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갈 김원일 소설전집 9
김원일 지음 / 강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갈』 김원일 / 강

독을 품고 비극에 대항해 온 사람들

 

 

 

 ▒ 책을 읽고 나서.

 김원일 작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 『마당 깊은 집』도 읽지 않은 채, 나는 작가 소설 전집의 이 작품을 대뜸 구매했었다. 전집에 수록된 목록도 자그마치 28권이나 되는데, 언젠가 우연히 발견해서 홀린 듯이 책장에 넣어둔 책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눈에 들어와 펼쳐 들었다. 압도적인 현대사, 장엄한 비애, 책 뒤쪽에 나와 있는 짤막한 해설에 저절로 수긍이 가는 작품이었다. 한참이나 오래전에 활약하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현대사'와 삼대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만 듣고 현대 작가인 '천명관'의 『고래』를 떠올렸을까? 어찌 됐든 그 작품 또한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옛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작품을 읽은 후, 다시 한 번 한국의 오래된 작가들의 책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전갈』은 한 권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놓은 소설이다. 그 많은 이야깃거리를 어떻게 한 권으로 담아냈는지도 의문이었다. 한국사의 질곡을 아우르는 다양한 사건들이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조부의 삶에 걸쳐 등장하며, 이는 세 개의 소설 속 액자 속에 사르르 녹아든다. 조직 생활로 콩밥 먹고 나온 주인공 '강재필'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어 자신의 아버지 '강천동'의 기막힌 삶을 드러내고, 어쩐지 끈질기게 추적하고 싶어지는 조부 '강치무'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식이다. (작가는 감방에서 나온 이후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보전하는 것에 몰두한다) 실제로 마주하지도 못한, 아니 사진에서만 언뜻 보았던 조부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부터 기인한다. 한 여자를 강간하여 온 가족을 협박함으로써 신붓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주인공 '강재필'이 태어났다. 개를 야만적인 방법으로 훔치고 학대하여 팔아 자신의 사업으로 선택했고, 나중엔 불의의 사고로 손마저 잃게 되어 무력한 삶을 살게 된다. 폭력과 포악한 행동들로 살아간 아비의 인생을 보고 자란 주인공은, "네 아비 때문에 망친 인생인데 너까지 이러기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히려 더욱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왔고 어머니와 관계된 정신병 또한 안고 살아간다.

 ​'강재필'이 아비에 대해 하는 회상은 모조리 증오와 트라우마로 비열한 시선을 건네지만, 조부에게만큼은 왜인지 모를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내보인다. 마치, 아버지를 부정하고 또 다른 아버지를 찾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아비에게 돌리고, 조부의 기록으로 갱생의 희망을 품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 한 액자 속에, 주인공이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구성한 할아버지의 삶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두만강을 넘어 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수많은 기록을 통해 얻어낸 그의 인생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던 것을 '강재필'은 알게 된다. 조부는 독립군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초소에서 마루타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어떤 의도 없이 충동적으로 빨치산에 들어가기도 했고, 아비의 삶처럼 마지막에는 무기력하게 살았다. 삶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는 크나큰 권력과 폭력 앞에 조부 또한 멀쩡히 살아남진 못 했던 것이다. "사람 한평생이 부평초(개구리밥)"​과 같아 삶과 죽음이 여반장"이라는 책 속의 말은 천신만고와 같은 삼대의 삶을 대변해준다.

 '전갈'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소설은, 어떤 책보다 불편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폭력, 학대, 강간, 마루타 (인체실험), 조직 등의 소재들을 자세한 이야기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지만, 그런 불편함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역사의 우울 속에서 개인 또한 희생되고 말았던 비극, 그리고 삼대까지 이어져 왔던 슬픔과 운명……. 단단한 갑옷을 입고 독을 품고 있는 전갈처럼, 비극 앞에 나름대로 맞설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을 보고, 소설의 끝에는 어쩐지 코끝이 아릴 슬픔이 느껴졌다. 그 운명에 흔들렸던 주인공에게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기술함은 삶을 갱생할 수 있는 희망이었고 구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조부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지만, 아비의 삶을 회상하고 조부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보다도' 더욱 값진 빛나는 희망을 안게 되었을 것이라고 희망해본다.

