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굿바이 동물원』 강태식 / 한겨레출판

  동물이 되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역설

 

 

 

  ▒ 책을 읽고 나서.

 

 여기는 동물의 왕국. 있는 놈들이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범접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들 밑에서 일하며 갑질을 참아낸다.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것은 밥도, 영역도 아닌 오로지 돈이다. 돈에 관한 한 본능보다 철저한 이성을 드러내는 이 왕국의 현실은 아프리카 초원보다 치열하다. 있는 놈들은 나가는 돈이 아까워 '열정'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농락하고, 농락당하는 대상은 대개 그 정도의 돈마저 버릴 수가 없어 끊임없이 인내한다. 그러나 먹이사슬 바깥으로 밀려나기 직전인 누군가가 있다. 그들은 홀로 방 안에서 마늘을 까고, 봉투를 붙이고, 인형 눈깔을 붙인다. 본드 냄새를 맡고 날아다니는 우주와 파워맨과 싸우며 실실거리며 웃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슬 속에 존재하기 위하여, 혼자만의 사투를 벌인다.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잘린 주인공 '김영수'는 마늘을 까면서, "어쩌면 나는 마늘을 까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고작 마늘을 까기 위해서 십여 년간의 교육을 받고, 고작 마늘을 까기 위해서 4년제 대학에 들어가고, 고작 마늘을 까기 위해서 입사를 했던 것도 아닌데……. 아니, 아니 어쩌면 "나는 원래부터 마늘 까는 기계였던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다. 자그마치 '공무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고, 일하는 장소는 동물원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아줌마와 체력 경쟁을 벌여 2:1의 경쟁률을 뚫었다.

 

 

"당신이 사용할 장비예요."

카메라가 장비의 뒤통수를 클로즈업한다. 순간, 목이 뒤로 꺾인다. 얼굴이 드러난다. 이마가 아래쪽이고 턱이 위쪽이다. 얼굴은 뒤집혀 있다. 그 얼굴이 화면을 꽉 채운다. 쿠쿵, 대포 소리 같은 효과음, 노약자나 임산부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는 장면이다. 털은 없다. 하지만 검게 번들거리는 피부가 무시무시해 보인다. 바로 고릴라의 얼굴이다.

"진짜 같죠?"

검게 변한 화면과 그 위에 뜨는 여자 사육사의 대사.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입어요. 오늘부터 당신은 고릴라예요!" (94p)  

 

 마늘을 까고 인형 눈깔을 붙이는 대신, 상하의 온몸에 털이 북실한 고릴라 옷을 입는다. 그리고 세렝게티 동물원에 출근한다. 철창 안에서 관람객들이 던지는 바나나를 먹고, 가슴에 멍이 푸르게 들도록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린다. 12m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맨손으로 오르며 사람들의 호기심과 환호를 불러낸다. 빌딩 꼭대기엔 각기 다른 색의 버튼이 있다. 그것을 누르면 성과급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먼저 눌러야 한다. 게다가 동물원에는 고릴라만 있는 게 아니다. 피그미하마, 판다, 캥거루, 아프리카 코뿔소……. 그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한다. 지정된 행동을, 동물과 닮은 제스처를, 관람객을 불러 모을 하루의 미션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려나, 하고 그들이 묻는다. 그리고 또다시 '사람 구실' 하고 사는 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고릴라 우리 속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가 생존 경쟁에 밀려 그곳으로 들어왔다. 누구는 부업을 하다가 본드에 취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동물원에 왔고, 누구는 기계처럼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동물원에 왔고, 누구는 회사의 폭탄 처리반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다 되돌아온 화살에 맞아 동물원에 들어왔다.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려면 '사람다움'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세렝게티 동물원에선 '사람 구실'을 못해도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동료들과 싸구려 소주와 안주를 먹으면서 서로를 다독이며 하루를 마감하고, 낙오되는 사람을 위해 한 명씩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버튼을 눌렀다.

