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용규가 쓴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펴냄)에 따르면 기독교의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것은 꽤 좋은 방법이다.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지 않고 언제나 비종교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의 신에 대해 '신은 존재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네 개의 명제를 논하면서 여기서 파생된 서양 문명의 성취를 훑는다.

나는 9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이미 <데칼로그 :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바다출판사 펴냄)에서 확인한 바 있는, 철학자 김용규의 기독교 신학과 현대 과학에 대한 통찰에 감탄하였다. 그는 신의 전지전능성을 증명할 근거로 '무(無)에서 만들어 낸 창조'를 들면서 기독교 신학과 빅뱅 이론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창조는 곧 구속(救贖)'임을 설명하면서 진화론을 포용할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런데 비전문가인 내가 반박할 수는 없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김용규는 기독교 신의 유일성은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바탕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본질은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지 않다고 한다. '질투하는 신'으로 묘사되는 야훼는 성서에 나오는 신의 모습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기독교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 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의 본질인가?


▲ <신의 이름으로>(존 티한 지음, 박희태 옮김, 이음 펴냄). ⓒ이음
최근 출간된 <신의 이름으로 : 종교 폭력의 진화적 기원>(박희태 옮김, 이음 펴냄)은 바로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종교학 교수인 저자 존 티한은 종교 철학과 인지 과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종교 과학 잡지 <자이곤(Zygon)>에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종교 윤리의 진화적 토대'를 발전시켜서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한마디로 '진화가 종교와 종교 폭력을 일으키는 과정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그 전제란 첫째, 생명체의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은 바로 진화생물학이며 둘째,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 호트가 <다윈 안의 신>(김윤성 옮김, 지식의 숲 펴냄)에서 정의한 대로 도대체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성서적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나 "물리 법칙과 자연 선택의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우주적 문자주의(cosmic literalism)'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척 불편하든지, 꽤나 유치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두 전제를 다 받아들인다. 전직 생화학자로서 진화 이론을 알고 감동받고 있으며, 순복음교회를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의 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집사로서 하느님의 '창조(creationism이 아니라 creation)'를 고백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의 입장에 서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이 책을 보면, "종교적·도덕적 전통은 일종의 문화적 표현이며, 그 배후에는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지적·정서적 사전-경향이 있다. 사전-경향이 진화한 까닭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통의 도덕적·종교적 인지 구조 틀을 갖게 되었다."

종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다. 종교의 능력을 이해하고 싶다면, 종교의 심리적 토대를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가장 좋은 이론은 무엇일까? 존 티한은 진화 심리학, 인지 심리학, 행동 경제학, 뇌 과학 분야의 최신 연구를 종합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싹 틔울 인지 구조를 드러낸다.

여기서 다윈 이론의 강점이 나타난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에 대해서는 유전학, 미생물학, 인류학, 동물 행동학, 식물학, 고생물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증거를 토대로 한 반박할 수 없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에서 성공적인 유전자란 다음 세대에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유전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들보다 자신의 유전자가 번식에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려 한다고 했다.

성공적인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면, 그 유전자가 만들어낸 생명체 역시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생명체에서는 '이타적'인 양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존 티한은 '죄수의 딜레마'를 비롯한 게임 이론으로 설명한다. 같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려면 '협동'이 합리적인 자기 이익의 전략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번식을 위해서는 먼저 번식 가능한 나이까지 성장해야 하고, 적절한 이성을 만나야 한다. 번식에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모든 도전들에 끊임없이 대응하는 동시에 자녀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서 그 모든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협상을 이끌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존 티한은 그 기술로 이타주의를 해결하는 다섯 개의 지층을 제안한다. (1)친족 선택 (2)호혜적 이타주의 (3)간접적 호혜성 (4)문화적 집단 선택 (5)도덕 정서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를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의 17, 18, 20장에 쉽게 풀었다. 문화적 집단 선택에 대해서는 피터 리처슨과 로버트 보이드의 <유전자만이 아니다>(김준홍 옮김, 이음 펴냄)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유일신 종교 전통에서 진화된 인지 구조 틀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티한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해서 살핀다. 도덕적 전통이 발전하면 도덕의 '입법자'이자 '집행자'가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모든 것을 아는 이해 당사자인 하느님은 사회를 하나로 결속하고 협동적 사회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결합을 보장해주는 존재로서 역할을 한다."

