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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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머릿속에 아몬드처럼 생긴 '아미그달라' 혹은 '편도체'의 크기가 작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쉽게 말하면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갖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그에겐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았고, 슬퍼해야 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디서든 튀어 보였다. 엄마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끈질기게 가르쳤다. 주입식 교육이었다. 문제와 모범답안을 준비하고, 가끔씩 응용문제를 내밀었다. 윤재는 입이 닳도록 외우고 익혔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람에게 동정론이 일정도로 팍팍한 세상이었다.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만큼이나 공감에 불능한 인간들이 허다했다.

 

 온갖 부정적인 상황으로 둘러싸인 소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따뜻하게 빛나고 있는 것들을 발견했을 때,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소년에게 감정은 없지만, 대신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 어쩔 땐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힘들게 윤재를 교육했던 엄마, 뭐든지 감싸주었던 믿음직한 할멈,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언제나 방향을 제시해주던 심 박사,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 준 도라, 표현하는 방법은 서툴렀지만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곤이…… 이들이 없었다면 윤재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결말을 맞이하고, 이어서 책의 뒤편에 실린 작가의 말과 인터넷에 올라온 인터뷰 등을 찾아 읽었다. 손원평 작가는 엄마가 되고 난 후, 아이를 바라보며 소통과 감정,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했다. "이런 아이라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라는 상상으로 등장인물을 만들어냈다고도 했다. 작가의 고민은 희대의 살인자가 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지의 고민으로 이어진듯하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128쪽)" 결국, 인간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작가는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을 읽기 쉽고 깔끔한 소설로 대신했다.

 

 언젠가 우리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포기라는 게 어딨어, 내 아이인데."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던 청소년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모를 보고 한 말이었다. 사랑, 혹은 희망, 때로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거나, 작은 관심으로도 표현되는 따뜻한 감정, 그리고 소통. 이 책이 왜 좋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39쪽,
침묵은 과연 금이었다. 대신 ‘고마워.‘와 ‘미안해.‘는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 두 가지 말은 곤란한 많은 상황들을 넘겨 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여기까진 쉬웠다. 상대방이 내게 천 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이삼백 원 내 주는 것과 비슷했다.
어려운 건 내가 먼저 천 원을 내는 거였다. 그러니까, 뭔가를 원한다거나 하고 싶다거나 어떤 것을 좋다고 표현하는 일들. 그런 게 힘든 이유는, 여분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돈을 내야 하는데 나는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얼마를 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잔잔한 호수에 억지로 파도를 치게 만드는 것처럼 버거웠다.

128쪽,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
엄마와 할멈에게 칼을 휘두른 남자와 곤이는 P.J. 놀란 같은 타입이었을까. 아니면 P.J 놀란과 가까운 건 오히려 나였을까.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곤이가 필요했다.

162쪽,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245쪽,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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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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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데자뷰처럼 떠오른 장면은 수년 전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에 담긴 감정도, 내가 책을 바라보는 감정도 유사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라는 2년 동안, 내게 온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운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내게 찾아올 슬픔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읽고 있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작가가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이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대상의 차이가 있지만, 형식을 포함하여 책에 담긴 마음, 슬픔이라는 감정 등 많은 것이 겹쳐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애도일기> 235쪽)"

 

"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 글쓰기는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 따라서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글을 채워나갈 종잇장조차 내 앞에 두지 않을 테니까." (<어느 개의 죽음> 65쪽)

 

