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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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 편의 중편소설이 하나로 묶여 연작소설이 탄생했다. 각각의 소설은 서로 다른 화자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 중심엔 '영혜'라는 인물이 있다.

첫편인 [채식주의자]에는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경유를 밝힌다. 어느날 영혜는 남편의 성화로 허둥대다 손가락을 베이고 틈새로 방울지는 비릿한 피의 맛이 그녀를 기묘한 꿈으로 이끈다.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기억이 되살아 나고 아버지에 의해 잔인하게 죽은 개의 기억이 겹쳐진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온갖 추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듯 학대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의 밑바닥에 꽁꽁 숨겨 두었던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잠재된 저항감이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표출된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기로 한다. 잔혹한 폭력의 결과물로 인식되어버린 고기덩어리를 그녀는 더이상 자신의 몸안에 받아 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육식을 거부한 채식주의자라는 테두리안에 그녀를 가둬 버린다. 구체적인 범주안에 갇힌 이는 그 자체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또 다시 집단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계속해서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고기를 그녀의 입에 강제로 쑤셔 넣고 순식간에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영혜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버림으로써 폭력에 대한 저항감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드러 낸다.

두번째 편인 [몽고반점]에서 영혜를 향한 시선은 형부인 인혜의 남편에게로 옮겨간다. 어느날 그는 인혜로부터 영혜의 몸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영감에 사로 잡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몽고반점을 향한 열망은 그의 불순한 욕망과 묘하게 겹친다. 결국 그는 영혜와의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의도적인 예술 작품을 완성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것은 비윤리적인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단 한번의 예술적 탐닉으로 그동안 쌓아 온 예술가로서의 명성도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지위도 모두 잃는다.

마지막 편인 [불꽃 나무]에서 영혜는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나무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무가 자라려면 저절로 얻어지는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 나무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다른 존재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의 저항은 이제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혹은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멸을 통해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바램은 이상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물리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그녀의 정신은 점점 파괴되어 간다. 정신병원에 갇혀 죽어가는 영혜를 보며 혼자서 되뇌이는 인혜의 절규는 그래서 더 비참하다.

'하지만 뭐야.
그녀는 소리내어 말한다.
넌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의 목소기가 커진다.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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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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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내재된 본능에 속한다'고 일찌기 프로이트는 말했다고 한다. 그 욕망이 말 그대로 이유도 목적도 없는 단순한 본능에 의해 발현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느끼는 고독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인간 내부에 자라기 시작한 고독은 결국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파괴의 욕망을 표출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결점에는 죽음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삶에 대한 절망과 고독을 떨쳐 버리기 위해 사탕을 빨기도 하고 예술 행위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내부의 빈공간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다. 죽음은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것이다. 그들이 고독해지기 전, 그들이 존재하기 전의 상태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고독감에 헤매고 있다 한들 한번뿐인 죽음의 순간마저 철저하게 고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조력자를 찾아간다. 죽음의 방식을 의논하고 자기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곧 소멸된 인생에 무슨 미련이 남았단 말인가. 결국 인간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 있을만큼 절대적인 고독은 감내하지 못하는 연약한 몸뚱아리인가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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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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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행위'는 머리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몹시 부끄럽다. 지금까지의 독서는 지적인 허세를 채우기 위한 수단에 마지 않았다. 내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끼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그 가능성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이 없다는 게 당황스럽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책에서 읽는 행위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읽는 행위란 그의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어떤 책을 읽는가가 어떤 책을 쓸 것인가에 대한 최초의 목적을 설정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는 평생에 걸쳐 지독히도 독서에 몰두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어떤 책을 읽어 왔다고 설명하거나 어떤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지 않는다. 저자가 여기서 언급하는 책은 불과 십여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책들은 그의 저작 활동이나 그의 개인적인 인생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들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한다.