유대교에서는 십계명과 모세율법을 통해 '호혜성'이 확보되었다. 이 호혜성의 '경계'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은 배타의 대상이어서 심하면 '절멸'되어야 한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못한다'인데, 여기서 금지된 살인은 유대인에 대한 'murder'를 말하는 것이지 신의 허락을 얻어서 주변 이방인들에게 행한 'killing'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가 등장하여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외친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확산시키는 데 어떠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대상에까지 이타주의를 확대하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산상수훈에는 105개의 도덕적 주장이 있지만, 가족적 연관이나 출신을 도덕적 구분의 근거로 삼는 주장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예수의 이타주의는 진화 심리학의 논리 구조를 벗어난 것인가?

티한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복음 12:50)라며 새로운 '경계'를 제시하고,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해 주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6:36)라며 현세적인 물질적 보상 대신 하느님을 통한 특별한 '보상'을 제시한다.

예수도 간접적 이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보편주의 배후에는 "모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지만, 오직 기독교인만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배타주의'가 깔려 있다. 따라서 예수의 경우에도 나와 남을 나누고 보상이 있어야만 이타주의가 가능하다는 진화 심리학의 설명이 유효하다.

집단 도덕의 최고 관심사는 집단 구성원 간에 보상을 보장하여 이타적 행동을 고무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성원이라는 동전의 뒷면에는 배척이 있다. 종교가 곧 폭력적인 신념 체계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이 진화에 필요한 자원을 두고 경쟁할 때, 종교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공동체성을 발휘하며, 종교는 집단 내부적으로는 이타주의라는 도덕, 외부적으로는 폭력의 원천이다. 즉 종교적 도덕과 종교적 폭력은 같은 것에서 진화된 심리다. 종교적 폭력은 일부 몰지각한 성도들의 그릇된 행동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인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해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종교와 도덕, 그리고 종교와 폭력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저자가 내놓은 해법치고는 허무하다. 그는 도덕 전통에 대한 비판과 실용적 접근을 수용하는 휴머니즘 종교가 세계와 도덕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게 뭘까? 세 번 읽어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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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한때 한국 사회에서도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미래 사회의 비전으로 "지속 가능 사회 실현"이라는 모토가 등장하였고, 정부 산하에 지속가능위원회도 설립되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지속 가능'이란 단어를 '녹색 성장'이 대체하고 있다.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지속 가능' 발전은 "미래 세대가 그들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을 의미하였다. 이는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경제, 사회, 환경 부문의 균형 있고 조화로운 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녹색 산업을 통해 새로운 경제 성장을 지향하는 녹색 성장으로 대체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지속 가능 사회로부터 녹색 경제 사회로의 비전 후퇴가 가져온 결과였을까. 최근 한국 사회가 겪은 일련의 사태들은 여러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기온이 올라가면서 발생했다고 하는 유례없는 한파는 저소득층의 난방비 증가를 가져오며 부의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지구 온난화와 연관되어 있는 한 올해와 같은 한파가 일회성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에너지 빈곤을 대처하는 종합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적인 살처분으로 이어진 구제역 역시 축산 농가의 경제적 몰락은 물론 거주 환경의 피폐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처하자면, 방역 행정 개선을 넘어서 공장형 축산이라는 산업 지향형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급작스럽게 진행된 재스민 혁명의 여파로 치솟는 석유 가격, 기후 변화와 재배 면적 감소 등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국제 곡물가의 급등도 식량 자급률 26.9%, 석유 대외의존도 55%인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너지 수입의 다변화, 강력한 에너지 절약 정책의 실시와 선물 계약을 통한 곡물 확보 등이 이들 문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이들 일련의 사태들은 우리 사회의 에너지, 농업 시스템이 현재의 상태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는 동의하는 이들도 그러면 현재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아니 바꾸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 <자연 자본주의>(폴 호큰·에이머리 로빈스·헌터 로빈스 지음, 김명남 옮김, 공존 펴냄). ⓒ공존
무엇이 지속 가능한 에너지, 농업 시스템일까?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 시스템이 정유회사 등의 강력한 로비와 이들에 유리한 각종 제도들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질 수는 있는 것일까? 1999년에 '자연 자본주의' 개념을 만든 폴 호큰과 자원 생산성 혁신을 주창한 로빈스 부부가 공동 집필하여 출간한 <자연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신산업 혁명의 패러다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자연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략을 따르면 에너지 낭비를 조장하여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을 전환할 수 있고, 산업적 농업과 단절하고 자연의 지혜를 따르는 새로운 농업의 출현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전환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다.