 동물이 돼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역설, 그야말로 '웃픈' 현실을 그리고 있는『굿바이 동물원』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절규다. 현실과 맞물린 소설의 끝이 해피엔딩이어도 절대 웃을 수 없는, 고릴라 탈을 쓰고 진짜 아프리카 초원으로 자유를 찾아 떠난 이를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그러고 보니 4월이었다. 정신없이 훈련만 하느라 4월이 됐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눈을 떴다. 체육공원 주변에도 여러 종의 화사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먹고 사는 건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왠지 모르게 휴우, 한숨이 나오는 한때였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한 때 나에게도 4월은 빛나는 꿈의 계절이었다. 눈물 어릴 만큼 슬펐고, 그래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송 과장의 노래를 듣는 동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련히 멀어져간 내 인생의 4월이……. (63p)

정말 조풍년 씨의 몸값이 몇십 억씩이나 할까? 내 몸값은? 앤과 만딩고는? 과연 진짜 마운틴고릴라보다 비쌀까? 모르겠다. 모르지만 비쌀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내 몸 어딘가에 분명히, 조풍년 씨와 만딩고, 앤의 몸 어딘가에도 반드시, 진짜 마운틴고릴라보다 비싼 정찰가가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 안 죽었다."

여자 친구 관람객의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와-아! 관람객들의 환호성도, 짝짝짝, 아낌없이 쏟아지는 박수 소리도 두 배쯤 볼륨을 높인 듯 커져 있었다. 휘잉,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는 고릴라 조풍년 씨가 검은 털을 날리며, "우후우후." 월드컵 최종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스트라이커처럼 멋지게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멋져, 굉장해. 관람객들도 탄성을 연발했다. 멋져요, 조풍년 씨. 나도 감탄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조풍년 씨에게 묻고 싶었다. 과장님,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요? (128p)

"자기야, 인생이라는 게 뭘까?"

그걸 아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했다. 설령 몇 명이 그걸 안다 해도 나는 그 몇 명 중에 들지 못했다. 나 역시 마늘을 까던 지난날, 숱하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할 때마다 한숨만 나오고 마음만 어두워졌더랬다.

"마늘을 까고 있으면 있잖아,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마늘을 까기 위해서 태어난 건 아닐까? 마늘을 까기 위해서 여태까지 살아왔고 앞으로의 사간도 마늘을 까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닐까? 어떨 땐 내가 마늘 까는 기계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자기도 마늘 깔 때 그랬어?"

나도 마늘 깔 때 그랬다. 나란 무엇일까? 나에게 마늘이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손에 밴 마늘 냄새처럼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정체성은 오래전에 유행이 지난 액세서리처럼 이리저리 방바닥을 굴러다니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곤 했더랬다. (162p)

사람이면 어떻고 고릴라면 어떤가. 사람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다. 고릴라가 불행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권? 존엄성?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게 없다. 다 옛말이다. 있는 놈과 없는 놈이 있을 뿐이다. 빈부의 차가 개인의 가치를 판가름하고 결정짓는다.

상대적 빈곤감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인본주의 대신 물본 주의가 물만난 고기처럼 판을 치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는데 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고, 그래서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고, 그래서 툭하면 약을 먹거나 밀폐된 자동차 안에서 연탄을 피우거나 건전하지 못한 목적으로 한강에 가고, 아무리 자본주의라지만 정부는 그런 국민을 나 몰라라 방치하고,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게 일한 만큼 버는 건데 이 나라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씨발, 욕부터 나오고, 있는 놈들은 있는 놈들끼리만 노는데, 결혼도 있는 놈들끼리만 하는데, 민주주의는 개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니 지랄, 전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고,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계속 몸부림 쳐야 하고, 쥐구멍에 해 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고, 내일의 태양 같은 건 절대 뜨지 않고, 그런 세상인데……. (2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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