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출산에서 어떻게 소외되는가 - 우리가 몰랐던 출산 이야기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7
전가일 지음 / 스리체어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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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기 전 출산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얄팍한 성교육으로만 접했던 간단한 사실들뿐이었다. 되돌려 생각해보니 우리는 학교에서 임신과 출산에 대해 세세하고 정확하게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세포가 어떻게 아기가 되고, 아기가 어떻게 자라는지에 관해서는 열심히 배운 기억이 있는데 출산의 과정에 관련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미비했다. 아기가 엄마의 몸속에서 거의 빠져나올 때쯤 의사가 회음부 절개를 한다는 것도, 출산 후 한 달까지도 ‘오로’라 불리는 분비물을 배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제왕절개 출산도 엄청난 고통이 있다는 사실도 성인이 돼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임신과 출산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그러니 무지한 비경험자인 나로서는 이 제목을 보고 의아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출산은 분명히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소외받는다는 것인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또 어떤 식으로 여성의 인권이 뭉개지고 있는 것인가.

 

알고 보니 책은 의료화된 출산의 문제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자는 세 아이를 출산할 당시 모두 조산 ― 요즘 흔히들 이른둥이라 부르는 ― 이 되었고, 날짜를 꽉 채운 일반적인 출산보다 더욱 긴장되고 다급한 순간들 속에서 의료화된 출산의 폐해를 경험했다. 그는 출산 당시 생생한 감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화적 내러티브’ 형식으로 책을 기술했고, 다양한 방식을 비교하기 위하여 지인과의 인터뷰도 수록했다.

 

저자는 처치실에서 홀로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었던 두려움의 시간을 회고하며, 지극히 의료화된 출산의 과정에서 느꼈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다양한 문제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출산을 하는 산모의 ‘주도권’은 없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출산하는 것이 ‘당연하고 일반적이고 정상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대의 출산 과정에서, 산모는 아기를 품고 있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빠르게 아이를 빼내야 하는 ‘환자’가 된다. 아기가 나오기 좋은 자세보다는 의사가 처치하기 좋은 자세로 오랜 진통을 견뎌야 한다. 의학적인 지식 앞에서 어떠한 질문과 협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빠르고 신속한 출산을 위해 원하지 않는 의료적 처치를 감내해야 하고, 때로는 조금만 기다리면 아이가 나올 수 있는 상황에도 의료진 입장에서 ‘비교적 간편한’ 제왕절개 수술을 시행하기도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이러한 문제점 속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산모의 두려움을 볼모로 하고 있다(67쪽)’는 것이다.

 

“여성이 출산 과정에서 자기 몸의 주인이자 출산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비로소 “분만을 당하는 delivery” 것이 아니라 “출산을 하는 give birth to” 것이 될 수 있다. (106쪽)”

 

아울러 각자의 상황 속에서 다른 방식의 출산을 경험한 세 여자의 대담이 이루어지는데 이 부분도 굉장히 흥미롭다. 외국의 출산’과 ‘자연주의 출산’이라는 다양한 출산 경험을 전해줌과 동시에, 성숙한 토론을 통해 한국의 출산 의료화와 임산부의 소외 문제에 관하여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의학이라는 학문의 지향점과 의료계의 현실,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의료 시스템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며, 무엇보다 ‘출산’ 자체를 받아들이는 임산부의 자각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감정적인 배려가 어려운 의료 시스템 하에서도, 인간적으로 배려해주던 의료진도 있었다며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책의 분량 내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생각들을 꺼내놓으며, 의료화 출산을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조금 더 실질적인 시스템을 위해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 모든 것이 단번에 바뀌긴 힘들지라도 다양한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 자체로 선택의 여지가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이 책을 포함하여 많은 정보를 접하고 대비하며, 어떠한 두려운 상황에서도 최대한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바란다.

 

 

● 52쪽,
그들 모두에게 나는 지극히 도구화된 대상이었다. 활짝 깬 의식으로 떨고 누워 있는 나를 직접 소독하면서도 옆에 있는 동료에게 내 배에 대해 묻고 있는 그 인턴에게 나는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 여성, 인간, 현존재가 아니라 아기를 담고 있는 배 그 자체였다. 나의 신체는 그들에게 배로 환원되고 있었다.