환경운동가이자 사회적 기업가이기도 한 폴 호큰과 대안 에너지 전문가로 유명한 에이머리 로빈스, 역시 환경운동가이자 지속 가능 경영 전문가인 헌터 로빈스의 <자연 자본주의>는 출간 후 현재까지 지속 가능성에 관한 필독서, 최고의 친환경 도서로 꼽혀왔다. 여기에는 이 책이 산업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지속 불가능성의 원인을 지적함과 동시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해법들 대부분이 기업, 엔지니어, 시민단체 혹은 지방자치단체, 중앙 정부들에서 실행했던 것들이어서 독자들에게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었다. 700여 쪽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 이들 다양한 해법들에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한국 사회 시스템 전환의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다.

에너지 과소비를 방치하면서 사회적으로 에너지 빈곤을 양산하는 현재의 우리 에너지 시스템은 어떻게 전환되어야 할 것인가? 저자들에 따르면, 근원적으로는 물질과 에너지 면에서 비효율적인 현재의 경제를 자원 생산성이 높은 '자연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자연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산업 자본주의와 달리 자연 자본주의에서는 인적 자본, 금융 자본, 제조 자본 이외에 자원, 생명 시스템, 생태계 서비스로 이루어지는 자연 자본을 경제의 주요 요소라고 본다.

한편, 자연 자본주의는 가치 체계에서도 산업 자본주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자연 자본주의에서는 환경을 "경제 전체를 포괄하고 제공하고 지탱하는 외막"으로 보고, 현재 시장 가치가 없는 생명 유지 서비스를 포함하는 "자연 자본의 가용성과 가능성"을 경제 발달의 제한 요소로 본다. 때문에 여기서는 자연 자본을 온전하게 가치 평가하고 자원 생산성을 혁신적으로 높여 자연 자본의 고갈을 막는 활동이 중요해진다. 이런 자연 자본주의 실현에는 네 가지 핵심 전략이 존재하고, 이 전략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면서 에너지 시스템과 같은 자연 자본주의의 하부 시스템도 변하게 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자연 자본주의의 네 가지 핵심 전략에는 1) 자원 고갈을 늦추고 사회 비용을 절감시키는 혁신적인 자원 생산성 2) 물질 투입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생물 모방 3) 상품과 구매 경제 대신에 서비스와 흐름의 경제 4) 자연 자본을 유지하고 복원하기 위한 자연 자본에 대한 투자가 있다. 이들 네 가지 전략을 국가, 기업, 공동체들에서 따르자면, 산업 자본주의에서와는 다른 기술 혁신, 정책 제도의 개발, 법제 정비 등이 필요하게 된다.