엄마 무덤에 절하며, 불효자를 용서하란 말은 읊기 싫었다. 전과자로 전전해온 내 꼴을 안 보고 가신 게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몰랐다. 엄마 무덤에 참예를 마치고 나는 묏등에 박힌 잡초를 뽑았다. 가족이란 단어조차 내겐 그 연상 작용이 슬픔과 분노를 환기시키는 질료이지만, 엄마 무덤은 당신의 생전 모습과 닮아 볼썽사납게 초라했다. 엄마 무덤에 번듯한 묘비라도 세워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어디에 묘지 관리를 의뢰해야 할지 방책이 서지 않았다. (...) 나는 무덤 옆에 비켜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뿌리엉겅퀴 잔가지가 바닷바람에 떨고 있는 저 멀리로 둥그렇게 반원을 그린 동해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양광 아래 드넓은 바다는 잔잔했다. 잘게 부서져 반짝이는 너울들이 눈에 시었다. 갯뜰도, 형제섬도, 꽃바위도 눈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북쪽 해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49p)

시간에 매인 몸이 아닌데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울산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지체하게 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삼 년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오자 누추한 기억의 창고인 출생지를 찾은 탓에 기분이 하강 국면으로 떨어졌다는 이유를 댈 수 있다. 밀양 땅을 밟고 싶지 않다는 잠복된 거부반응이 지체하게 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내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미흡하다. 묵은 상처를 긁을 때 다시 촉발된 가려움증으로 상처의 화농을 박박 긁어도 성이 안 차는 그런 덧남이랄까. 내 마음이 울증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게 지상에서 벌써 사라진 아비와 엄마가 남기고 간, 머릿속에 송진처럼 붙은 기억이 가역반응을 일으킨 탓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이 오히려 어린 시절을 재생시켜 들쑤셨고, 서른다섯 해 생애와 뒤죽박죽 섞이더니 분열증을 일으켰다. 슬픔과 분노가 배출구를 찾을 수 없자 탈진 상태라 걷기조차 힘에 부쳤다. 빈곤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말대로, 빈곤과 공포 자체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나를 자실케 한 셈이다. (86p)

가리실은 하늘 아래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다들 말했어. 철 따라 꽃이 피고 지고, 호랑이, 곰 등 뭍짐승들이 살았고, 긴긴 동절기에는 집채만큼 눈이 쌓이면 옆집과는 굴을 뚫고 내왕했지. 외지 사람 보기는 이따금 들어오는 포수가 고작이었어. 하늘 가리는 잣나무, 봇나무 숲길을 뚫고 산 넘고 물 건너 회령 읍내까지가 사십 리라. 조선이 망했다는 말이 산골로 흘러들어왔을 때, 어른들조차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대. 밭농사 짓고 사냥해서 사는 무식쟁이 산골 사람들이라 그런 걸 안다고 형편이 달라지리라 생각을 못한 게지. 그러나 그런 바깥 사정이 첩첩한 산골까지 영향을 미쳐 천지개벽 시대를 맞게 되었지. 마을에 당꼬바지 입은 일본 병정이 말을 타고 나타난 게 그즈음이야. 일본 사람들이 그 산골까지 들어와선 조선인 인부를 부려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도를 깐 게라. 부근에 광산이 생기고, 회령 가는 철길이 깔리게 되니 낯선 타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 (299p)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무엇보다 용병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게, 주어진 운명을 뿌리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비 역시 발버둥쳤으나 주어진 운명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평탄한 길을 순조롭게 걷지 못했으니, 내리막 돌멩이길만 내 앞에 펼쳐졌을 뿐이었다. 저 아래쪽에서, 네가 오올 길은 이쪽밖에 더 있냐고 소리치는 아비의 환청이 기차 레일의 마찰음과 진동에 섞여 따라왔다. 뜬금없이 아비가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34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희미한 출구를 찾아가는 하루키의 여정

 

 

 

 ▒ 책을 읽고 나서. 

