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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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작가의 다른 소설 <달콤한 노래>를 읽고 받은 충격과 놀라움을 기억한다. 간결한 문체, 현실적인 스토리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던 날카로운 장면들. 그때의 충격은 작가의 데뷔작인 <그녀, 아델>을 통해 되살아난다. 이 책에선 강렬하게 두드러지지 않고 은은한 느낌의 제목으로는 다 상상할 수가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원제가 <식인귀의 정원>이라 하면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을까. 물론 ‘식인귀의 정원’은 소설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이고, 살인이나 끔찍한 장면이 등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초반부터 독자는 어떤 불안과 충격, 곧 다가올 불안을 감지한다.

 

주인공 ‘아델’은 님포매니악, 색정증을 앓고 있다.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다. 임신으로 망가진 몸, 의무감과 무감각으로 대하는 남편과의 관계, 육아 스트레스가 드러나지만, 불륜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아델의 성생활은 단지 습관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정도다. 본능과 충동에 이끌린다. 비이성적이며 갈수록 폭력적이고 불순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진다. 마치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그것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아델의 병적인 행동은 더욱 심해져만 가고 부부생활에도 균열이 인다. 그가 이러한 지경까지 오게 된 연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소설 속 아델의 모습이 편히 다가오진 않는다. 때로는 심히 불쾌한 장면이나 이해할 수 없는 불륜이 드러나니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죄책감은 있을까, 하는 물음도 소용이 없으니 답답하다. “나에게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아델의 모습에 어떠한 말을 하겠는가.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그의 병은 화가 나면서도, 절망적이고 안타깝다. 그리고 아델을 끝까지 붙잡으려 하는 남편의 모습도 슬프기 그지없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아델의 행동에 면죄부를 부여하거나 어떤 누군가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고 그저 잔잔히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토록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슬픔이 일 정도로 그리기도 한다. 다소 충격적이고 불쾌하기까지 한 소설이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세상에 나온 수많은 문학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던가. 텍스트 속에서까지 욕망을 짓누르고 감추고 소극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을 떠올리면, 이런 캐릭터가 문학 속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여성의 삶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려내는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한다.

 

● 44쪽,
아델은 결혼한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이유로 아이를 낳았다. 세상에 귀속되어 타인들과 그 외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아델은 누구도 그녀로부터 제거할 수 없는 존중의 후광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고통의 저녁에 몸을 숨기고, 방탕의 나날에 기댈 곳이 되어줄 피난처를 스스로 만들어나갔다.

● 126쪽,
강박이 그녀를 잡아먹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거짓말을 구하는 그녀에게 삶은 그녀의 온 정신을 빼앗는 소모성 조직체일 뿐이다. 삶이 아델을 갉아먹는다. 거짓 출장을 만들어내고, 구실을 지어내고 호텔을 예약해야 한다. 괜찮은 호텔을 찾아내야 한다. 열 번씩이나 전화해 관리자의 확답을 받아내야 한다. "그럼요, 욕조가 있습니다. 아니요, 아주 조용한 방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설명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 167쪽,
에로티시즘은 모든 걸 위장해주었다. 사물의 평범함, 덧없음을 에로티시즘이 가려주었다. 여고생의 오후에, 생일파티에서, 아델의 가슴을 곁눈질하던 노총각 삼촌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가족 모임에 탄력을 준 것도 에로티시즘이었다. 에로티시즘의 추구가 모든 종류의 규율과 체계를 소멸시켰다. 우정, 야망, 일상적인 계획, 모든 게 에로티시즘 앞에서 무너졌다.



● 293쪽,
아델, 그게 끝이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끝나지 않아. 사랑은 인내일 뿐이야. 경건하고 열정적이며 폭군과도 같은 인내. 비이성적일 정도로 낙천적인 인내. 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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