<자연 자본주의>는 네 가지 전략들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원칙, 이행 결과의 사회 경제적 이익과 더불어 실제로 전략에 따라 실천하고 있는 사례들을 정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에너지 분야에서 자연 자본주의 전략 이행은 건물의 외장뿐만 아니라 조명, 전기 제품, 설비 등을 앞서서 고려하는 통합적 설계를 활용한 건물 에너지 효율 증가, 건축가에게 설비 가격 기준으로 보수를 측정하는 대신에 효율성 달성에 대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기, 건물의 에너지 효율이 건물 자산 가치로 인정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의 도입, 바닥 아래에 설치한 치환 환기 시스템, 슈퍼윈도 등 혁신 기술 도입을 통한 에너지 절감, 건물 부지 및 폐자재의 재활용을 통한 에너지 절감, 주택 단열 사업, 자원 효율 개선을 지향하는 마을 재설계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건물을 설계하는 과정에 장기간의 운영에서 발생할 모든 편익을 계산에 넣는 간단한 원칙만을 지켜도 낮은 비용으로 효율이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물질 저감의 자원 생산성과 유사한 에너지 효율을 건축의 목적으로 놓는 사고의 전환, 이에 근거한 기술 혁신, 이들 혁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제도의 도입과 관련 사업의 지원들이 건축 에너지의 혁명적 절감을 결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 시스템은 이런 방향으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정책들의 공조는 어떠한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들의 자연 자본주의의 전략 실행은 농업 분야에서는 산업화된 농업과의 단절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들은 현재의 산업화된 농업은 농업의 근간인 자연 자본의 훼손을 결과하고 궁극에는 농업 시스템의 전반적인 생산 하락을 가져왔다고 본다. 화학 물질에 의존하는 단일 재배에서 벗어나 자연에 가까운 농법을 따름으로써 토양의 균형이 회복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농법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 농업을 수행하는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 대한 현장 연구는 고수확 종자와 인공 비료 대신에 지역 종자만으로도 예전과 같은 수확량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축사에 에너지 절약 기술을 사용하고, 수확기에 의해 흠이 난 곡물 폐기물을 에탄올 생산에 사용하도록 해서 농업에서의 자원 생산성을 높이는 것, 지역 생산을 장려하여 수송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 등이 자연 농법으로의 전환과 병행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축산과 연관해서는 생태학적 방목법을 따르고, 소에 주는 보조금을 폐지하여 소 사육으로 인한 메탄 방출을 줄이는 것, 가축 분뇨에서 나오는 메탄을 규제하거나 세금을 부과하는 일, 쇠고기 등급 기준의 개혁 등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무비료, 무농약, 무제초의 '3무 유기 농법', '다품종 재배', '윤환 방목법', '생물 집약형 소농법' 등은 농업 전환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며, 자연 자본을 복원하는 방식의 농업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축산을 비롯한 우리 농업 시스템은 자연 자본을 얼마나 훼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농업 시스템 전환을 위해서는 어떤 경험들에 주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농업, 에너지 분야 이외에도 저자들은 서비스-흐름 개념을 활용하여 제품 수명을 늘려 자연 자본의 고갈을 막는 원칙과 이를 실행하는 다양한 사례들, 기술적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생태계 서비스들을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 자연 자본으로의 투자를 늘릴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자연 자본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세금과 보조금 체제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수정의 원칙으로는 다음과 같은 과감한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자원생산성을 혁신적으로 높이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는 노동과 소득에 부과된 세금을 없애고 대신에 오염, 쓰레기, 탄소 연료, 자원 착취 등 현재 보조금을 받는 대상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331쪽)

저자들은 자연 자본주의의 원칙들이 사회의 미래 계획에 통합될 때 사회의 기반을 지속 가능하게 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이 이미 많은 곳에서 때로는 기술 혁신으로, 때로는 정책 제도의 변화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자본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단순한 상식에 기반을 두고 자연 자본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기술 혁신 분야에서는 저자들이 주창하는 자원 생산성, 생물 모방의 원칙들에 따른 기술 개발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럽의 경우, 유기 농법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양한 사례들에서 사고의 혁신이 어떤 실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자본주의 전략들이 정치, 경제, 사회 차원에서 어떻게 통합적으로 전개되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기업에서, 서비스 분야 등에서 각각의 전략들이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가를 보여 줄 뿐이다. 부문 혁신들이 어떻게 추동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기술 혁신과 더불어 자연 자본주의의 실현에 중요한 것이 사회적 혁신인데, 이들 혁신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은 적다.

산업 자본주의의 강고한 패러다임이 만들어내는 소위 잠김 효과가 자연 자본주의 전략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산업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구축된 각종 제도 장치, 법제, 정치, 사회 문화들이 빚어내는 잠김 효과가 자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어렵게 한다. 성공 사례만이 아니라 실패 사례를 통해 이들 효과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는 것은 아쉽다.

산업 자본주의에 속박된 정치 레짐, 문화 종속성들은 기업의 다양한 기술 혁신이 축적된다고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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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로시 데이라는 인물을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호이나키의 책은 근대와 대결한 한 지성인의 삶을 뿌리째 보여준다. 그는 '회의하는 삶'을 '좋은 삶'으로 바꾸기 위해 대학 교수직을 스스로 그만두고 농부가 되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대학 교수로서의 부르주아의 삶을 포기하도록 영향을 미친 인물이 도로시 데이였다. 그는 대학 교수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중 데이의 영적 삶에 자극을 받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사후적이기는 하지만, 리 호이나키는 도로시 데이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자' '비타협적인 평화주의자'라고 지칭했다. 데이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의 조합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한 모순적이면서도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미국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사회운동가'로 꼽히지만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2010년, 한국에 도로시 데이의 자서전 <고백(The Long Loneliness)>(김동완 번역, 복있는사람 펴냄)이 출간되었고, 2011년 초에는 로버트 콜스의 <환대하는 삶>(박현주 옮김, 낮은산 펴냄)이 연이어 간행되었다. 나는 리 호이나키의 영향으로 작년에 <고백>을 구입했지만, 종교 서적에 가까운 편집 스타일 때문에 손때를 묻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환대하는 삶>을 먼저 읽고서야 <고백>을 다시 꺼내 읽었다. <고백>은 자서전이기에 내면의 기록이고, <환대하는 삶>은 대화의 기록이다. 자서전은 어떤 식으로 발화자의 의도에 갇히게 마련이고, 대화의 기록은 상호성으로 인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종종 벗어나게 마련이다. <고백>과 <환대하는 삶>은 어깨를 마주하듯 서로를 의지하는 책이다.


