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손잡기 봄날의 시집
권누리 지음 / 봄날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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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두 얼굴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극적인 것은 싫어서 잔잔한 계절을 찾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여름, 하고 입에 굴려보기로 한다. 여름,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눈부신 추억들이 떠오른다. 찌는듯한 더위의 길을 걷다가 모든 것이 씻겨내려가는 물줄기가 확 뿌려지는 것처럼. 스무 살 때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너무 더워서 분수대에 그냥 뛰어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의 깔깔대던 웃음은 여름이라는 말과 닮았다.

권누리 시인의 시집 「한여름 손잡기」의 표지를 보고 거의 말을 잇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이렇게 예쁜 표지가 있나? 이렇게 제목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있을까? 멀리서 언뜻 보면 은은한 그라데이션으로 색상만 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다양한 것이 보인다. 여름의 싱그러움과 뿌연 뜨거움이 함께 있다. 잔해처럼 뿌려진 물줄기는 내가 여름을 입에 굴렸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나는 잠깐 표지에 잠겼다가 시를 천천히 읽었다.



여름은 시 속에서 계속해서 언급이 되고, 여름이 들어가는 시는 특히나 더 좋았고, 시인이 쌓아 올린 여름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한낮에는 눈부시게 밝고, 저녁이 되면 모두 캄캄해지는 않은 채 어스름하게 바래지는 여름. 한없이 가볍다가도 물이 내리면 다른 계절보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여름. 어쩌면 사랑과 여름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밝음과 어둠 속에서


시인의 언어는 잔잔히 박동하는 듯하면서도 가끔은 어두운 질문들을 던지고, 나는 그 지점들에 멈춰서 생각한다. 오답과 죽음, 불신과 고립... 글의 초반 눈부신 여름의 추억을 상기했지만 시집에서는 꽤나 어두운 시어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아주 깊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시를 좋아하게 된 건 시인이 만든 공백으로 ‘열려 있는’ 느낌이 좋아서였는데, 사실 시집 한 편을 읽으면서 모든 행간에 집중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읽기는 조금 버겁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긴 호흡을 다시금 할 수 있게 하는 건 무심코 읽다가 만나는 이런 멋진 문장들 같은 것.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 가 좋았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표지를 닮은 시인의 색채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어서였다. 한 쪽은 영롱하게 빛나고 한쪽은 바래진 채로 구르는 물방울 같은 시집이었다.


<하트*어택>

미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

- P15

<한여름 손잡기>

여름이 여름이 아니었더라면.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했고,

그래서 지난여름 내내 그것만 열심히 했다네요 - P79

<도로시 커버리지>

목적지를 위한 결정은 저 멀리 유리 숲에 유기해두었어요

버려두고 온 단단한 마음이 여기에서도 아주 잘 보이고요.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오답을 어떻게 아니?

- P47

<한철>

죽음이 태어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어 그것의 총량을 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 있어요?



사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66

<소유>

끝에서부터 쓰러지고 있는 나의 중간을 재빠르게 쳐내는 일 그거 필요해요.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오래 세워두었네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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