 

 생각만 해도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창피한 일이 있었던 날, 별것도 아닌데 눈물이 죽죽 흘러서 끅끅대며 울었던 날, 허공에 붕붕 떠 있는 듯 상실감을 느꼈던 날. 언젠가 그날의 축 처진 기분은 어떻게 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지나고 나면 괜찮겠지"하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로 그 기억들이 꿈처럼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물론 조각조각 깨어진 기억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무시무시하게 모나고 뾰족하지는 않게, 두루 뭉실하게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아직은 젊으니 (젊...젊은 거겠지.) 그런 일들이, 사건들이 젊을 때의 방황과 어리숙한 감정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답답함이 지금은 조금 흐려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하루키가 말한 '입구'와 '출구'의 경로를 시간을 통해 차츰차츰 다듬어 통과한 것일까. 나의 '입구'와 '출구'는 어떻게 이어져 있었을까.

 

 

 『1973년의 핀볼』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주인공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견뎌내고, 기가 막힐 정도로 평범하지만 독특한 일상을 헤매고 있었던 이야기다. 마치 과거를 절대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듯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 존재와 이름 따위가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쌍둥이 자매,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곳 '제이스 바',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게 하는 '나오코'의 존재까지. 어딘가 모호한 이야기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자리를 깊게 새겨놓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했고, 모든 일에도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했지만, 주인공은 오로지 핀볼에만 집착한 채 도돌이표 같은 일상을 걷고 있었다. 그는 황홀했던 '핀볼과의 짧은 밀월 기간'을 뒤로 한 채 출구이자 '끝'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잊지못할 따스한 추억을 방황하는 과거는 '나의 손으로' 잡아 둔채, 다시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

​당신 탓이 아니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했잖아.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왼쪽이 플리퍼, 탭 트랜스퍼, 9번 타깃. 아니라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지. 하지만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할 수 있었을 거야.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어. 아마 언제까지나 똑같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146p)

  그가 집착하고 있었던 핀볼은, 누군가에게는 또다른 물건으로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책, 전화기, 향기가 남은 옷, 사진, 앨범, 식물…… 그것들을 통해 무언가의 흔적을 찾는다. 일종의, 조용한 몸부림이며 추적이다. 그러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법이 단지 이것 뿐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 출구를 찾았던 것처럼, 언젠가는 멈추게 될 추적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실상 독특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현재와 미래로 넘어가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감정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어리숙한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적당히' 살아가는 어른 아이의 이야기일지 모르고, 하루키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방황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허무를 견딘 채 살아간다. 과거와 현재, 미래 어디선가 출구를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여담으로, 많은 사람이 느끼겠지만 『1973년의 핀볼』은 다른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작점과도 같은 작품이다. 다른 초기작들과 더불어……

 어딘가 뭉뚱그려진 이야기가, 걸러지지 않은 잔잔한 이야기의 색다른 느낌이 좋다.