● 90쪽,
출산 시의 여러 가지 변수와 복잡한 분만 상황에서 제왕절개술이란 의료진에게 통제가 용이한 방법이다. 즉, 의료화 출산 과정에서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편리’하고 ‘깔끔’한 분만을 위해 수술이 선호될 수 있다. 특히, 류정미는 대부분의 제왕절개 수술은 산모나 아기에게 위험하고 꼭 필요해서 행해진 의료적 처치이기보다는, 기다리면 자연 출산을 할 수 있었던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102쪽,
그러나 그러한 배경과 구조적인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협의 가능성이 희박한 한국의 병원 출산 문화는 출산권을 위협하는 매우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의료진이 산모인 여성들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터부시하는 것은 일종의 전문가적 폭력이다. 이러한 의료진의 태도는 훈련받은 의료적 지식만을 과학적이고 ‘귀한’ 유산이라고 여기는 지식의 배타적 권력화의 산물이다.

● 109쪽, (면담 중에서)
안타가운 게, 우리는 보통 의사를 사람으로 잘 안 봐요. 한국 사람들 인식에 의사는 신이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능력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바라는 의사는 모든 걸 해결해 주고 포용해야 하는 존재인 건데, 의사도 사람이잖아요. 우리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길 원하면서, 과연 의사는 인간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지점은 좀 의문이에요. 의사의 근무 환경은 되게 비인간적이에요. 그리고 그 자리에 오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였는데, 정작 우리가 내는 비용은 그에 비하면 되게 적죠. 저는 이 부분도 같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131쪽,
의료화 출산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이 곧바로 탈의료화로 이어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의료화 출산의 문제는 곧 의료 권력화에 대한 문제 제기인데, 이것을 곧바로 탈의료화로 귀결하는 것은 비약이다. 탈의료화가 여성에게 더 큰 자유를 줄 것이라는 전제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자칫하면 탈의료화가 의료적 시선을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더 많이 침투시키면서 기존에는 의료 시스템이 고려하지 않았던 더 많은 영역을 의료화하는 역습을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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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느 독일인의 삶 - 괴벨스 비서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브룬힐데 폼젤 지음, 토레 D. 한젠 엮음, 박종대 옮김 / 사람의집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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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 있었는데 난민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SNS에 난민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해외에서 일어난 일부 난민들의 폭행, 강간 사건을 다룬 기사와 사진이 뜨고, ‘이슬람이 국가를 정복해나가는 과정’ 등의 정보를 무분별하게 긁어모았다. 최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다 보니 제주도에 여성 실종자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려 화가 났다. 어느새 머릿속엔 ‘난민 = IS’라는 정보가 입력되었다. 걱정은 거의 병적으로 커졌다. ‘난민이 무서워’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사실 IS와 관련한 공포와 거부감은 당연한 일인데, 이번 난민의 문제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언론 보도와 난민 분별을 도맡아 하는 관리들에 대한 불신, 이방인을 향한 불안감에서 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려운 동시에 스스로가 무서워지기도 했다. 어느 쪽도 아닌, 갈팡질팡하는 중도라는 이름으로 나는 은연중에 차별과 배척을 하고 있진 않을까.

 

