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의 존재가 갑자기 큰 폭풍처럼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변하긴 하지만 - 엄마에 대한 마음은 조금 더 각별하다.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있다. 작아졌다가 조금 커졌다가 몽글몽글하기도 하면서 옆에 서 있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온갖 세상 살이를 견뎌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도 엄마 앞에선 한순간 어린아이로 머무르고 싶다. 엄마 앞에서라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 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엄마가 아팠다. 웬만한 일도 고통도 꾹 참던 엄마가 진심으로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드는 감정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훅,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솔직해진 엄마가 사랑스러웠다. 아픈 걸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엄마가 나보다 더 약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아주 가깝게 인식하게 되었다.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지 않은 건 쓰지 않는다'라는 철칙으로 자전적 소설을 꾸준히 써냈다. 생생하게 경험한 글감이 상상을 해서 만든 것보다 더욱 풍부한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자전적' 요소가 들어간 글은 자신의 내부와 치부를 모두 드러내며 감수한다는 뜻이다. 솔직함, 용감함, 과감함.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 작가의 강점은 이것뿐만은 아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책은 「부끄러움」이었고 이번에 읽은 「한 여자」는 두 번째 책이다. 분량이 꽤 짧은데도 나는 밑줄을 정말 많이 그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하여, 그에게 남은 어머니에 대한 흔적 - 사진, 혹은 기억 - 을 통하여 어머니의 자서전을 써 내려간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다른 모습의 실루엣들이 겹쳐진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때로는 증오하며, 아름답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

내 마음과 겹쳐지는 순간

"처음에는 내가 글을 빨리 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마치 어머니에 관한 진실 - 그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 을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순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단어들을 고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대해 궁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게는 그러한 순서의 발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50쪽)

작가 '아니 에르노'가 책 속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장을 쓸 때 꽤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 같았다. 또한 독자인 나도 글을 읽는 내내 크게 다가오는 문장들에서 엄마를 향한 생각과 마음이 겹쳐지는 순간 조금 멈칫하곤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둘을 이어 보았다. 다시 한번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훌쩍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차츰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인 이달 초에 그랬듯, 날이 춥고 비가 오면 여전히 만족스러움.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래 봐야 소용없구나> 혹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구나>(어머니를 위한 이런저런 일)를 확인할 때마다 밀려드는 공허한 순간들. 어머니가 보지 못할 첫 번째 봄이라는 생각이 자아내는 빈틈. (이제는 평범한 문장들, 심지어 진부한 표현들에 담긴 힘이 느껴짐.) - P20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여자, 며칠 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 P22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 - P23

사진 속 얼굴들이 움직인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아무리 오랜 시간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내 눈에 보이는 건 그저 1920년대 영화 속 의상을 빌려 입은 듯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웬 아가씨뿐이다. 장갑을 쥐고 있는 넓적한 손과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자세만이 그것이 내 어머니라고 말해 준다. - P42

두 달 전, 종이 위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쓰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고, 심지어 만약 그 문장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읽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병원과 노인 요양원이 위치한 구역으로 가는 것이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들이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 P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