 

당신이 핀볼 기계 앞으로 계속 고독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프루스트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자동차 전용 극장에서 여자 친구와 <진정한 용기>를 보면서 진한 애무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고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핀볼 기계는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재시합 불을 켤 뿐이다. 재시합, 재시합, 재시합......,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영겁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걸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추측할 수는 있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40p)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황급히 문을 열고 이봐,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하나 있었는데 깜빡 잊었어, 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 안에는 벌써 또 하나의 계절이 의자에 앉아서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잊어버린 말이 있다면 내가 들어줄게, 잘하면 전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한다. 아니, 괜찮아,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야, 하고 사람은 말한다. 바람 소리만이 주위를 뒤덮는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 (53p)

등대에 도착하면 쥐는 제방 끝에 앉아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는 붓으로 그은 것 같은 가느다란 구름이 몇줄기 흐르고, 사방은 온통 푸른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색은 끝없이 깊었고, 그 깊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년의 다리를 떨게 만들었다. 그것은 외경과도 비슷한 떨림이었다. 바다 내음도 바람의 색깔도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선명했다. 그는 시간을 들여 주위의 풍경에 조금씩 마음이 익숙해지게 하면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깊은 바다로 인해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그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얀 모래밭과 방파제, 푸른 소나무 숲이 짓눌린 것처럼 낮게 퍼져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검푸른 산들이 하늘을 향해서 우뚝 솟아 있었다. (71p)

어느 날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뭐든 좋다, 사소한 것이다. 장미 꽃송이, 잃어버린 모자, 어릴 때 마음에 들어하던 스웨터, 오래된 진 피트니의 레코드....... 이미 어디로도 갈 곳 없는 하찮은 것들이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 그 무엇인가는 우리의 마음을 방황하다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간다...... 암흑. 우리의 마음에는 우물이 여러 개 파여 있다. 그리고 그 우물 위를 새가 지나간다. (13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굿바이 동물원』 강태식 / 한겨레출판

  동물이 되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역설

 

 

 

  ▒ 책을 읽고 나서.

 

 여기는 동물의 왕국. 있는 놈들이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범접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들 밑에서 일하며 갑질을 참아낸다.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것은 밥도, 영역도 아닌 오로지 돈이다. 돈에 관한 한 본능보다 철저한 이성을 드러내는 이 왕국의 현실은 아프리카 초원보다 치열하다. 있는 놈들은 나가는 돈이 아까워 '열정'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농락하고, 농락당하는 대상은 대개 그 정도의 돈마저 버릴 수가 없어 끊임없이 인내한다. 그러나 먹이사슬 바깥으로 밀려나기 직전인 누군가가 있다. 그들은 홀로 방 안에서 마늘을 까고, 봉투를 붙이고, 인형 눈깔을 붙인다. 본드 냄새를 맡고 날아다니는 우주와 파워맨과 싸우며 실실거리며 웃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슬 속에 존재하기 위하여, 혼자만의 사투를 벌인다.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잘린 주인공 '김영수'는 마늘을 까면서, "어쩌면 나는 마늘을 까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고작 마늘을 까기 위해서 십여 년간의 교육을 받고, 고작 마늘을 까기 위해서 4년제 대학에 들어가고, 고작 마늘을 까기 위해서 입사를 했던 것도 아닌데……. 아니, 아니 어쩌면 "나는 원래부터 마늘 까는 기계였던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다. 자그마치 '공무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고, 일하는 장소는 동물원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아줌마와 체력 경쟁을 벌여 2:1의 경쟁률을 뚫었다.

 

 

"당신이 사용할 장비예요."

카메라가 장비의 뒤통수를 클로즈업한다. 순간, 목이 뒤로 꺾인다. 얼굴이 드러난다. 이마가 아래쪽이고 턱이 위쪽이다. 얼굴은 뒤집혀 있다. 그 얼굴이 화면을 꽉 채운다. 쿠쿵, 대포 소리 같은 효과음, 노약자나 임산부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는 장면이다. 털은 없다. 하지만 검게 번들거리는 피부가 무시무시해 보인다. 바로 고릴라의 얼굴이다.

"진짜 같죠?"

