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겨울 헤세 4계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마인드큐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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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스승, 헤르만 헤세

 

이제는 책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제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는 가벼운 책들이나 만화책만 슉슉 넘기며 읽곤 했었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렇게 책을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대학 초년생 때 갑자기 삘받은 듯이 문학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준 '첫'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어요. 청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가 '헤르만 헤세'. 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수레바퀴 아래서」를 시작으로 헤세의 문학 세계에 빠져 홀린 듯이 책을 읽게 되었죠.


어쩌면 지금 읽는다면 그때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으로 읽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헤세의 책이 굉장히 무겁고 비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도 저에겐 감사하고 소중한 작가입니다. 정말이지, 청춘의 길목에서 읽는 헤세의 글들은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어요. 잠겨 죽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아요.


 

 


소설, 그리고 시, 에세이, 그림까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데미안>이 바로 떠오를 거예요. 하지만 헤세의 삶 속에는 수많은 시와 에세이, 그림도 있었답니다. 저는 헤세의 그림을 정말 좋아했어요. 약간은 바랜듯하면서도 따뜻한 색감의 풍경화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시인이 되든가,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6쪽, 추천의 말 _ 이인웅)" 라고 스스로 고백했던 헤세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시를 잔뜩 써내기도 했어요.


「헤르만 헤세, 겨울」은 헤세의 수많은 시와 에세이 중 '겨울'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헤세 4계 시리즈' 중 '겨울' 편인데요.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헤세의 소설이 아닌 글들을 오랜만에 다시 가볍게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겨울의 감성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책을 읽다 보니 한 작가의 글을 계절과 관련하여 엮어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많은 분량의 글이 있어야 하고, 작가 스스로가 계절과 자연에 대하여 심취한 글들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흘러가는 계절과 시간과 삶의 은유


역시나 헤세의 글들은 너무나 좋았답니다. 직접적으로 '겨울'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삶의 끝자락, 또는 죽음, 시간과 후회에 대한 은유나 사유로 채워진 글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잔잔한 풍경 속 눈발이 잘게 요동치는 묘한 분위기의 글도 만났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 짙게 느껴지는 글은 긴 여운을 남겨 주었어요. 특히나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헤세의 시가 눈에 많이 띄었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도감 있게 읽다가 갑자기 오탈자가 눈에 띄게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독일어 번역 자체가 조금 엄숙하고 긴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오탈자는 조금 수정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읽다 보니 익숙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더라구요. '크눌프', '골드문트', '클링조어' 등, 3인칭으로 등장인물 이름이 등장하길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다른 에세이를 쓴 것이 있나 봤더니 소설 작품의 대목을 발췌한 부분도 여럿 보였어요. 너무 짜깁기를 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도 계절의 맞는 헤세의 글들을 그 방대한 소설 속에서 퍼올린 것도 엄청난 수고로움이셨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이 책은 헤세의 문학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헤세를 읽어보고 싶은데 소설은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맛보기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팬심으로 읽게 된다면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차가운 안개가 낀 잿빛 날들>

"그럼 더 한탄할 것은 없는가?" 신의 음성이 물었다.

"더 이상 없습니다." 크눌프는 머리를 끄덕이며 부끄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자연스레 되었는가?"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습니다." - P31

<잿빛 겨울날>

중요하다고 떠벌리는 그 모든

요란함이 그는 우습다.

겨울날은 혼자 하염없이 조금씩 눈을 뿌린다,

어두워질 때까지. - P44

<성탄절 이후에>

행복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즉, 매혹적인 순간이 오지만, 그 찬란함 속에서 곧 다시 창백해져,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숨결에 흩날려 버린다. 숭고한 예술도, 선택된 사람들의 고귀한 지혜도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즉 그것은 심연에 대해 알고 있는 미소, 고뇌에 대한 인정, 대립하는 것들 간의 영원한 필사적 투쟁 너머의 조화로운 유희인 것이다. - P110

<겨울날의 경이로움>

넓은 세상에서 겨울에 고산 위에 내리비치는 햇빛보다 더 경이롭고,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눈과 얼음, 그리고 돌 위에 반사된 빛과 온기는 형용할 수 없이 투명한 겨울의 맑은 대기 속에서 유희에 탐닉한다. ― 저지대에서는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날에도 예감조차 할 수 없는 빛과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 건조한 온기가 펼치는 유희인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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