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 열린책들

​당신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만약 무인도에 한 권의 책만 들고 가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너무나 식상한 질문인가? 그래도 한번 대답해보라. 책장에 책 한 권만 있는 사람은 없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좋아하는 책을 한 권만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같은 질문이 온다면, 아마 며칠이 걸려 고민할 것이다. 어떤 책을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을지, 다시 읽어도 새로운 문장이 보이고,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책들, 혹은 무게에 제한이 없다면 좋아하는 책 중 가장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지 않을까. '책'이라는 것이 너무나 흔한 세상에서, 하루에도 몇 권씩 매력적인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책들에 시한부를 선고하는 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누군가가 같은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유독 예상치 못하게 풀어내는 작가, 노통브가 전하는 '책' 이야기는 어떨까. 그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독특하다고 하기에는 아쉽고 굳이 표현하자면 괴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불쏘시개』도 역시 별나긴 하지만 그녀의 책 중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교적 친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책이다. 장르는 희곡, 역시나 중편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얇다. 그러나 노통브는 정말로 매력적인 소재를 들고 왔다. 이야기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추위와 전쟁 속에서 불쏘시개로 삼을 만한 것이 책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먼저 불태울 것인가?"라는 것이다.

 

  조금은 극적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일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사실상 책의 가치는 반쯤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상상할 수 있다. 도시는 전쟁으로 인해 포위당했고, 그나마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집은 꽁꽁 얼어 불쏘시개가 필요하고, 주인공 교수의 집에는 책장 가득 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를 책들이 그득하다. 교수와 조교, 그리고 조교의 애인은 추위를 감내하는 고통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 책장 속에서 조금은 덜 가치 있는 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따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책의 내용부터 표지, 결말, 문장...... 총탄이 날아드는 바깥의 상황은 잠시 외면한 채 그들은 책에 대한 담론을 펼친다. 생존을 앞에 두고 있는 심각하고 진지한 상황에서 문학과 어법에 대하여 떠드는 그들의 대화는 왠지 모르게 우스우면서도 슬픈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책 자체에 대한, 그리고 가치 있는 책들에 대한 조건 없는 작가의 사랑은 그들의 대담 속에서 특히나 두드러지고, 책의 의미에 대해서 고심할 여지를 주고 있다. "무인도에 가면 어떤 책을 - "이라는 아까의 식상한 질문에서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결국엔 가장 두께가 있는 책을 택했다. 『불쏘시개』도 마찬가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책의 가치는 떨어지고, "오직 두께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이다. (83p)"

  ​그러나 책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서, 좀 더 본질에서 따져보자. 노통브는 너무나 사랑하는 책을 그녀의 문학 속에서 왜 태웠을까? 왜 책에 불쏘시개라는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을까? 결국엔 '생존'이다. 『불쏘시개』 속에서 책은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그녀의 삶 속에서 책도 이만큼의 가치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이야기는 책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경고이고, 극적인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책의 의미에 관해서 하는 실험적 질문이다.

 

 

마리나 : (마침내 그를 바라보며, 아주 상냥하게) 선생님, 제가 굳이 어려운 작가의 작품을 골라서 이해하려고 읽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저는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신중하게 읽고 있어요. 그 문장 하나하나를 읽으며 혼자 물어보곤 합니다. <이 주제에, 이 동사에, 이 보어에, 이 부사에, 난로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불꽃으로 탈 만한 무엇이 있는가? 이 문장의 깊은 (또는 그렇게 상정된) 의미는 이 방에서 온도 1도를 올리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인가?> 보세요, 제가 선생님께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문장을 하나 읽어 드리지요. <침묵이 이처럼 수상쩍었던 것은 오래전이었다.> 저는 이 문장에 대해서 비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문장이 담고 있는 심오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의문이 드는군요. 이 수상쩍은 침묵이 어떤 점에서 1분 이상의 열기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 하고. (32p)

다니엘 : 하지만 선생님은 무슨 근거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우리는 지금 현실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예술적 가치가 없을 수도 있죠. 그러니 문학은 더더욱 예술적 가치가 있어야죠.

교수 : 그러니까 문학이 자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아닌가. 자네의 삶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어. 그런 이유로 문학은 자네에게 위안을 주는 거야.

다니엘 : 그래도 제 삶은 분명 선생님의 삶보다 더 하찮을 겁니다.

교수 :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다니엘, 자넨 장님이군. 첫 번째 만남에 대한 판단처럼 내 삶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이 말이야.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링 위에서 다시 만난다. 즉석 경연 대회가 권투 시합장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 그전에는 그 두사람이 결코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러다가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게 돼. 그들은 열여섯 살이고, 아름답다네. 그들은 권투하는 링 위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거야. 멋지지 않은가? (65p)

다니엘 : 독서가 더이상 무익하지 않도록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우리 몫이죠.

교수 : 독자를 교육시킨다! 독자를 교육시키듯 한다! 자넨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을 정도로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사람들은 삶에서도 그렇듯이 독서에서도 똑같아. 이기주의적인 데다가 쾌락에 빠져 들고 달라지기가 힘들지. 작가의 몫은 독자의 보잘것없음에 대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독자를 받아들이는 거지. 만일 그 작가가 독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렇다면, 낭만적인 바보는 바로 그 작가라네. 블라텍의 책을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네. (6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