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갈 김원일 소설전집 9
김원일 지음 / 강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갈』 김원일 / 강

독을 품고 비극에 대항해 온 사람들

 

 

 

 ▒ 책을 읽고 나서.

 김원일 작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 『마당 깊은 집』도 읽지 않은 채, 나는 작가 소설 전집의 이 작품을 대뜸 구매했었다. 전집에 수록된 목록도 자그마치 28권이나 되는데, 언젠가 우연히 발견해서 홀린 듯이 책장에 넣어둔 책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눈에 들어와 펼쳐 들었다. 압도적인 현대사, 장엄한 비애, 책 뒤쪽에 나와 있는 짤막한 해설에 저절로 수긍이 가는 작품이었다. 한참이나 오래전에 활약하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현대사'와 삼대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만 듣고 현대 작가인 '천명관'의 『고래』를 떠올렸을까? 어찌 됐든 그 작품 또한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옛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작품을 읽은 후, 다시 한 번 한국의 오래된 작가들의 책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전갈』은 한 권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놓은 소설이다. 그 많은 이야깃거리를 어떻게 한 권으로 담아냈는지도 의문이었다. 한국사의 질곡을 아우르는 다양한 사건들이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조부의 삶에 걸쳐 등장하며, 이는 세 개의 소설 속 액자 속에 사르르 녹아든다. 조직 생활로 콩밥 먹고 나온 주인공 '강재필'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어 자신의 아버지 '강천동'의 기막힌 삶을 드러내고, 어쩐지 끈질기게 추적하고 싶어지는 조부 '강치무'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식이다. (작가는 감방에서 나온 이후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보전하는 것에 몰두한다) 실제로 마주하지도 못한, 아니 사진에서만 언뜻 보았던 조부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부터 기인한다. 한 여자를 강간하여 온 가족을 협박함으로써 신붓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주인공 '강재필'이 태어났다. 개를 야만적인 방법으로 훔치고 학대하여 팔아 자신의 사업으로 선택했고, 나중엔 불의의 사고로 손마저 잃게 되어 무력한 삶을 살게 된다. 폭력과 포악한 행동들로 살아간 아비의 인생을 보고 자란 주인공은, "네 아비 때문에 망친 인생인데 너까지 이러기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히려 더욱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왔고 어머니와 관계된 정신병 또한 안고 살아간다.

 ​'강재필'이 아비에 대해 하는 회상은 모조리 증오와 트라우마로 비열한 시선을 건네지만, 조부에게만큼은 왜인지 모를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내보인다. 마치, 아버지를 부정하고 또 다른 아버지를 찾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아비에게 돌리고, 조부의 기록으로 갱생의 희망을 품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 한 액자 속에, 주인공이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구성한 할아버지의 삶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두만강을 넘어 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수많은 기록을 통해 얻어낸 그의 인생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던 것을 '강재필'은 알게 된다. 조부는 독립군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초소에서 마루타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어떤 의도 없이 충동적으로 빨치산에 들어가기도 했고, 아비의 삶처럼 마지막에는 무기력하게 살았다. 삶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는 크나큰 권력과 폭력 앞에 조부 또한 멀쩡히 살아남진 못 했던 것이다. "사람 한평생이 부평초(개구리밥)"​과 같아 삶과 죽음이 여반장"이라는 책 속의 말은 천신만고와 같은 삼대의 삶을 대변해준다.

 '전갈'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소설은, 어떤 책보다 불편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폭력, 학대, 강간, 마루타 (인체실험), 조직 등의 소재들을 자세한 이야기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지만, 그런 불편함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역사의 우울 속에서 개인 또한 희생되고 말았던 비극, 그리고 삼대까지 이어져 왔던 슬픔과 운명……. 단단한 갑옷을 입고 독을 품고 있는 전갈처럼, 비극 앞에 나름대로 맞설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을 보고, 소설의 끝에는 어쩐지 코끝이 아릴 슬픔이 느껴졌다. 그 운명에 흔들렸던 주인공에게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기술함은 삶을 갱생할 수 있는 희망이었고 구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조부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지만, 아비의 삶을 회상하고 조부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보다도' 더욱 값진 빛나는 희망을 안게 되었을 것이라고 희망해본다.