다른 책 이야기를 이리 길게 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내가 <애도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슬픔의 감정이 어떤 대상에 따라 섣불리 판단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누구는 가족을 죽어서 슬퍼하고, 누구는 키우던 반려동물이 죽어 슬퍼한다. 대상은 중요치 않다. 소중한 존재 -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더 나아가 식물이든 무엇이든 - 를 잃어버린 사람의 감정은 모두가 똑같다. 결핍을 마주한 두 작가가 소중한 존재를 애도하고, 자신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작가 '장 그르니에'는 개의 죽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접어들고 항시 우울함이 감돌지만, 여전히 감미롭고 충만한 세상을 본다. 고통과 절망, 죽음들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과, 행복한 삶과 관계된 아름다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작가 "자신 내부의 두 존재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51쪽)"이다. 결핍을 견디기 위해 그는 종이와 펜을 들어 그 모든 사유에 대하여 기록한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던가. 작가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타이오'라는 개의 행동을 추억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그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위대함, 그 속의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염세적인 시선도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글을 쓴 상황 속에서 슬픔을 부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죽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기에, 텍스트를 넘은 엄청난 우울함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이 된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위안이 되었다. "사랑하자. 위선과 가식과 자만이 없는 사랑을 하자."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책을 덮는다. 삶을, 삶의 소중한 존재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 것 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9쪽,
두렵지 않은 수호신의 가호를 빌듯이, 밤에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은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것이다. 녀석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달래주는 자연의 속성들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침묵, 잠, 걱정도 후회도 없는 만족,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세상을 감싸고 있는 햇빛, 발 아래에서 우연히 찾아낸 샘과 같은 것들 말이다. 녀석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58쪽,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63쪽,
6월 1일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암탉이 운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탉이 울기 시작한다.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 너머, 점선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을 본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면, 그 형상들은 실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로 불어나고, 마침내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84쪽,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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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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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막힐 때 청량하고 짜릿한 사이다 한 모금이면 세상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맥주, 그래. 맥주도 좋겠지만, 그보다 알싸하고 씁쓸한 소주 원샷이 어울리겠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 좋겠다. 바다 위에서 배를 타던지, 발장구를 치던지,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으면 더욱 훌륭하다. 지금은 꽃 피는 봄이지만, 이 책을 보고 난 뒤엔 일상에서 벗어난 이런 개꿈 같은 상상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언제나 그렇듯 여러 작가의 이름을 대면서 한창훈 작가의 시원한 글이 좋다고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에게 떼놓을 수 없는 바다의 이미지 - 그에게 바다는 이미 언급하기 지겨울 정도이지만 - 가 떠오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말 그대로 시원스러운 글을 지어내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원스러운 글은 이번 책에서 정점을 찍는다. <한겨레 21>에 연재한 글을 모아놓은 것인데 제목이 '한창훈의 산다이'다. '산다이', 생소한 일본어로 오해할 수 있지만 옛날에 'sunday'라는 말에서 유래된, 전라남도 섬 지방의 말이라고 한다.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쉽게 말해 한바탕 신나게 노는 문화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작가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는 지금 우리들에게 그가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산다이'였던 모양이다. 강연이고 뭐고 귀찮은 학생들 앞에서 '문학이고 지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처럼, 독자들이 한바탕 웃고 힘낼만한 이야기들을 준비하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작가도 우울한 사회 현실을 외면할 순 없었지만, 대신 이리저리 비틀어 놀려대거나 정말 살아본 아저씨의 조언을 들려준다. (특히 하면 된다 정신으로 대강 (대강? 대! 강!)의 제왕이 된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통쾌하던지!)

 

"아아, 우리에겐 이렇게 멋진 아저씨도 있다" (출판사 서평 中)
아아, 정말 그렇다. 표준어 거부 운동을 제안하고,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고 말하고, 벤치에서 바다의 표정을 읽고, 비혼 선언에 대해 말하고, 잘못됐으면 덤벼들어야 된다고, 그래야 청춘이라고 말하는 이 아저씨는 얼마나 멋진가. 웃기라고 쓴 티가 팍팍 나는 글에서도 좀처럼 시원하게 웃음이 나질 않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취향이 갈릴지라도 내겐 충분히 이 책이 '산다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흥겨운 한 판이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무당도 신부도 스님도 목사도, 심지어는 신神도 모른다. 모르는 것 가지고 벌벌 떠는 것처럼 찌질한 짓도 없다. 인생 알 수 없는 덕에 우리는 산다. 젊었을 때의 계획대로 중년 이후를 사는 사람, 나는 못 봤다. 그러니 그런 거 무시하고 친구와 어울려 어기차게 기운이나 발산하자. 그게 생명력이다. 강한 생명력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 이거 멋지지 않은가. 위정자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들을 무서워한다. 그들이 무서워할 젊은 영혼이 많은 것, 그게 정상적인 국가이다. 그러니 좆도, 산다이 하면서 놀자. 놀아도 내일은 또 오더라. (20쪽)

 

 

 

54쪽, ‘대강‘의 제왕
"이제 대강 좀 해라, 대강."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대강이라면 맞아, 큰 강! 이렇게 외치고 나서 엎드려 있는 수많은 쫄따구들에게 자기 땅의 강을 모두 새로이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물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돌팔이의 조언과 도랑을 다뤄서 재미 본 기억도 한몫했지만 제왕은 이른바 ‘가오‘가 다르지 않은가. 강이야말로 자연의 본모습이며 우리는 그저 거기에 깃들여 사는 존재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무지몽매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는 당연히 듣지 않았다. 거기에 22조라는, 아무리 들어도 감이 안 잡히는, 노동자 김 씨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8만 원 보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다.