과거 독일인의 삶을 다룬 이 책에서 느닷없이 난민 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이 책이 독일 내에서 출간될 당시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국민들의 불안감과 극우파들의 반대, 난민 테러가 격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정치학자 ‘토레 D. 한젠’은 이러한 모습이 마치 나치의 집단적 애국주의와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증가, 난민들에 대한 공격, 시리아 전쟁 같은 최악의 상황에도 젊은 세대의 상당수는 마비되어 있거나, 좌절과 체념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정치나 사회 문제에서 관심을 돌린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문제를 대응하는 현 세대의 모습에서 이 책의 주인공 ‘브룬힐데 폼젤’의 일부를 목격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브룬힐데 폼젤은 나치가 국가를 장악하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면에서 국민을 선동하던 ‘괴벨스’의 비서다.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겪었지만 그래도 형편이 나았던 동네에 살았던 폼젤은 엄격한 가정에서 순종과 무지를 배웠다. 오로지 부와 출세를 원했던 폼젤은 오전에 유대인 골트베르크 씨 사무실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나치당원 불프 블라이 밑에서 일하게 된다. 그 무렵 독일 사회의 불안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경제적으로 결핍되어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폼젤은 다양한 인맥을 접하면서 결국 나치의 핵심 인물인 괴벨스를 만난다.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된 폼젤은 ‘모든 게 선택받은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폼젤의 인터뷰에서 독자는 그의 증언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나치의 고위 관직이었던 괴벨스의 밑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모든 걸 알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는 유대인들을 가스로 대량 학살한 샤워기 밑에서 샤워를 하며, 그들이 그렇게 학살 당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유대인을 향한 반감도 없었고, 유대인 친구도 있었고, 단지 ‘이리저리 출렁이는 바다와 같은 민족’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오로지 의무감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일을 했고, 의지와는 무관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근시안적이고 무관심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듯하면서도, 정당화와 합리화로 회피하거나 당시 나치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노력을 평가절하시키기도 한다.

 

“나는 늘 타인들을 조심하면서 살아 왔는데,그러는 나는 내 속의 보통 사람입니다. 그 보통 사람 속에는 군대 전체의 배반과 폭력을 조장하기에 충분한 관성적 부조리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다들 얼마씩 품고 있는 폼젤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 잡지 <VICE> 파울 가르불스키 (엮은이의 말 중에서)

 

역사의 가해자 편에 섰던 브룬힐데 폼젤의 진술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폼젤의 일부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치즘이 국가를 장악했던 이유를 단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 대한 수동적 태도와 무관심, 소비 지상주의와 이기주의 등 모든 복합적인 요인이 모여 벌어질 일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거의 한 세기 전 과거 독일의 상황,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은 완전히 다르고 시대에 맞는 대응책은 늘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폼젤의 삶과 증언, 그것을 바라보는 독일인의 반성적 태도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멀리 떨어진 땅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일부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이 땅으로 밀려들어 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

 

 

 

우리는 사실 별 걱정 없이 즐겁게 사는 편이었어요.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죠. 모든 사람이 잘 벌었어요.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했지만, 자잘한 것들은 별 어려움 없이 구입할 형편이 됐고 우리끼리 만족하며 살았어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늘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생각해 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매일 하고 살겠어요? 요즘 바다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는 불쌍한 시리아 난민들도 우리가 불쌍하게 여기지만 매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살 수는 없죠. 다만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르죠. 어떻게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될 수 있느냐는 거죠.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당시엔 그런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저 난 항상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줬어요. 그만큼 성실하게 잘했고, 항상 정확했어요. 어떤 자리에 있건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했어요.

사실 그런 격동의 시절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혹시 나는 이런 이유에서 이렇게 했고, 저런 이유에서 저렇게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몰라도요. 우리는 그저 시대에 끌려다녔을 뿐이에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치 시절에 강제 수용소가 있었다는 건 나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거기서 사람들을 독가스로 죽여 불태운 건 전혀 알지 못했어요. 나 자신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런 가스가 나왔던 샤워기 아래 서 있었다는 상상을 하면…… 같은 곳에서 샤워를 했다는 상상을 하면 …… 그래요, 나는 목욕탕 건물에 들어가면 옷을 벗어 47번 갈고리에 걸어뒀어요. 내 고유 번호였죠.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옷은 빨아 다른 방에 걸어 뒀어요. 같은 번호 밑에요. 그러면 나중에 그걸 다시 찾을 수 있었죠. 그 사이 나는 15분 정도 타일이 깔린 커다란 목욕탕에서 샤워를 했어요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책임에 대한 문제만큼은 스스로 답을 일찍 찾았어요. 그래요, 난 책임이 없어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대체 뭣에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요,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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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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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와중에도 인터넷 뉴스 기사란은 시끄러웠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은 거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어제도,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에도, 많은 사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리벤지 포르노, 불법 유출, 소설 속 내용과 거의 비슷한 정치인 스캔들까지. 이제는 단순히 ‘민감한 사안’이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샌가 여성 혐오는 일상에 스며들었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물을 흐리고 꼬투리를 잡고 무조건 ‘까고 보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무조건 여자들의 이름이었다. ‘ㅇㅇㅇ 동영상’, ‘ㅇㅇㅇ 유출 사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며 혈안이 되는사람들, “자기가 원해서 했는데 왜 난리”냐고 묻는, 사건의 본질을 잊은 무식한 댓글들 투성이었다.