저자의 독서 활동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각 작가의 작품들을 얼마나 방대하게 읽어 왔는가와 자신이 읽는 것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사색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승의 조언에 따라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골라서 그의 작품을 집중해서 읽었으며 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물도 다양하게 읽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읽는다'고 말하는 행위는 문장을 읽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장을 사색하고 작가의 일생과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까지 아우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서 행위는 어떤 작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영감을 제공한다. 게다가 외국 작품의 경우는 작가의 의도와 문장의 의미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원서로 읽기 위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감히 그에게 견주어 말하자면 읽는 행위에 집착한 나의 독서 방법은 다독을 위한 몸부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독서의 본질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유아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까지 생각이 미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그의 책, [읽는 인간]을 만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서란 어떤 행위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은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여기서 언급한 책들이 자신의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기꺼이 그의 책을 나의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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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활의 즐거움
필립 길버트 해머튼 지음, 김욱 옮김 / 리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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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책의 제목에 쓰여진 '지적 생활'이라는 단어는 지은이인 필립 길버트 해머튼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라고 한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 평론가이자 작가였으며 평생 지적인 생활을 위해 애쓴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서문에서 직접 밝힌 것처럼 지적인 생활이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적 생활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적 생활이라는 우아한 단어의 느낌이 비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울 만큼 쉽게 읽힌다. 게다가 지은이가 살았던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결코 진부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지적인 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대라도 적용 가능한 조언들이 담겨 있으며 꼭 지적 생활이라는 단어로 한정짓지 않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지침이 될만한 가치를 설명해 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각 장의 글이 지은이가 정한 주제에 따라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가장 첫 장은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라는 소제목으로 시작한다. 지은이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그 대상을 일반화하되 구체적으로 한정지어서 글을 전개하고 있는 만큼 그들에게 제공하는 조언은 구체적이며 좀 더 이해가 쉽도록 하기 위해 실존 인물을 예로 들기도 한다.


지은이는 '지적 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삶의 진리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여정'이라고 얘기했는데 '순수하게 삶의 진리를 찾아나선다'는 문장 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목적을 의미하는게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지적 생활이란 삶의 원초적인 목적을 잊지 않으려는 우리 모두의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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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퀘스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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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쳐]을 읽게 되었을때 나는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인지도 몰랐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어른이 되고나서는 소설책을 읽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한권 한권이 결코 적은 양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개가 어찌나 숨가쁘고 드라마틱한지 한번 시작하고나면 좀처럼 책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빅 픽쳐] 다음으로 읽은 책은 아마도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템테이션]과 [파이브 데이즈]였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은 어마어마한 성공가도를 달리다 갑작스럽게 추락한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거나 멈추는 법이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자기 인생의 본질을 다시금 깨달아 가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 안에는 언제나 부부의 갈등이 등장하며 그것은 주인공의 추락과 재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물론 내가 읽어 본 소설의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자전적 에세이라 불리는 이 책, [빅 퀘스쳔]을 보면 그가 그토록 부부의 갈등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고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그릴 수 있는 원천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불안하고 엄격했던 성장기와 그다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첫번째 결혼 생활,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아들의 장애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소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대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그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을까. 현재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삶의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된 것이다. 어느새 나는 인생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굳이 남들처럼 비유하자면 산 정상에 올라서 이제 막 하산을 하려는 채비를 하고 있는 때라고나 할까. 올라 올때는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도 같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산꼭대기까지 가야한다는 목표가 분명했고 산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줄 재미난 것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산꼭대기에 오르고 보니 중간에 그만 둔 이들도 있고 될때로 되라며 굴러가는 속도에 몸을 맡긴 이들도 있다. 내려가는 방법이 참으로 천차만별이어서 이제서야 비로소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왕이면 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라올때야 넘어져도 무릎만 깨지고 말겠지만 내려갈때 넘어지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수가 생긴다. 그리고 이왕이면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천히 내려 가고 싶다. 높은 곳에 있으면 산넘어까지 아울러 그 생김새를 두루두루 볼 수 있겠지만 낮은 곳으로 가면 갈수록 시야가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내려가는동안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아이들이 마음껏 산행을 즐기며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런 바램에서 저자가 던진 일곱가지 질문 중 마지막 장에 씌여진 중년의 균형에 관한 글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는데 그가 중년의 나이에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배우면서 스케이트 선생인 뤽이 해준 말은 산을 내려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내게도 좋은 지침이 되어줄 만한 것이다 싶다.

사는 동안 우리는 돌고 또 돌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머지않아 다시 어둠이 찾아오겠지만 그럴 때마다 퀘벡에서 내게 스케이트를 가르쳐주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얼음 위에 서 있게 해준 뤽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중략) 그것은 바로 '굳어지지 말 것, 무릎을 굽히고 균형을 잡을 것,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써 볼 것.'이다.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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