검게 변한 화면과 그 위에 뜨는 여자 사육사의 대사.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입어요. 오늘부터 당신은 고릴라예요!" (94p)  

 

 마늘을 까고 인형 눈깔을 붙이는 대신, 상하의 온몸에 털이 북실한 고릴라 옷을 입는다. 그리고 세렝게티 동물원에 출근한다. 철창 안에서 관람객들이 던지는 바나나를 먹고, 가슴에 멍이 푸르게 들도록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린다. 12m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맨손으로 오르며 사람들의 호기심과 환호를 불러낸다. 빌딩 꼭대기엔 각기 다른 색의 버튼이 있다. 그것을 누르면 성과급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먼저 눌러야 한다. 게다가 동물원에는 고릴라만 있는 게 아니다. 피그미하마, 판다, 캥거루, 아프리카 코뿔소……. 그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한다. 지정된 행동을, 동물과 닮은 제스처를, 관람객을 불러 모을 하루의 미션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려나, 하고 그들이 묻는다. 그리고 또다시 '사람 구실' 하고 사는 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고릴라 우리 속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가 생존 경쟁에 밀려 그곳으로 들어왔다. 누구는 부업을 하다가 본드에 취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동물원에 왔고, 누구는 기계처럼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동물원에 왔고, 누구는 회사의 폭탄 처리반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다 되돌아온 화살에 맞아 동물원에 들어왔다.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려면 '사람다움'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세렝게티 동물원에선 '사람 구실'을 못해도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동료들과 싸구려 소주와 안주를 먹으면서 서로를 다독이며 하루를 마감하고, 낙오되는 사람을 위해 한 명씩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버튼을 눌렀다.

 동물이 돼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역설, 그야말로 '웃픈' 현실을 그리고 있는『굿바이 동물원』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절규다. 현실과 맞물린 소설의 끝이 해피엔딩이어도 절대 웃을 수 없는, 고릴라 탈을 쓰고 진짜 아프리카 초원으로 자유를 찾아 떠난 이를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그러고 보니 4월이었다. 정신없이 훈련만 하느라 4월이 됐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눈을 떴다. 체육공원 주변에도 여러 종의 화사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먹고 사는 건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왠지 모르게 휴우, 한숨이 나오는 한때였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한 때 나에게도 4월은 빛나는 꿈의 계절이었다. 눈물 어릴 만큼 슬펐고, 그래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송 과장의 노래를 듣는 동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련히 멀어져간 내 인생의 4월이……. (63p)

정말 조풍년 씨의 몸값이 몇십 억씩이나 할까? 내 몸값은? 앤과 만딩고는? 과연 진짜 마운틴고릴라보다 비쌀까? 모르겠다. 모르지만 비쌀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내 몸 어딘가에 분명히, 조풍년 씨와 만딩고, 앤의 몸 어딘가에도 반드시, 진짜 마운틴고릴라보다 비싼 정찰가가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 안 죽었다."

여자 친구 관람객의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와-아! 관람객들의 환호성도, 짝짝짝, 아낌없이 쏟아지는 박수 소리도 두 배쯤 볼륨을 높인 듯 커져 있었다. 휘잉,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는 고릴라 조풍년 씨가 검은 털을 날리며, "우후우후." 월드컵 최종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스트라이커처럼 멋지게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멋져, 굉장해. 관람객들도 탄성을 연발했다. 멋져요, 조풍년 씨. 나도 감탄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조풍년 씨에게 묻고 싶었다. 과장님,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요? (128p)

"자기야, 인생이라는 게 뭘까?"

그걸 아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했다. 설령 몇 명이 그걸 안다 해도 나는 그 몇 명 중에 들지 못했다. 나 역시 마늘을 까던 지난날, 숱하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할 때마다 한숨만 나오고 마음만 어두워졌더랬다.

"마늘을 까고 있으면 있잖아,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마늘을 까기 위해서 태어난 건 아닐까? 마늘을 까기 위해서 여태까지 살아왔고 앞으로의 사간도 마늘을 까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닐까? 어떨 땐 내가 마늘 까는 기계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자기도 마늘 깔 때 그랬어?"

