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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ㅣ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내내, 데자뷰처럼 떠오른 장면은 수년 전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에 담긴 감정도, 내가 책을 바라보는 감정도 유사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라는 2년 동안, 내게 온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운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내게 찾아올 슬픔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읽고 있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작가가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이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대상의 차이가 있지만, 형식을 포함하여 책에 담긴 마음, 슬픔이라는 감정 등 많은 것이 겹쳐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애도일기> 235쪽)"
"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 글쓰기는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 따라서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글을 채워나갈 종잇장조차 내 앞에 두지 않을 테니까." (<어느 개의 죽음> 65쪽)
다른 책 이야기를 이리 길게 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내가 <애도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슬픔의 감정이 어떤 대상에 따라 섣불리 판단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누구는 가족을 죽어서 슬퍼하고, 누구는 키우던 반려동물이 죽어 슬퍼한다. 대상은 중요치 않다. 소중한 존재 -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더 나아가 식물이든 무엇이든 - 를 잃어버린 사람의 감정은 모두가 똑같다. 결핍을 마주한 두 작가가 소중한 존재를 애도하고, 자신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작가 '장 그르니에'는 개의 죽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접어들고 항시 우울함이 감돌지만, 여전히 감미롭고 충만한 세상을 본다. 고통과 절망, 죽음들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과, 행복한 삶과 관계된 아름다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작가 "자신 내부의 두 존재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51쪽)"이다. 결핍을 견디기 위해 그는 종이와 펜을 들어 그 모든 사유에 대하여 기록한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던가. 작가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타이오'라는 개의 행동을 추억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그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위대함, 그 속의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염세적인 시선도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글을 쓴 상황 속에서 슬픔을 부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죽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기에, 텍스트를 넘은 엄청난 우울함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이 된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위안이 되었다. "사랑하자. 위선과 가식과 자만이 없는 사랑을 하자."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책을 덮는다. 삶을, 삶의 소중한 존재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 것 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9쪽, 두렵지 않은 수호신의 가호를 빌듯이, 밤에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은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것이다. 녀석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달래주는 자연의 속성들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침묵, 잠, 걱정도 후회도 없는 만족,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세상을 감싸고 있는 햇빛, 발 아래에서 우연히 찾아낸 샘과 같은 것들 말이다. 녀석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58쪽,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63쪽, 6월 1일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암탉이 운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탉이 울기 시작한다.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 너머, 점선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을 본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면, 그 형상들은 실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로 불어나고, 마침내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84쪽,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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