엄마 무덤에 절하며, 불효자를 용서하란 말은 읊기 싫었다. 전과자로 전전해온 내 꼴을 안 보고 가신 게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몰랐다. 엄마 무덤에 참예를 마치고 나는 묏등에 박힌 잡초를 뽑았다. 가족이란 단어조차 내겐 그 연상 작용이 슬픔과 분노를 환기시키는 질료이지만, 엄마 무덤은 당신의 생전 모습과 닮아 볼썽사납게 초라했다. 엄마 무덤에 번듯한 묘비라도 세워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어디에 묘지 관리를 의뢰해야 할지 방책이 서지 않았다. (...) 나는 무덤 옆에 비켜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뿌리엉겅퀴 잔가지가 바닷바람에 떨고 있는 저 멀리로 둥그렇게 반원을 그린 동해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양광 아래 드넓은 바다는 잔잔했다. 잘게 부서져 반짝이는 너울들이 눈에 시었다. 갯뜰도, 형제섬도, 꽃바위도 눈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북쪽 해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49p)

시간에 매인 몸이 아닌데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울산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지체하게 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삼 년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오자 누추한 기억의 창고인 출생지를 찾은 탓에 기분이 하강 국면으로 떨어졌다는 이유를 댈 수 있다. 밀양 땅을 밟고 싶지 않다는 잠복된 거부반응이 지체하게 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내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미흡하다. 묵은 상처를 긁을 때 다시 촉발된 가려움증으로 상처의 화농을 박박 긁어도 성이 안 차는 그런 덧남이랄까. 내 마음이 울증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게 지상에서 벌써 사라진 아비와 엄마가 남기고 간, 머릿속에 송진처럼 붙은 기억이 가역반응을 일으킨 탓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이 오히려 어린 시절을 재생시켜 들쑤셨고, 서른다섯 해 생애와 뒤죽박죽 섞이더니 분열증을 일으켰다. 슬픔과 분노가 배출구를 찾을 수 없자 탈진 상태라 걷기조차 힘에 부쳤다. 빈곤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말대로, 빈곤과 공포 자체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나를 자실케 한 셈이다. (86p)

가리실은 하늘 아래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다들 말했어. 철 따라 꽃이 피고 지고, 호랑이, 곰 등 뭍짐승들이 살았고, 긴긴 동절기에는 집채만큼 눈이 쌓이면 옆집과는 굴을 뚫고 내왕했지. 외지 사람 보기는 이따금 들어오는 포수가 고작이었어. 하늘 가리는 잣나무, 봇나무 숲길을 뚫고 산 넘고 물 건너 회령 읍내까지가 사십 리라. 조선이 망했다는 말이 산골로 흘러들어왔을 때, 어른들조차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대. 밭농사 짓고 사냥해서 사는 무식쟁이 산골 사람들이라 그런 걸 안다고 형편이 달라지리라 생각을 못한 게지. 그러나 그런 바깥 사정이 첩첩한 산골까지 영향을 미쳐 천지개벽 시대를 맞게 되었지. 마을에 당꼬바지 입은 일본 병정이 말을 타고 나타난 게 그즈음이야. 일본 사람들이 그 산골까지 들어와선 조선인 인부를 부려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도를 깐 게라. 부근에 광산이 생기고, 회령 가는 철길이 깔리게 되니 낯선 타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 (299p)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무엇보다 용병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게, 주어진 운명을 뿌리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비 역시 발버둥쳤으나 주어진 운명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평탄한 길을 순조롭게 걷지 못했으니, 내리막 돌멩이길만 내 앞에 펼쳐졌을 뿐이었다. 저 아래쪽에서, 네가 오올 길은 이쪽밖에 더 있냐고 소리치는 아비의 환청이 기차 레일의 마찰음과 진동에 섞여 따라왔다. 뜬금없이 아비가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34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