나도 마늘 깔 때 그랬다. 나란 무엇일까? 나에게 마늘이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손에 밴 마늘 냄새처럼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정체성은 오래전에 유행이 지난 액세서리처럼 이리저리 방바닥을 굴러다니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곤 했더랬다. (162p)

사람이면 어떻고 고릴라면 어떤가. 사람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다. 고릴라가 불행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권? 존엄성?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게 없다. 다 옛말이다. 있는 놈과 없는 놈이 있을 뿐이다. 빈부의 차가 개인의 가치를 판가름하고 결정짓는다.

상대적 빈곤감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인본주의 대신 물본 주의가 물만난 고기처럼 판을 치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는데 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고, 그래서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고, 그래서 툭하면 약을 먹거나 밀폐된 자동차 안에서 연탄을 피우거나 건전하지 못한 목적으로 한강에 가고, 아무리 자본주의라지만 정부는 그런 국민을 나 몰라라 방치하고,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게 일한 만큼 버는 건데 이 나라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씨발, 욕부터 나오고, 있는 놈들은 있는 놈들끼리만 노는데, 결혼도 있는 놈들끼리만 하는데, 민주주의는 개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니 지랄, 전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고,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계속 몸부림 쳐야 하고, 쥐구멍에 해 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고, 내일의 태양 같은 건 절대 뜨지 않고, 그런 세상인데……. (28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 이숲에올빼미

이토록 절묘한 사랑의 단상

 

 

 

 

 

▒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는 '이별'이라는 단어에 움찔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낭만적인 표지에 감미로운 이야기를 상상할지도 모르죠. 표제작이자, 소설의 첫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편소설 이별여행은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여럿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한 기업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청년이 사장의 총애를 받아 그의 집에 개인 비서로 들어갑니다. 그가 오래전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으리으리한 집에 경멸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청년은 한 여자를 만납니다. 바로, 사장의 젊은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만 가지 묘한 매력들을 뿜어내고 있었죠. 선량함과 온화함, 차분함과 자애로움, 순결함과 모성애…​… 그의 눈에 완벽한 이 여자는 낯선 집에 마음을 붙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보이지 않는 야릇한 유대감 속에 사랑은 피어납니다. 이들의 사랑은 예상과 달리 조용하고 은은하게 흘러갑니다. 주인공이 뿜어내는 격렬한 사랑의 문장들을 빼고선 말이죠.

 

 

  놀랍도록 달콤한 문장들이 등장합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과정'의 황홀한 순간들을 아주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고 할까요. 주인공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설레는 감정을 의식적으로 -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 살짝살짝 밀어내는 조심스러운 행동부터,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찾아오는 복잡한 사랑의 감정과 그토록 열기로 가득했던 사랑이 식는 순간까지 짧은 소설에 그대로 담아냅니다.

 무심한 세월과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그들이 멀어졌다가 다시 또 우연히 만나 여행을 떠나기로 할 때, 주체할 수 없이 황홀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진부하다고만 생각했던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에 뼛속 깊이 실감하게 될 만큼요. 뜨거웠던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고 떠난 여행에 피치 못할 '이별'이라는 단어를 붙여야만 한다는 절망감,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다시 그 감정을 모으려 하지만 도저히 잡히지 않는 이상한 기분.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길 위에 서서 세상의 온갖 허무함을 맛보고 있지만, 소설 속에서만큼은 이들의 사랑이, 잡을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추억으로 존재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랑과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로맨스에 한정합니다) 두 번째 중편 『당연한 의심』도 어떻게 보면 참, 오묘하게도 사랑에 마주 선 우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옆집 가족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이 중심인 이 소설은 주인의 조건없는 사랑과 보살핌에 오만방자해진 반려견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존심 강하고 교만하며 응석받이로 자란" 옆집 남자의 개 '폰토'가 갑작스러운 아기의 탄생에 사랑을 뺏기고, 절망과 처절함에 잠식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격렬하면서도 오싹합니다.

