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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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존재가 갑자기 큰 폭풍처럼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변하긴 하지만 - 엄마에 대한 마음은 조금 더 각별하다.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있다. 작아졌다가 조금 커졌다가 몽글몽글하기도 하면서 옆에 서 있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온갖 세상 살이를 견뎌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도 엄마 앞에선 한순간 어린아이로 머무르고 싶다. 엄마 앞에서라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 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엄마가 아팠다. 웬만한 일도 고통도 꾹 참던 엄마가 진심으로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드는 감정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훅,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솔직해진 엄마가 사랑스러웠다. 아픈 걸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엄마가 나보다 더 약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아주 가깝게 인식하게 되었다.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지 않은 건 쓰지 않는다'라는 철칙으로 자전적 소설을 꾸준히 써냈다. 생생하게 경험한 글감이 상상을 해서 만든 것보다 더욱 풍부한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자전적' 요소가 들어간 글은 자신의 내부와 치부를 모두 드러내며 감수한다는 뜻이다. 솔직함, 용감함, 과감함.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 작가의 강점은 이것뿐만은 아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책은 「부끄러움」이었고 이번에 읽은 「한 여자」는 두 번째 책이다. 분량이 꽤 짧은데도 나는 밑줄을 정말 많이 그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하여, 그에게 남은 어머니에 대한 흔적 - 사진, 혹은 기억 - 을 통하여 어머니의 자서전을 써 내려간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다른 모습의 실루엣들이 겹쳐진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때로는 증오하며, 아름답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

내 마음과 겹쳐지는 순간

"처음에는 내가 글을 빨리 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마치 어머니에 관한 진실 - 그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 을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순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단어들을 고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대해 궁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게는 그러한 순서의 발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50쪽)

작가 '아니 에르노'가 책 속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장을 쓸 때 꽤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 같았다. 또한 독자인 나도 글을 읽는 내내 크게 다가오는 문장들에서 엄마를 향한 생각과 마음이 겹쳐지는 순간 조금 멈칫하곤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둘을 이어 보았다. 다시 한번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훌쩍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차츰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인 이달 초에 그랬듯, 날이 춥고 비가 오면 여전히 만족스러움.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래 봐야 소용없구나> 혹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구나>(어머니를 위한 이런저런 일)를 확인할 때마다 밀려드는 공허한 순간들. 어머니가 보지 못할 첫 번째 봄이라는 생각이 자아내는 빈틈. (이제는 평범한 문장들, 심지어 진부한 표현들에 담긴 힘이 느껴짐.) - P20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여자, 며칠 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 P22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 - P23

사진 속 얼굴들이 움직인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아무리 오랜 시간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내 눈에 보이는 건 그저 1920년대 영화 속 의상을 빌려 입은 듯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웬 아가씨뿐이다. 장갑을 쥐고 있는 넓적한 손과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자세만이 그것이 내 어머니라고 말해 준다. - P42

두 달 전, 종이 위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쓰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고, 심지어 만약 그 문장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읽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병원과 노인 요양원이 위치한 구역으로 가는 것이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들이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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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힌트 없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0
안미옥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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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추천하는 마음

책 추천이란 조금 난감하고 어렵습니다. 다소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추천한다는 것은 다소 일방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항상 들곤 하거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시'라는 장르는 조금 일방적이더라도 열심히 추천하고 싶어집니다. 같이 읽고 싶고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좋겠어서요.

아직 시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신간이 나오면 꼭 읽게 되는 시인의 이름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안미옥 시인인데요. 시인님의 시집은 제가 시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에 처음 읽게 되었어요. 창비 시선 408번인 「온」이라는 시집을 읽었을 때 다른 시집을 읽었을 때와 다르게 저에게 너무나 편안하게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온」에 수록된 시 한 편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놓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보기도 합니다.