 

<비바, 제인>은 구설수에 휘말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여성을 응원하는 소설이다. 남성 정치인과 여성 인턴의 스캔들을 축으로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꼬집는다. 옷차림과 행실을 이유로 여성에게만 폭력적인 말을 던지는 ‘슬럿 셰이밍’, 분명 ‘둘의 스캔들’인데 남자는 승승장구하고 여자는 이름까지 바꾸고 숨어버려야 하는 현실,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2차 가해’, 여자들이 평생 동안 매달려야만 하는 외모 강박과 스트레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논점들이 가득하다.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말해도 충분할 만큼 꼼꼼하게 쓰인 책이면서도 소설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활용하여 다섯 개의 챕터로 소설이 진행된다. 화자에 맞추어 글의 성격이 달라지고, 주인공의 딸 ‘루비’의 시점에선 통통 튀는 십 대의 유쾌함도 함께 담긴다 (이 부분에서 특히 번역가님의 탁월한 센스가 느껴진다!). 각기 다른 시점의 글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우리는 마침내 마지막 챕터인 ‘아비바’에 닿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마지막 챕터의 글에서 칭하는 ‘당신’이라는 말은 아비바와 제인, 레이첼, 루비, 엠베스, 그리고 세상에 맞서 일어서기를 원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향한다. 어느새 제목처럼 “비바, 제인!”을 외치게 된다.

 

작가의 글 솜씨와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엔 꺼림칙하거나 슬프거나 좌절감과 허무함 같은 감정들만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트 있고 여유롭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설명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고 분노를 내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칭찬 일색이었던 작가의 전작 <섬에 있는 서점>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진다.

 

 

● 111쪽,
아무튼, 나는 애한테 컴플렉스를 심어주게 될까봐 몸무게에 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 내가 루비 나이였을 때 비만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귀가 닳도록 내 체중 얘기를 하고 또 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래, 나는 내가 몇 가지 컴플렉스의 당당한 보유자임을 밝히는 바이다. 하지만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기후와 풍토에 대응해 지어진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 156쪽,
"종종 결혼식이 트로이의 목마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결혼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내가 열심히 팔고 다니는 꿈. 그들은 딴 사람들과 차별화 하겠다며 이런 것들을 선택해요. 되도록 평범해지지 않겠다며 이런 것들을 선택하죠. 하지만 결혼하기로 선택한 것보다 더 평범한 게 세상에 어딨어요?"

● 181쪽,
그러자 우리 엄마는 사람들이 공직에 출마하면 이따금 ‘지저분하고 진실이 아닌 일들‘이 들리고, 나는 엄마에 대해 들리는 ‘지저분하고 진실이 아닌 일들‘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대. 엄마가 말하길 나는 (1) 그것들을 무시해야 하고, (2)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더군. 내가 "내가 (1)을 하면 (2)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라니까 엄마는 "루비, 엄마는 심각해"라길래, 내가 "엄마, 난 강인해"라고 했지. 난 강인해. 내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학교에서 난 ‘별로 인기 없는 아이거든. ‘별로 인기 없다‘는 건 ‘점심때 아무도 내 옆에 앉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 358쪽,
당신의 수치를 찾아내는 건 클릭 한 번이면 족하다. 다른 사람의 수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하나 나아지는 건 없다. 고등학교 때 당신은 『주홍글씨』를 읽었고, 인터넷이 바로 그런 거로군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초반부에 보면 헤스터 프린이 오후 한나절 마을 광장에 강제로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서너 시간쯤 서 있어야 했나. 얼마가 됐든,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당신은 그 광장에 영원히 서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선택지를 고민한다. 선택지가 없다.