 

 

 대상과 분위기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두 소설은 비슷한 흐름과 주제를 갖습니다. 설명하기 모호할 뿐인 사랑의 시작과 끝을 비교적 분명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시작의 설렘과 끝의 허무함, 황량함…​…. 중편 소설집 이별여행은 두 가지 색다른 '사랑의 모습'을 매끄럽게 표현해내면서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단숨에 롤러코스터처럼 지나치는 것 같은 격렬한 기분을 안겨줍니다. 또한, 화려하진 않지만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힌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이점이지요.

 

 

 

Written by. 리니

독일 소설/ 중편/ 사랑 이야기

소장중인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꿈에서조차 그를 온통 사로잡은 이 감정이 절대적인 열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를 뒤흔들어놓을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행위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 감정을 감탄, 경외심, 애착, 따위의 이름을 덧씌워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미친 듯 날뛰는 절체절명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비굴한 것이 이 인식을 억눌러 선명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3p, 이별여행)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될까? 그것은 사랑이 태아처럼 어두운 몸 안에서 고통스럽게 꿈틀대기를 멈추고, 숨결과 입술을 통해 감히 밖으로 나와 스스로 사랑이라고 이름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고치 속 번데기처럼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완강하게 숨어 있던 그녀에 대한 감정은 어느 순간 불현듯 껍질을 뚫고 까마득히 올라갔다가 다시 무서운 힘으로 철렁! 하고 가슴 밑바닥으로 떨어져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25p, 이별여행)

그 순간, 그는 뚜렷한 무엇인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수줍은 듯한 그림자 유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일러주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우물처럼 그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어떤 것을 기억의 두레박이 불안하고 위험하게 건드리기라도 한듯, 그것은 흔들흔들 요동치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는 모든 감각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여기 잠든 숲 속에서 이 그림자 유희가 그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어떤 말, 어떤 상황, 어떤 체험, 귀로 들었던 것, 마음으로 느꼈던 것, 그러나 하나의 멜로디에 둘러싸여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어떤 것,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가 건드리지 않았던 어떤 것이었다. (82p, 이별여행)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듯한 그 절박한 눈길을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동물의 눈길은 인간의 눈길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분명히 감정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인간은 대부분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만, 동물은 말을 할 수 없기에 모든 감정 표현을 동공에 몰아넣는다. 나는 그 당시 폰토의 눈동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처절한 모습이었다. (125p, 당연한 의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 열린책들

​당신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만약 무인도에 한 권의 책만 들고 가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너무나 식상한 질문인가? 그래도 한번 대답해보라. 책장에 책 한 권만 있는 사람은 없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좋아하는 책을 한 권만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같은 질문이 온다면, 아마 며칠이 걸려 고민할 것이다. 어떤 책을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을지, 다시 읽어도 새로운 문장이 보이고,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책들, 혹은 무게에 제한이 없다면 좋아하는 책 중 가장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지 않을까. '책'이라는 것이 너무나 흔한 세상에서, 하루에도 몇 권씩 매력적인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책들에 시한부를 선고하는 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누군가가 같은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유독 예상치 못하게 풀어내는 작가, 노통브가 전하는 '책' 이야기는 어떨까. 그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독특하다고 하기에는 아쉽고 굳이 표현하자면 괴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불쏘시개』도 역시 별나긴 하지만 그녀의 책 중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교적 친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책이다. 장르는 희곡, 역시나 중편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얇다. 그러나 노통브는 정말로 매력적인 소재를 들고 왔다. 이야기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추위와 전쟁 속에서 불쏘시개로 삼을 만한 것이 책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먼저 불태울 것인가?"라는 것이다.