더욱 명징해진 시들

문학이든 다른 예술이든 결론 지어지지 않고 더 많이 열려 있을수록 독자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열리면서 확장되는 것이 시의 매력인 듯합니다. 「온」을 읽었던 좋은 감정과 기대로 읽게 된 「힌트 없음」은 이전의 시집보다 더 명확하고 뚜렷한 이미지와 언어들이 가득했어요. 핀 시리즈 시인선이 대체적으로 분량이 적은 편인데, 수록된 시가 적어서 감각적이고 독특한 표현들이 가득한 시들도 분명 멋있지만, 평범해 보이는 언어들이 조합되고 반전되고 새로운 의미를 뿜어내게 되는 것이 저는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안미옥 시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읽혔던 이유는 어떤 시어들이 과장되거나 툭 튀어나오지 않고, 설정한 온도에 맞추어 명확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슬픔과 다른 모호한 감정들이 찬찬히 가라앉듯 펼쳐진 시들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가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위로를 받는 것 같았어요. 현실과 일상 속에서 건진 시인의 의문에 동조하기도 했고, 시인이 풀어낸 문장이 내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시인의 <후추>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금 감동했고요. "그러니 어떤 정당화와 뒤덮음 없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간은 귀하다" (에세이 <후추> 중에서). 시집을 읽는 데에도, 문학을 읽는 데에도, 무언가를 쓰는 데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되는 시인의 말은 큰 용기와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시의 온도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단단히 묶이는 느낌도 들었어요.


감각적이고 독특한 표현들이 가득한 시들도 분명 멋있지만, 평범해 보이는 언어들이 조합되고 반전되고 새로운 의미를 뿜어내게 되는 것이 저는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안미옥 시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읽혔던 이유는 어떤 시어들이 과장되거나 툭 튀어나오지 않고, 설정한 온도에 맞추어 명확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슬픔과 다른 모호한 감정들이 찬찬히 가라앉듯 펼쳐진 시들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가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위로를 받는 것 같았어요. 현실과 일상 속에서 건진 시인의 의문에 동조하기도 했고, 시인이 풀어낸 문장이 내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시인의 <후추>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금 감동했고요. "그러니 어떤 정당화와 뒤덮음 없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간은 귀하다" (에세이 <후추> 중에서). 시집을 읽는 데에도, 문학을 읽는 데에도, 무언가를 쓰는 데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되는 시인의 말은 큰 용기와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애프터>

솟아오르는 일과 / 가라앉는 일의 깊이를 알게 될 때

빛은 제 몸을 비틀어 / 직선의 몸을 갖게 되었다 / 직선으로 깨지게 되었다 - P15

<렌탈 테이블>

이상하게 // 손을 겹칠 수 있다는 것 / 말이 번진다는 것 / 문 뒤에 다른 문은 없다는 것

믿고 싶은 것의 목록을 말하는 입이 부서진다. 꼭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내가 하는 핀잔들이 컵에 담긴다면. 한꺼번에 전부 마셔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투명한 물. 쌀알들. 휘휘 저으며. - P35

<공 던지는 사람들>

나는 미래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내가 쓰는 미래는 언제나 과거에 있었다 마치 태어나는 일처럼 //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 P49

<힌트 없음 - 질문과 대답>

다정은 약한 부분을 깨뜨린다. 찌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을 가졌다. 다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깨뜨리는 것인데 안아준다고 착각하면서.

다정의 방향에 / 다정의 다음을 두고 있나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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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 - 서로 다른 너와 나를 위한 9가지 결혼 심리학
신동인(신디)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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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행복 또는 복잡한 감정


결혼을 하게 되면, 그리고 신혼을 보내고 있다 하면 거의 대부분 행복한 얼굴로 묻는다. "신혼이라 좋지?" 이 말에 항상 웃으면서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저 '좋다'라고 말하기엔 신혼의 감정이란 꽤 복잡하다. 분명 행복하고 설레고 좋은데, 거쳐가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원가족에서의 독립과 분리, 처음 겪는 중대한 결정 (집, 식 관련 계약 등),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몇십 년간 다르게 자라온 두 사람이 결합해가는 과정 등, 젋은 부부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시기가 바로 신혼이다.


