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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사상가이다. 이사야 벌린이 쓴 자유론이라는 책을 오래 전에 사서 읽으려다가 책 두께에 눌려 미뤄둔 적이 있다. 하지만 이사야 벌린의 사상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많은지라 이사야 벌린이 쓴 책을 한권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이사야 벌린이 쓴 책 중, 가장 얇아 보이는 책이 바로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이다. 책 제목이 동화책 같아서 그 내용도 만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 제목은 원래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쿠스 (Archilochus)가 한 말,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서 왔다. 이 책에서 벌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러시아의 대 작가, 톨스토이를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책이다.
일단 이 책을 좀 제대로 이해하려면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지식이 좀 있어야 한다. 결국 이 <전쟁과 평화>라는 두꺼운 책 (이 책은 러시아 원전 만 가지고 있다)을 사서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새로운 분야를 배울 때 늘 그렇지만 새로운 연구을 해 놓은 논문을 읽기 시작할 때 참고문헌을 찾아서 찾아서 가다 보면 어느새 수십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의 연구를 뒤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독서라는 것도 그렇다. 이사야 벌린이 쓴 이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을 읽다 보면 톨스토이가 쓴 책들을 조금은 비판적 관점에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결국에는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루소, 스땅달, 메스트르 같은 그 이전 작가들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눈길을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사야 벌린은 철학자, 작가를 고슴도치형과 여우형, 이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극명한 예가 아마 단테와 세익스피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고슴도치형은 사상가에 들고 여우형은 다재다능한 천재적인 작가에 든다. 이 두 가지 유형 중, 어느 것이 더 낫느냐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감상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이 이분법적인 카테고리화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분석한다. 이사야 벌린은 러시아의 톨스토이를 여우형의 작가였지만 스스로를 고슴도치형이라고 생각한 게 작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를 미시적으로 살피는 데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미시적이었기 때문에 전체를 살피는 데 실패한 비극적인 작가로 톨스토이를 평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벌린이 한 이 분석은 톨스토이를 비판하는 것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우형으로서 톨스토이가 지닌 천재성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여러 증거를 들어 톨스토이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같은 학문을 대단히 경멸하였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역사나 사회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였다. 이 부분은 19세기 당시 역사학이나 사회학에 관한 연구가 19세기 과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아 결정론적인 사고 체계 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 대해 톨스토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5장에서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 정치가이자 작가인 조제프 마리 드 메스트르와 톨스토이를 대위법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 메스트르라는 작가는 오늘날 꼴통보수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와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다. 톨스토이는 사고 체계가 메스트르와 유사했지만 그가 추구하는 해답은 완전히 달랐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역시 그 역사철학에 있었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를 역사를 지나치게 미소단위로 보는 바람에 스스로 불행해진 천재로 결론 짓고 있다. 이 결론은 이사야 벌린이 20세기 자유주의에 가장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톨스토이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반하는 사상을 지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분간 이 자유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요즘 읽고 있는 상탈 무페의 <민주주의로의 귀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상타 무페의 주장대로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에는 해답이 없다는 점도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여러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좀 정리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반대한다는 사상 속에서도 배울 점은 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사족: 중간중간 번역이랑 편집이 좀 어설픈 부분이 있는데 재판에서 좀 수정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