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 이숲에올빼미

이토록 절묘한 사랑의 단상

 

 

 

 

 

▒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는 '이별'이라는 단어에 움찔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낭만적인 표지에 감미로운 이야기를 상상할지도 모르죠. 표제작이자, 소설의 첫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편소설 이별여행은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여럿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한 기업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청년이 사장의 총애를 받아 그의 집에 개인 비서로 들어갑니다. 그가 오래전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으리으리한 집에 경멸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청년은 한 여자를 만납니다. 바로, 사장의 젊은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만 가지 묘한 매력들을 뿜어내고 있었죠. 선량함과 온화함, 차분함과 자애로움, 순결함과 모성애…​… 그의 눈에 완벽한 이 여자는 낯선 집에 마음을 붙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보이지 않는 야릇한 유대감 속에 사랑은 피어납니다. 이들의 사랑은 예상과 달리 조용하고 은은하게 흘러갑니다. 주인공이 뿜어내는 격렬한 사랑의 문장들을 빼고선 말이죠.

 

 

  놀랍도록 달콤한 문장들이 등장합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과정'의 황홀한 순간들을 아주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고 할까요. 주인공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설레는 감정을 의식적으로 -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 살짝살짝 밀어내는 조심스러운 행동부터,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찾아오는 복잡한 사랑의 감정과 그토록 열기로 가득했던 사랑이 식는 순간까지 짧은 소설에 그대로 담아냅니다.

 무심한 세월과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그들이 멀어졌다가 다시 또 우연히 만나 여행을 떠나기로 할 때, 주체할 수 없이 황홀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진부하다고만 생각했던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에 뼛속 깊이 실감하게 될 만큼요. 뜨거웠던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고 떠난 여행에 피치 못할 '이별'이라는 단어를 붙여야만 한다는 절망감,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다시 그 감정을 모으려 하지만 도저히 잡히지 않는 이상한 기분.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길 위에 서서 세상의 온갖 허무함을 맛보고 있지만, 소설 속에서만큼은 이들의 사랑이, 잡을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추억으로 존재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랑과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로맨스에 한정합니다) 두 번째 중편 『당연한 의심』도 어떻게 보면 참, 오묘하게도 사랑에 마주 선 우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옆집 가족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이 중심인 이 소설은 주인의 조건없는 사랑과 보살핌에 오만방자해진 반려견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존심 강하고 교만하며 응석받이로 자란" 옆집 남자의 개 '폰토'가 갑작스러운 아기의 탄생에 사랑을 뺏기고, 절망과 처절함에 잠식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격렬하면서도 오싹합니다.

 

 

 대상과 분위기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두 소설은 비슷한 흐름과 주제를 갖습니다. 설명하기 모호할 뿐인 사랑의 시작과 끝을 비교적 분명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시작의 설렘과 끝의 허무함, 황량함…​…. 중편 소설집 이별여행은 두 가지 색다른 '사랑의 모습'을 매끄럽게 표현해내면서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단숨에 롤러코스터처럼 지나치는 것 같은 격렬한 기분을 안겨줍니다. 또한, 화려하진 않지만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힌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이점이지요.

 

 

 

Written by. 리니

독일 소설/ 중편/ 사랑 이야기

소장중인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꿈에서조차 그를 온통 사로잡은 이 감정이 절대적인 열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를 뒤흔들어놓을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행위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 감정을 감탄, 경외심, 애착, 따위의 이름을 덧씌워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미친 듯 날뛰는 절체절명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비굴한 것이 이 인식을 억눌러 선명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3p, 이별여행)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될까? 그것은 사랑이 태아처럼 어두운 몸 안에서 고통스럽게 꿈틀대기를 멈추고, 숨결과 입술을 통해 감히 밖으로 나와 스스로 사랑이라고 이름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고치 속 번데기처럼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완강하게 숨어 있던 그녀에 대한 감정은 어느 순간 불현듯 껍질을 뚫고 까마득히 올라갔다가 다시 무서운 힘으로 철렁! 하고 가슴 밑바닥으로 떨어져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25p, 이별여행)

그 순간, 그는 뚜렷한 무엇인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수줍은 듯한 그림자 유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일러주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우물처럼 그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어떤 것을 기억의 두레박이 불안하고 위험하게 건드리기라도 한듯, 그것은 흔들흔들 요동치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는 모든 감각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여기 잠든 숲 속에서 이 그림자 유희가 그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어떤 말, 어떤 상황, 어떤 체험, 귀로 들었던 것, 마음으로 느꼈던 것, 그러나 하나의 멜로디에 둘러싸여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어떤 것,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가 건드리지 않았던 어떤 것이었다. (82p, 이별여행)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듯한 그 절박한 눈길을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동물의 눈길은 인간의 눈길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분명히 감정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인간은 대부분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만, 동물은 말을 할 수 없기에 모든 감정 표현을 동공에 몰아넣는다. 나는 그 당시 폰토의 눈동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처절한 모습이었다. (125p, 당연한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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