실제로 나는 결혼 직전 메리지 블루를 심하게 겪었다. 메리지 블루는 결혼 전 남녀가 겪는 심리적인 불안, 우울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전 처음 겪는 오묘한 감정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만약 이전의 나였다면 이 감정을 끙끙 앓고 다른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환시켜 내보내거나 꽤 오랫동안 안고 있다가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약 1년가량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랫동안 신랑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나누고 표현하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도 한 결과, 지금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물론 티격태격하는 건 당연히 있지만 중요한 건 서로를 믿고 감정을 나눈다는 것이다.


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국내 최초 온라인 부부 멘탈 케어 플랫폼 '신디 Sindy'를 운영하면서 저자가 쓴 이 책의 초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저는 감히 우리가 결혼을 공부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나는 이 문장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무작정 참고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부부 관계도 분명 존재한다. 만나지 말아야 하는 배우자의 조건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오래 끝까지 행복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결혼을 공부함으로써 관계가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말로 공감한다.


첫 페이지 목차만 살펴봐도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 책 속에는 꽤 상세한 분류를 통해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 지식들이 담겨 있다. 결혼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결혼의 시작과 조건, 갈등과 정서를 다루는 법, 애착 유형, 서로의 상처를 다루는 소통법, 결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다룬다. 특히 내가 재밌게 읽은 부분은 우리가 믿는 결혼에 대한 신화 (=환상)와 오해를 다룬 부분, 애착 시스템, 부모와 현명하게 거리 두는 법, 부부가 각자 느끼는 사랑의 언어를 다룬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나'를 제대로 아는 것


내 친구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연애를 하면서 내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연애도 마찬가지지만 결혼은 조금 더 가까이 결속된 관계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면들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결국 결혼 과정에서도,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성장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성격과 사고 패턴, 애착 유형과 같은 것들이 '어려운 상황에 닥칠 때'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그리고 배우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고 다시 어떻게 되돌려 받는지.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을 통해서 다시금 떠올리고 점검하게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티격태격하면서도 설레는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정말로 추천하고 싶어서 진심으로 이 글을 썼다. 


"상처 없는 사람 없고 갈등 없는 부부 없습니다. 상처와 불화야말로 결혼의 필수품이죠. 혼수나 예단은 생략할 수 있지만 상처와 불화는 생략할 수 없어요.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부부가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크루즈 여행까진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경치 정도는 구경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힘들게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 결혼은 그런 겁니다. (서문, 12쪽)"


상처도, 불화도 당연히 필수라고, 결혼은 그런 것이라고 솔직하게 전하는 작가의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부부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는 크고 작은 일이 언제든 다가올 것이다. 가끔가다 이 책의 내용들을 다시금 펼쳐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보다 성숙한 관계를 위하여 계속해서 노력해 보려 한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힘을 합쳐 불화라는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부가 한편이 되어 불화라는 공공의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불화를 겪는 부부들이 빠져들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잘못된 상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내 배우자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 높았다면, 돈이 더 많았다면 나는 정말 더 행복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건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착각일 뿐이에요. - P108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이에 따른 정서 반응을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서 반응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강력한 신호거든요. 지속적으로 그런 정서와 느낌을 받는다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정서 반응에 짓눌려 살지 말고 이를 삶에 이용하는 겁니다. 좀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정서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삶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정서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때 부부 불화를 한결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 P127

여러분은 배우자와 서로 이런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있나요?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이런 든든한 땅이 되어주고 있나요? "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 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입니다. 이 대사에 애착이론을 적용해보면 큰 사랑은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불안과 외로움은 바로 이 안전기지가 되어줄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 P145

강하게 결합된 커플일수록 서로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과 결혼이 나를 구속하고 내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건강하게 의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P171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언어로 상대에게 이야기하고 있나요? 부부가 가진 사랑의 언어가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와, 역시 맛있네! 당신 요리가 최고야."

