇되어 갈 수 있는가 고민하여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아름다운 사상이라 해도 자연을 기술하지 못하면 그 사상은 물리학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못 쓰는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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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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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라 알라딘에서 책을 자뜩 주문 해 놓고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해리 포터 7편 3,4권이랑 촘스키의 글 모음 <사상의 향연>과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를 샀다.  이 <88만원 세대>라는 책 제목이 여러 신문문들에서 인용되길래 어떤 내용인가, 무척 궁금한 터였다. 

저녁 먹고 나서 소파에 앉아 쉬지 않고 읽었더니 눈이 다 뻑뻑해졌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세상을 살피는 일에 참 무지했다는 사실을 느낀 탓이고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의 제목에서 보여 주듯이 이 땅의 경제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분석해 놓아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분석 방법이나 관점에 있어 동의하지 못 한다는 이견도 많겠지만 이 책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과 문제점이 그냥 스쳐지나가듯 받아 드리기엔 정말 마음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문에 써놓은 글이란 대개 지면상의 제약과 그 신문들이 지향하고 있는 성격 상, 책의 내용을 잘못 인용하기 십상인 듯 하다.  이 <88만원 세대>라는 책 제목도 그렇다.  대개 신문에서 이 책 제목을 인용할 땐 현재 청년 실업자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대표하는 정도에서 머문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경제학 관련 서적이라야 슈마허가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정도만 아는 터라 이 책이 담고 있는 전문적인 내용을 일일이 살펴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몇 가지 가슴에 와 닿은 내용이 있다.  

경제학과 물리학에서 그 둘 사이의 가잠 닮은 점은 평형 (equilibrium)의 중요성인 것 같다.  그 평형점은 대개 안정성 또는 불안전성과 관계가 있다.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변분 원리의 기본이 되는 내용 또한 이 평형과 관련이 있다.  자연을 기술하는 고전적인 모든 방정식은 작용소를 최소화한다 라고 불리는 이 해밀톤 원리는 자연, 또는 우주가 가장 경제적으로 작동한다는 말과 같다.  지구가 지금과 같이 태양의 둘레를 도는 이유는 그게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말은 자연이 가장 정직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자연은 절대로 그 룰을 어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반면에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사회는 이기주의와 탐욕과 잘못된 결정, 즉 평형점에서 대단히 먼 결정들 때문에 screw up 되기 십상이다. 

이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그 평형점에서 얼마나 먼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현재 10대와 20대들이 겪고 있는 그 노동 착취의 현장, 그 불균형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그 불균형이 안고 있는 그 폭발력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한 세대가 그 다음 세대를 어떻게 착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현장 보고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대한민국의 경제적 모순점 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독과점의 횡포가 어떻게 후속 세대의 경제적 자립을 훼손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한번씩 신문들에서 중소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취재하고 기사화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놓여있는 그 착취 구조일 것이다.  그 착취 구조는 단지 두 회사의 관계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세대와 세대간 대결이라는 더 큰 시대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한다.  20대가 자영업을 시작하기에 지금, 특히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얼마나 더 힘들어져 졌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노무현 정권을 대표하는 단어, 그 혁신 (Innovation)이라는 단어가 실제 문제에 적용될 때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표현으로 재해석된다.  이 선택과 집중이 듣기에는 경쟁력을 강화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그 선택과 집중의 결정자는 정부이기 때문에 그 혁신이라는 단어에 맞춰지기 위해서 독재시대 때 보다 더한 획일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은 올바른 분석이다.  비슷한 부작용이 대학을 향한 구조조정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현 20대와 구분되는 앞선 세대를 유신 세대와 386세대로 나눈다.  그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경제학적으로 논의하기는 하지만 이 책의 큰 흐름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비록 정치적인 분류에 들겠지만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를 유신세대, 30대 말에서 40대 후반까지를 386세대로 분류한다.  이 두 세대를 다른 선진국의 68세대들과 비교한다.  그 비교는 나름대로 공부가 된다.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게 날카롭게 카테고리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잠시 접어둔다 해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특히, 68혁명을 극심하게 겪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예는 그 68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의 단카이 세대.  그리고 한국의 유신 세대와 386세대.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세대가 이 386세대로 보인다.  프랑스의 68혁명을 주도했던 젊은이들 중에는 중고생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그 68혁명의 중심 사상에는 모택동이나 마르크스의 책이 아니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라는 어려운 철학책이 있었다.  그 운동의 결과가 프랑스 대학들의 국립화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에 한국의 386세대의 가장 큰 쟁점은 독재 타도와 북한과의 관계 개선, 더 나아가 민족끼리의 통일이었다.  노동자 문제도 중요한 화두가 되긴 했지만 정작 그 문제의 본질은 더 큰 시대 담론에 묻혀 버렸다고 볼 수 있다.  