 

  조금은 극적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일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사실상 책의 가치는 반쯤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상상할 수 있다. 도시는 전쟁으로 인해 포위당했고, 그나마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집은 꽁꽁 얼어 불쏘시개가 필요하고, 주인공 교수의 집에는 책장 가득 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를 책들이 그득하다. 교수와 조교, 그리고 조교의 애인은 추위를 감내하는 고통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 책장 속에서 조금은 덜 가치 있는 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따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책의 내용부터 표지, 결말, 문장...... 총탄이 날아드는 바깥의 상황은 잠시 외면한 채 그들은 책에 대한 담론을 펼친다. 생존을 앞에 두고 있는 심각하고 진지한 상황에서 문학과 어법에 대하여 떠드는 그들의 대화는 왠지 모르게 우스우면서도 슬픈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책 자체에 대한, 그리고 가치 있는 책들에 대한 조건 없는 작가의 사랑은 그들의 대담 속에서 특히나 두드러지고, 책의 의미에 대해서 고심할 여지를 주고 있다. "무인도에 가면 어떤 책을 - "이라는 아까의 식상한 질문에서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결국엔 가장 두께가 있는 책을 택했다. 『불쏘시개』도 마찬가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책의 가치는 떨어지고, "오직 두께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이다. (83p)"

  ​그러나 책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서, 좀 더 본질에서 따져보자. 노통브는 너무나 사랑하는 책을 그녀의 문학 속에서 왜 태웠을까? 왜 책에 불쏘시개라는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을까? 결국엔 '생존'이다. 『불쏘시개』 속에서 책은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그녀의 삶 속에서 책도 이만큼의 가치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이야기는 책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경고이고, 극적인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책의 의미에 관해서 하는 실험적 질문이다.

 

 

마리나 : (마침내 그를 바라보며, 아주 상냥하게) 선생님, 제가 굳이 어려운 작가의 작품을 골라서 이해하려고 읽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저는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신중하게 읽고 있어요. 그 문장 하나하나를 읽으며 혼자 물어보곤 합니다. <이 주제에, 이 동사에, 이 보어에, 이 부사에, 난로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불꽃으로 탈 만한 무엇이 있는가? 이 문장의 깊은 (또는 그렇게 상정된) 의미는 이 방에서 온도 1도를 올리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인가?> 보세요, 제가 선생님께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문장을 하나 읽어 드리지요. <침묵이 이처럼 수상쩍었던 것은 오래전이었다.> 저는 이 문장에 대해서 비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문장이 담고 있는 심오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의문이 드는군요. 이 수상쩍은 침묵이 어떤 점에서 1분 이상의 열기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 하고. (32p)

다니엘 : 하지만 선생님은 무슨 근거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우리는 지금 현실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예술적 가치가 없을 수도 있죠. 그러니 문학은 더더욱 예술적 가치가 있어야죠.

교수 : 그러니까 문학이 자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아닌가. 자네의 삶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어. 그런 이유로 문학은 자네에게 위안을 주는 거야.

다니엘 : 그래도 제 삶은 분명 선생님의 삶보다 더 하찮을 겁니다.

교수 :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다니엘, 자넨 장님이군. 첫 번째 만남에 대한 판단처럼 내 삶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이 말이야.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링 위에서 다시 만난다. 즉석 경연 대회가 권투 시합장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 그전에는 그 두사람이 결코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러다가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게 돼. 그들은 열여섯 살이고, 아름답다네. 그들은 권투하는 링 위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거야. 멋지지 않은가? (65p)

다니엘 : 독서가 더이상 무익하지 않도록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우리 몫이죠.

교수 : 독자를 교육시킨다! 독자를 교육시키듯 한다! 자넨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을 정도로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사람들은 삶에서도 그렇듯이 독서에서도 똑같아. 이기주의적인 데다가 쾌락에 빠져 들고 달라지기가 힘들지. 작가의 몫은 독자의 보잘것없음에 대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독자를 받아들이는 거지. 만일 그 작가가 독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렇다면, 낭만적인 바보는 바로 그 작가라네. 블라텍의 책을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네. (6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