남편의 칭찬에 아내는 이렇게 말하죠.

"맘에도 없는 립 서비스는 됐고, 고마우면 이따 빨래나 해."

‘인정하는 말‘이 사랑의 언어인 남편은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봉사‘가 사랑의 언어인 아내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함으로써 남편의 접근을 차단하는 일이 반복되면 남편은 점점 사랑의 언어를 표현하기를 꺼리게 됩니다. 결국 서로 친밀감을 쌓는 길은 요원해지죠. 누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사랑의 언어가 다른 것뿐입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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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겨울 헤세 4계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마인드큐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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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스승, 헤르만 헤세

 

이제는 책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제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는 가벼운 책들이나 만화책만 슉슉 넘기며 읽곤 했었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렇게 책을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대학 초년생 때 갑자기 삘받은 듯이 문학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준 '첫'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어요. 청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가 '헤르만 헤세'. 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수레바퀴 아래서」를 시작으로 헤세의 문학 세계에 빠져 홀린 듯이 책을 읽게 되었죠.


어쩌면 지금 읽는다면 그때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으로 읽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헤세의 책이 굉장히 무겁고 비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도 저에겐 감사하고 소중한 작가입니다. 정말이지, 청춘의 길목에서 읽는 헤세의 글들은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어요. 잠겨 죽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아요.


 

 


소설, 그리고 시, 에세이, 그림까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데미안>이 바로 떠오를 거예요. 하지만 헤세의 삶 속에는 수많은 시와 에세이, 그림도 있었답니다. 저는 헤세의 그림을 정말 좋아했어요. 약간은 바랜듯하면서도 따뜻한 색감의 풍경화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시인이 되든가,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6쪽, 추천의 말 _ 이인웅)" 라고 스스로 고백했던 헤세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시를 잔뜩 써내기도 했어요.


「헤르만 헤세, 겨울」은 헤세의 수많은 시와 에세이 중 '겨울'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헤세 4계 시리즈' 중 '겨울' 편인데요.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헤세의 소설이 아닌 글들을 오랜만에 다시 가볍게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겨울의 감성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책을 읽다 보니 한 작가의 글을 계절과 관련하여 엮어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많은 분량의 글이 있어야 하고, 작가 스스로가 계절과 자연에 대하여 심취한 글들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흘러가는 계절과 시간과 삶의 은유


역시나 헤세의 글들은 너무나 좋았답니다. 직접적으로 '겨울'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삶의 끝자락, 또는 죽음, 시간과 후회에 대한 은유나 사유로 채워진 글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잔잔한 풍경 속 눈발이 잘게 요동치는 묘한 분위기의 글도 만났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 짙게 느껴지는 글은 긴 여운을 남겨 주었어요. 특히나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헤세의 시가 눈에 많이 띄었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도감 있게 읽다가 갑자기 오탈자가 눈에 띄게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독일어 번역 자체가 조금 엄숙하고 긴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오탈자는 조금 수정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읽다 보니 익숙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더라구요. '크눌프', '골드문트', '클링조어' 등, 3인칭으로 등장인물 이름이 등장하길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다른 에세이를 쓴 것이 있나 봤더니 소설 작품의 대목을 발췌한 부분도 여럿 보였어요. 너무 짜깁기를 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도 계절의 맞는 헤세의 글들을 그 방대한 소설 속에서 퍼올린 것도 엄청난 수고로움이셨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이 책은 헤세의 문학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헤세를 읽어보고 싶은데 소설은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맛보기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팬심으로 읽게 된다면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차가운 안개가 낀 잿빛 날들>

"그럼 더 한탄할 것은 없는가?" 신의 음성이 물었다.

"더 이상 없습니다." 크눌프는 머리를 끄덕이며 부끄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자연스레 되었는가?"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습니다." - P31

<잿빛 겨울날>

중요하다고 떠벌리는 그 모든

요란함이 그는 우습다.