그 거대 담론에서 내려와 한 개인의 삶으로 돌아와 보면 더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한 단위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386 세대는 그 혁명의 단물은 다 빨아 먹었으면서 정작 그 후속 세대를 핍박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분석결과이기도 하다.  저자도 조금 우려하는 바이지만 이 부분은 조금 성급한 일반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386 세대의 사악함이 아니라 20대가 놓여있는 그 불안한 위치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기존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2부에서는 그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현제 이 땅을 횡행하고 있는 승자 독식 구조, 개미지옥의 현실, 10대 20대 알바들의 비참한 현실, 그 현실의 내면에 깔려 있는 그 독과점화의 문제들, 프랜차이징의 문제점들......  2부에서 그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만 그 해답대로 문제가 풀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리 희망적이지 못 하다.  하지만 두 가지 근본 해결 방안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창조적 파괴와 협력 게임.  이 두 해답은 급격하게 평형점을 찾아갈 것이냐, 아님, 서서히 그 평형점에 접근할 것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현재의 경제 형태로는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 노무현 정권이 바탕을 두고 있는 사상은 마르크스를 어설프게 이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노동과 자본에 대한 분명한 분석과 자본주의에 폐악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학문이기는 하지만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그 유물론 사상, 그 뒤에 있는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좌파라고 부르짖는 것과는 달리 신자유주의와 경쟁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쟁은 있어야 하지만 경쟁이라는 것에 필여적으로 함께 따라야 하는 것이 공정함이다.  이것이 존 롤즈가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공정함이라고 이야기했던 것과 통한다.  지금 20대가 그 공정함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신세대와 386세대는 반성하여야 한다.  가장 진보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 386세대들이 자식들의 교육에 목을 메는 이유는 이 땅이 얼마나 학벌과 승자독식의 구조에 찌들려 있는지 알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10대를 인질 삼아 20대를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삼성의 비자금 문제.  검찰에서 삼성을 수사하려 들 때마다 늘 터져 나오는 말이 우리나라의 경제 문제이다.  삼성이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니까 그 걱정을 무시하기엔 염려되는 면도 있지만 사회 정의 - 전두환 정권이 썼던 말이라 어감은 안 좋지만 -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삼성의 행태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잃는 게 훨씬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에서도 잠깐 나오는 말이지만 세계적인 기업이 아이들에게 모유를 무료로 제공해 주길 원했던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사살당한 그 뒤에는 네슬레라는 회사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한다.  이 네슬레라는 회사, 독일 히틀러 정권에 빌붙었던 회사라는 사실은 독일에 있을 때부터 들어 알고 있다.  삼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투명함이다.  비자금이라는 단어, 영어로는 slush fund라고 부른다.  누구에게 뇌물로 주기 위해 조성된 돈이라는 뜻이다.  뇌물로 준다는 이유는 경쟁에 있어서 공정함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삼성은 그 주주들에게나 그 상품을 사는 소비자들에게 이미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이라는 한 회사가 많은 영역에서 독과점화하는 것은 이 땅의 경제를 위해서도 안 좋은 일이다.  미국이 가장 자본주의화된 나라라지만 그래도 그 나라에는 그 독과점 방지법이라는 게 서슬퍼렇게 살아있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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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의 삶과 과학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 1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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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Physikos) 역사의 기점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아야 할지 아니면 갈릴레오나 뉴톤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지만 물리학이 가장 발전한 시대는 아마 20세기일 것이다. 신화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자연을 보는 눈은 여전히 신화에 머물러 있었고 그 뛰어났다던 프톨레마이우스는 자연을 보는 데 종교를 극복하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우스가 쓴 알마게스트(Almagest)는 그 당시 과학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천체에 관한 내용을 잘 설명한 책이지만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쳤다. 그 현상 너머 깊이 담겨있는 원리를 파악하진 못했다. 알마게스트가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체 궤도의 혁명(Da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현상을 설명하는 데 능가했지만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 물리학은 단순히 자연의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속에 담겨 있는 원리-물리학자들이 제일 원리(first principle)이라고 부르는 원리-를 파헤쳐 이해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살았던 물리학자 중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물리학자들이 그랬다. 아인스타인, 하이젠베르크, 디락, 란다우, 페르미, 파울리, 슈뢰딩거, 보른, 파인만, 토모나가, 슈윙거. 이 들 중에서 미시적인 세게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데 주도적인 역활을 한 물리학자들이 바로 파인만, 토모나가, 슈윙거다. 이 세 물리학자는 양자전기역학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세 사람 모두 독립적으로 연구했던 사람이다. 토모나가는 전후의 이본의 상황 속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연구하였던 사람이고 슈윙거는 20세 전에 이미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끝냈다고 한다. 파인만은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가 천재이기도 했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도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면을 지니고 있었다.