126쪽,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학생들을 만나자. 우선 사과부터 하자. 너희 친구들을 터무니없는 죽음으로부터, 너희들을 충격과 공포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못난 어른이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은 바다가 아니라 그런 사고를 내고 먼저 도망가 버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뒷수습이라고 한,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피해자들을 이간질하는 것도 모자라 악랄하게 공격하고 있는,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의 어떤 사람들이니까.



152쪽, 벤치의 나이테
그 벤치에서는 바다의 표정이 잘 보인다. 바다의 기분이 보인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뿜어 올린 담배 연기도 그때 부는 바람의 방향대로 흘러간다. 바다의 1년이 표정을 바꾸며 흘러가는 것을 그곳에서 확인한다. 단순히 나무 몇 개 엮어놓은 것이지만 벤치가 없었다면 무심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194쪽,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파도가 하얗게 솟구칩니다, 소주 마십니다. 손발이 얼어갑니다, 소주 마십니다.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나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뭐 이런 식이다. 마치 아직도 어선에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람에 들창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소주 병을 꺼낸다. 얼른 몇 잔 마셔 외롭고 추운 몸을 덜 춥고 덜 외로운 에틸알코올의 세계 속으로 보내는 것이다. 조금은 비장하고 우울한 미학이다. 그러고 나면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혼자서 말한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는 중이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겨울 바다는 존재에 대해 끙끙 앓는 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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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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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편혜영 작가의 『선의 법칙』 (비교적 최근 소설이다)을 읽고 나서 나는 리뷰에 이렇게 썼다. "어딘가 텁텁한 맛은 있어도, 파국으로 치달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도로 어둡지는 않다." 잔잔한 느낌의 소설임에도 왠지 모를 꿉꿉함이 느껴졌었는데 그 꿉꿉함이 견딜만했던 모양이었다. 파국을 그리고 있음에도 살아간다는 느낌을 주어서 희망적이긴 했었다. 그러나 『재와 빨강』을 읽고 나자, 내가 만났던 책이 편혜영 소설의 전부가 아니며 한편으론 그의 새로운 시도였고, 원래 그가 추구하던 것이 바로 이런 문학이었구나 싶었다.

 

 우연히 맨손으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전염병이 창궐한 국가로 발령 난 주인공. 거리는 쓰레기와 소독약 연기로 매캐하고, 그가 맞는 상황들에는 늘 불운이 감돈다. 본사로 출근하기로 하여 기다렸는데 담당자에게는 연락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끔찍한 죽음과 그 죽음에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결국 길바닥과 지하 하수도까지 내몰린다. 추락의 연속이다.
 주인공의 아내가 왜 죽었는지, 밝혀진 죽음의 시점이 왜 그의 출국 시점과 닿아 있는지, 칼을 쥐는 찰나의 느낌이 왜 익숙하게 남아있는지 소설은 구태여 차례대로 설명하진 않는다. 오로지 주인공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남으려 애쓰는 광경을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도시에 빠르게 전염병을 퍼뜨리는 더럽고 끔찍한 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가장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들끓는 쥐는 주인공의 인생과 연계되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마치 짜인 것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렇다. 쥐는 그에게 때로 살기 위한 방편이 되고, 반대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궁지에 몰린 인간들보다 차라리 해롭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건, 주인공이 쥐를 때려죽이는 일을 하게 되면서도, 쥐의 엄청난 생존능력을 본받아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점이다.

 

 소설 전체에 퍼져 있는 불쾌감과 아이러니 속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품이다. - 여기서 불쾌감은 소설이 아닌, 소설 속 세계에 깔린 것을 말한다 - 죽음의 냄새 대신, 그의 몸이 소독약과 약품 냄새로 뒤덮인 장면 속에선 오히려 한껏 처참한 기분이 든다. 온 세상에 있는 향기와 독한 냄새를 끼얹는다 할지라도, 그의 몸에 뒤덮인 재와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는 한.

 

 공중전화에서 그가 아는 모든 이름을 부르는 장면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생은 허울뿐이다. 구석으로, 구석으로 내몰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자신과는 이제 아무 의미 없는 이름들을 부르짖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도통 낯설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세상에 내보이려 했을까 생각했다.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살벌하게까지 써 내려갔는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현실과 맞닿은 지점이 있을 거란 생각에 약간 소름이 끼쳤다. 부조리한 세계, 인간성의 상실, 추락한 인간의 본성, 끔찍한 전염병이 퍼져도 금방 회복하는 일상성 (혹은 불감증) 등, 그에게 영감을 준 장면들이 진짜 있을 것만 같아서.