겨울날은 혼자 하염없이 조금씩 눈을 뿌린다,

어두워질 때까지. - P44

<성탄절 이후에>

행복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즉, 매혹적인 순간이 오지만, 그 찬란함 속에서 곧 다시 창백해져,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숨결에 흩날려 버린다. 숭고한 예술도, 선택된 사람들의 고귀한 지혜도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즉 그것은 심연에 대해 알고 있는 미소, 고뇌에 대한 인정, 대립하는 것들 간의 영원한 필사적 투쟁 너머의 조화로운 유희인 것이다. - P110

<겨울날의 경이로움>

넓은 세상에서 겨울에 고산 위에 내리비치는 햇빛보다 더 경이롭고,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눈과 얼음, 그리고 돌 위에 반사된 빛과 온기는 형용할 수 없이 투명한 겨울의 맑은 대기 속에서 유희에 탐닉한다. ― 저지대에서는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날에도 예감조차 할 수 없는 빛과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 건조한 온기가 펼치는 유희인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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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손잡기 봄날의 시집
권누리 지음 / 봄날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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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두 얼굴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극적인 것은 싫어서 잔잔한 계절을 찾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여름, 하고 입에 굴려보기로 한다. 여름,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눈부신 추억들이 떠오른다. 찌는듯한 더위의 길을 걷다가 모든 것이 씻겨내려가는 물줄기가 확 뿌려지는 것처럼. 스무 살 때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너무 더워서 분수대에 그냥 뛰어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의 깔깔대던 웃음은 여름이라는 말과 닮았다.

권누리 시인의 시집 「한여름 손잡기」의 표지를 보고 거의 말을 잇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이렇게 예쁜 표지가 있나? 이렇게 제목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있을까? 멀리서 언뜻 보면 은은한 그라데이션으로 색상만 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다양한 것이 보인다. 여름의 싱그러움과 뿌연 뜨거움이 함께 있다. 잔해처럼 뿌려진 물줄기는 내가 여름을 입에 굴렸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나는 잠깐 표지에 잠겼다가 시를 천천히 읽었다.



여름은 시 속에서 계속해서 언급이 되고, 여름이 들어가는 시는 특히나 더 좋았고, 시인이 쌓아 올린 여름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한낮에는 눈부시게 밝고, 저녁이 되면 모두 캄캄해지는 않은 채 어스름하게 바래지는 여름. 한없이 가볍다가도 물이 내리면 다른 계절보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여름. 어쩌면 사랑과 여름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밝음과 어둠 속에서


시인의 언어는 잔잔히 박동하는 듯하면서도 가끔은 어두운 질문들을 던지고, 나는 그 지점들에 멈춰서 생각한다. 오답과 죽음, 불신과 고립... 글의 초반 눈부신 여름의 추억을 상기했지만 시집에서는 꽤나 어두운 시어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아주 깊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시를 좋아하게 된 건 시인이 만든 공백으로 ‘열려 있는’ 느낌이 좋아서였는데, 사실 시집 한 편을 읽으면서 모든 행간에 집중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읽기는 조금 버겁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긴 호흡을 다시금 할 수 있게 하는 건 무심코 읽다가 만나는 이런 멋진 문장들 같은 것.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 가 좋았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표지를 닮은 시인의 색채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어서였다. 한 쪽은 영롱하게 빛나고 한쪽은 바래진 채로 구르는 물방울 같은 시집이었다.


<하트*어택>

미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

- P15

<한여름 손잡기>

여름이 여름이 아니었더라면.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했고,

그래서 지난여름 내내 그것만 열심히 했다네요 - P79

<도로시 커버리지>

목적지를 위한 결정은 저 멀리 유리 숲에 유기해두었어요

버려두고 온 단단한 마음이 여기에서도 아주 잘 보이고요.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오답을 어떻게 아니?

- P47

<한철>

죽음이 태어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어 그것의 총량을 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 있어요?



사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66

<소유>

끝에서부터 쓰러지고 있는 나의 중간을 재빠르게 쳐내는 일 그거 필요해요.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오래 세워두었네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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