● 388쪽,
"시장?" 엄마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안도감이 묻어나며, 경외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엄마 목소리는 마치 반딧불이가 한여름 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비바 그로스먼! 그딴 것쯤이야!" "못 이길지도 몰라요." 당신이 말한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알아냈거든. 시간문제일 뿐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해명했어? 네 입장에서 할말을 했어?"
"항변할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일들이었는걸. 내가 했던 이들이고."
"네가 뭘 했길래? 그건 섹스였어. 그 남자는 케케묵은 아저씨였지. 넌 애였고. 나리시케이트 (‘어리석은 짓’을 뜻하는 이디시어) 한 바가지였다. 플로리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기들처럼 앵앵거렸지."
"그렇다 해도."
"루비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가 말한다. "넌 거기 있어야지. 싸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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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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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작가의 다른 소설 <달콤한 노래>를 읽고 받은 충격과 놀라움을 기억한다. 간결한 문체, 현실적인 스토리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던 날카로운 장면들. 그때의 충격은 작가의 데뷔작인 <그녀, 아델>을 통해 되살아난다. 이 책에선 강렬하게 두드러지지 않고 은은한 느낌의 제목으로는 다 상상할 수가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원제가 <식인귀의 정원>이라 하면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을까. 물론 ‘식인귀의 정원’은 소설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이고, 살인이나 끔찍한 장면이 등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초반부터 독자는 어떤 불안과 충격, 곧 다가올 불안을 감지한다.

 

주인공 ‘아델’은 님포매니악, 색정증을 앓고 있다.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다. 임신으로 망가진 몸, 의무감과 무감각으로 대하는 남편과의 관계, 육아 스트레스가 드러나지만, 불륜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아델의 성생활은 단지 습관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정도다. 본능과 충동에 이끌린다. 비이성적이며 갈수록 폭력적이고 불순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진다. 마치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그것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아델의 병적인 행동은 더욱 심해져만 가고 부부생활에도 균열이 인다. 그가 이러한 지경까지 오게 된 연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소설 속 아델의 모습이 편히 다가오진 않는다. 때로는 심히 불쾌한 장면이나 이해할 수 없는 불륜이 드러나니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죄책감은 있을까, 하는 물음도 소용이 없으니 답답하다. “나에게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아델의 모습에 어떠한 말을 하겠는가.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그의 병은 화가 나면서도, 절망적이고 안타깝다. 그리고 아델을 끝까지 붙잡으려 하는 남편의 모습도 슬프기 그지없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아델의 행동에 면죄부를 부여하거나 어떤 누군가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고 그저 잔잔히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토록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슬픔이 일 정도로 그리기도 한다. 다소 충격적이고 불쾌하기까지 한 소설이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세상에 나온 수많은 문학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던가. 텍스트 속에서까지 욕망을 짓누르고 감추고 소극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을 떠올리면, 이런 캐릭터가 문학 속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여성의 삶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려내는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한다.

 

● 44쪽,
아델은 결혼한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이유로 아이를 낳았다. 세상에 귀속되어 타인들과 그 외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아델은 누구도 그녀로부터 제거할 수 없는 존중의 후광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고통의 저녁에 몸을 숨기고, 방탕의 나날에 기댈 곳이 되어줄 피난처를 스스로 만들어나갔다.