 

 

104쪽,
바닥에 떨어진 칼이 그의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폈다. 칼을 쥔 느낌이 익숙하다고 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해서, 손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전처를 찔렀을 리는 없었다. 칼의 손잡이는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일단 쥐면 익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칼을 쥐었다 놓는 순간,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자신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세계가 칼날만큼이나 차갑고 칼자루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04쪽,
바닥에 떨어진 칼이 그의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폈다. 칼을 쥔 느낌이 익숙하다고 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해서, 손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전처를 찔렀을 리는 없었다. 칼의 손잡이는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일단 쥐면 익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칼을 쥐었다 놓는 순간,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자신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세계가 칼날만큼이나 차갑고 칼자루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68쪽,
그 일들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 그는 덥고도 더웠지만 계속해서 아내를 안고 싶게 한 파란 날개 선풍기 때문에 울 것 같았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음이 떨려 좋은 줄도 모르고 들은 쏘나타 때문에, 지붕에 던져올린, 새가 물어갔는지 쥐가 물어갔는지 알 수 없는 부러진 앞니 때문에, 빨간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발톱 때문에 울 것만 같았다.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34쪽,
좁은 사각형의 유리상자 안에서 그는 공연히 떠오르는 이름들을, 전처의 이름이나 유진의 이름 혹은 자신의 이름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동전을 넣지 않으면 어떠한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는 묵묵히 그가 부르는 이름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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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작 1 - 간질병의 산을 오르다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다비드 베 지음,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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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나는 길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지하철에서, 가끔 당황스러운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은 이랬다. 청소년쯤 되는 아이가 알 수 없는 문장을 소리쳐 말한다. 성인인 듯 보이는 사람이 헤드폰을 낀 채로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욕을 퍼붓는다. 큰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은 다들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다. 그러다 '나쁘거나 혹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사람이란 것을 깨닫곤 큰 소리를 애써 귀속에서 줄여가며 외면한다. 이는 단지 주변 사람 뿐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주목을 끄는 행동을 할 때, 옆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항상 놀라웠다. 다른 경우도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본 분들은 모두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절대로 흥분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침착했다. 손으론 아이를 제지하면서도 표정이 굳거나 인상도 찌푸리지 않았다. 그저 늘 있었던 일인 양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그 모습이 대단하다고 여겨지면서도,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되기까지의 고난의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갑갑해졌다.

 

 

 

"나는 그 가짜 스승들, 음성적인 치료법들에 걸었던 희망을 다 토해버리고 싶었다."
 나의 연민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조차 그들에게 고통이 될 거라는 생각은 『발작』이란 책을 보고서 더 깊어졌다. 책은 간질병으로 시시각각 발작을 일으키는 형을 둔 작가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이다. 1970년대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간질병이 한 가족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회고록 형식으로 담았다. 모든 가족들은 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움직였다. 매크로바이오틱, 침술, 강신술, 수맥 관리, 연금술…… 발작을 멈출 수만 있다면 가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발작은 완벽하게 고쳐지지 못했다. 실패, 좌절의 연속이었다. 간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벌레보듯 했던 사회였다. 밖에서 형이 발작을 할 때면, 오히려 가족들은 온갖 비난과 멸시에 시달리곤 했다.

 

 

 

어린 나이였던 피에르프랑스와 (필명 다비드 베)는 형의 발작을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숨겨두다, 훗날 그림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당시에는 장난스럽고 웃기는 모습으로 감췄던 속마음은 『발작』에서 무서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책은 온갖 것들이 복잡하게 섞인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숨김없이 그려낸 듯 보인다. 꿈속의 환상, 형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나쁜 마음,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들, 그가 만화가를 꿈꾸면서 읽었던 책들이 모두 들어있었다. "나의 갑옷은 밤이다." 라는 그의 독백처럼, 마음속 어두운 구석에 모든 감정을 토해놓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꺼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온갖 치료법과 병을 나아지게 할 것들을 찾아 나섰던 가족들의 끝도 결국 내가 목격했던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고립된 곳에 머무르고, 병에 순응하고,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살아가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 들게 했다.

 

 

 

"나의 개명은 입장을 표명하는 하나의 방식이 됐다. 나는 속되고 천박한 카우보이들에게 맞서는 눈부신 인디언들의 편에 섰다. 나는 살찐 나치들에게 맞서는 말라빠진 유대인들의 편에 섰다."

 

 작가의 불안하고 격앙된 감정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책은, 다소 읽기에 불편하기도 했다.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생각들을 그대로 풀어놓았으니 어찌 보면 참 불친절하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순간 페이지를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게 한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들, 한 세기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독특한 서술 덕분에 불친절한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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