존 그리빈과 메리 그리빈이 쓴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는 책은 파인만의 삶과 과학을 그린 책이다.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쓴 책이 아니라 파인만을 무척 존경하고 있던 영국의 물리학자 존 그리빈 본인이 여러 책과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시중에 파인만에 관한 책이 이미 여러 권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책들을 이미 섭렵한 사람이면 조금 단조롭게 느낄 수도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대중을 상대로 파인만이 이루어 놓은 물리에 관한 설명도 곁들여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책과 비교해서 좀 더 명료하게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파인만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가 늘 주창한 과학에 있어서의 정직성과 독창성, 이 둘은 파인만이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시 여겼던 점이다. 파인만이 대학원생일 때 그 당시 기라성 같은 물리학자 베테나 보어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들었던 것은 그가 얼마나 권위를 하찮은 것으로 여겼던가 알 수 있다. 그 사실은 나중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파인만에게 수여하고자 했던 명예박사 학위를 거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받은 노벨상조차도 행여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받지 않으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개의 천재 물리학자와는 달리 그는 60세까지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하나 같이 노벨상급의 연구였다. 이론입자물리학에서부터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나노과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분야를 연 개척자였다. 그의 삶 속에도 이러한 개척자 정신은 고스란이 녹아 있다.

과학을 하지 않는 사람도 그에 관한 책, 몇 권은 읽어보길 권한다.
특히 그가 얘기해준 내용을 파인만의 어린 친구 랠프 레이턴이 정리한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요!>는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또한 그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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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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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아 몇 주 전에 사두었던 책,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1931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쿄토 이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에서 자리스키 밑에서 수학으로 박사를 받은 뒤 1963년에 수학 연보(Annals of Mathematics)에 출판한 <표수 0인 체상의 대수적 다양체 특이점의 해소>라는 논문으로 1970년에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드 메달을 받는다.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는 오래 전에 인하대 양재현 교수가 준 대학 논문집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스스로 평범하다고 말하는 어느 수학자가 피나는 노력으로 수학의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용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고 부분 부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자극을 주는 내용이다. 자신이 수학자로 성공하게 된 외적, 내적 요인에 대해 잘 정리해서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7년 전 처음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믿었던 건 대개 사람의 능력이라는 게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연습이 대가를 만든다는 독일 격언처럼 누구든 열심히 하면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선생이 아무리 도와 주려고 해도 학생이 게으르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학생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능력이라는 것도 머리가 좋고 나쁨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수행해 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이 책에서 자신은 지극히 평범하였다지만 그 지치줄 모르는 근성이야말로 능력인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아무리 충고하고 가르치고 때로는 혼을 내어도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그 게으름을 깨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공부를 하겠다"라는 굳은 결심, "공부가 내게 주는 유익이 무한정 많다"라는 생각, "공부야말로 나의 CPU를 극대화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깨달음은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공부를 할 때 지치지 않고 밀어부칠 수 있는 근성은 바로 그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단순히 상이나 직장이나 그런 게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내게 주는 유익이 크다는 것을 알 때 그 부단한 노력이 가능하다.
 

"문제와 함께 자라" 이 책에서 말하는 가장 멋진 말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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