● 126쪽,
강박이 그녀를 잡아먹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거짓말을 구하는 그녀에게 삶은 그녀의 온 정신을 빼앗는 소모성 조직체일 뿐이다. 삶이 아델을 갉아먹는다. 거짓 출장을 만들어내고, 구실을 지어내고 호텔을 예약해야 한다. 괜찮은 호텔을 찾아내야 한다. 열 번씩이나 전화해 관리자의 확답을 받아내야 한다. "그럼요, 욕조가 있습니다. 아니요, 아주 조용한 방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설명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 167쪽,
에로티시즘은 모든 걸 위장해주었다. 사물의 평범함, 덧없음을 에로티시즘이 가려주었다. 여고생의 오후에, 생일파티에서, 아델의 가슴을 곁눈질하던 노총각 삼촌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가족 모임에 탄력을 준 것도 에로티시즘이었다. 에로티시즘의 추구가 모든 종류의 규율과 체계를 소멸시켰다. 우정, 야망, 일상적인 계획, 모든 게 에로티시즘 앞에서 무너졌다.



● 293쪽,
아델, 그게 끝이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끝나지 않아. 사랑은 인내일 뿐이야. 경건하고 열정적이며 폭군과도 같은 인내. 비이성적일 정도로 낙천적인 인내. 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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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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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 책에 대한 극찬이 계속해서 눈에 띄었다. 스토너, 스토너, 스토너, 문학을 사랑한다는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며 남긴 글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때로는 그런 물결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으려고 갈등하면서도, 때로는 주체할 수없이 쉽사리 휩쓸리곤 한다. <스토너>는 전자였다. 왜인지 모르게 무겁고 진지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나중을 기약하다가 이제야 읽었다. 생각지 못한 심플한 줄거리와 담백한 문체에 조금 놀랐다. 초반에는 계속 갸우뚱한 채로 읽어나갔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정말 특별할 것이 없다. 큰 줄기만 보면 가업을 이어 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하려던 ‘윌리엄 스토너’가 대학에 가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게 되어 영문학 교수가 되어 일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소설의 굴곡을 그려볼 만한 격한 갈등도, 비애도 없다. 인생을 뒤흔들 만한 선택이나 기쁨도 잔잔히 이루어진다. 곳곳에 작은 성공과 실패가 존재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딘가에 가까이 있을 듯한 사람의 일생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스토너의 이름이 도통 잊히지 않을까. 길게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선 도통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 스스로에게 줄기차게 되묻는 이 물음은, 그리고 이어지는 회고의 장면들은 가히 장엄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악착같이,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가는가. 얼마나 찬란한 인생을 만들려고 온갖 허무한 것들을 지니고 있는가. <스토너>의 담백한 물음 앞에 온갖 거창한 말들을 붙여가며 우리는 지나온 짧은 인생과 앞으로 거쳐갈 인생의 모습을 대입해본다. 그리곤 알게 된다. 누군가에겐 성공이거나 누군가에게 실패로 보일 ‘스토너’의 인생처럼, 우리 인생도 다를 바 없음을. 무언가에 몰두하고 집착하고, 작은 목표들을 이루고 때로는 이루지 못하여도 그것 또한 인생인 것을.

 

그런데 이렇게 소설을 풀어보고 나니 조금은 걸리는 부분이 있다. 작가가 목표한 대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잘 쓰인 소설이라 믿지만 함정도 존재한다. 스토너는 불륜을 자행하고, 소설 속 그의 시선 속에서 아내는 비정상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불륜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마치 <제인 에어>의 미치광이 ‘버사’ 부인을 떠올리게 했다.) 위에서 풀어낸 소설의 메시지에 따른다면, 그의 인생이 다수의 평범한 인생을 대변하는 데 있어 부정한 행동이 아무것도 아닌 일 또는 어쩔 수 없던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조금 조심스럽다. 불륜보다 심한 죄를 지은 사람의 인생도, 삶에 치열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조용히 머물러지게 되는 것인가 하는 우려 섞인 마음도 들고.

 

그러나 작가가 보기를 바랐던 건 나름의 삶을 묵묵하게 쌓아왔던 스토너의 모습들이었겠지. 약간의 껄끄러운 부분은 있지만 좋았던 장면들만 남겨놓고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지막 몇 페이지의 여운은 정말 압권이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그는 검은 가운과 학사모를 들고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무겁고 성가신 짐이었지만 가운과 학사모를 놓아둘 곳이 없었다. 그는 부모에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결정을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결정을 무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경솔하게 선택한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이 버린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부모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 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다시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 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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