▲ <환대하는 삶>(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낮은산 펴냄). ⓒ낮은산
그 중 <환대하는 삶>은 의사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콜스가 도로시 데이의 정신 세계를 대화를 통해 재구성한 책이기에 흥미롭다.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의 기록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도로시 데이의 저작과 삶의 핵심을 파헤치는 분석서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환대하는 삶>의 주제이기도 한 문제적 인물인 도로시 데이(1897~1980년)는 누구인가? 내게 그의 삶을 요약하는 단어를 떠올려 보라면,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 사회주의자에서 가톨릭 종교인으로 회심한 자, 급진적 실천주의자, 신념을 밀어붙인 능력자 등일 것이다. 1897년생인 도로시 데이는 20대에는 신문기자, 간호사, 작가로 활동하며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 진영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미국 대공황이 절정기에 이르렀던 1933년에 피터 모린과 함께 <가톨릭 일꾼>을 창간하면서 인생의 급격한 반전을 겪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에서 가톨릭 신앙인으로 '회심'한 전향자인 것이다.

그 전향의 전환점에 <가톨릭 일꾼>이라는 신문과 '환대의 집' 운동이 자리한다. <가톨릭 일꾼>이라는 매체를 통해 도로시 데이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반전 평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가와 가톨릭교계와 대립했다. 이러한 <가톨릭 일꾼>의 입장은 미국 가톨릭과 미국 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국가와 애국주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도로시 데이는 당당하게 "전쟁은 국가의 활력"이라고 외쳤다. 이러한 외침으로 인해 <가톨릭 일꾼>은 개인 구독자뿐만 아니라, 수백, 수천 부씩 가져가던 단체 구독자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미국 사회 내에서 '근본주의'적 사고의 필요성을 강렬한 언어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환대의 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공항기에 설립된 '환대의 집'은 노숙인에게 시혜를 베푸는 방식으로 봉사하는 곳이 아닌, 그들과 더불어 동등한 입장에서 곤궁을 나누는 곳으로 설립되었다. 무료 급식소에서 줄을 서게 해 배급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거부하고, '환대의 집'은 노숙인을 손님으로 맞아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잠잘 곳을 대접했다. 이러한 실천은 차별과 구별을 넘어서 동등한 위치를 회복함으로써 종교적 헌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환대의 집'은 1933년에 설립된 이후 3년 만에 미국 전역에 33개소가 생길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1950년대를 살았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을 찾아 직접 실천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미국 지성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시민사회의 윤리적 자의식이 종교적 실천 운동과 결합함으로써, 청년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이다. 그렇기에, 리 호이나키 같은 이들이 도로시 데이의 영향으로 강한 윤리적 자의식을 키울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환대하는 삶>은 도로시 데이에 대한 존경어린 헌사로만 채워져 있을까? 이 책의 매력은 글쓴이 로버트 콜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있다. 로버트 콜스는 도로시 데이에 대한 존경의 감정을 갈무리한 채, 예민한 곳은 건드린다. 이에 호응하는 도로시 데이의 태도는 때로는 다시 숙고하고, 때로는 회의하며 짜증을 내기도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전반적으로는 우호적인 대화가 이어지지만, 간간히 이뤄지는 긴장 넘치는 대화는 독자를 흥미로운 호기심의 세계로 이끈다. 대중과 가톨릭 교계는 도로시 데이를 "성인으로 호명"하려 하지만, 로버트 콜스가 보여주고 있는 도로시 데이는 '갈등한 개인'의 모습에 가깝다. <환대하는 삶>을 읽으면서 나는 때때로 데이의 말보다는 콜스의 감상과 냉정한 평가에 더 귀 기울이곤 했다.

종교적이어 고결하게 느껴지는 도로시 데이보다는 갈등하는 세속인의 면모를 드러내는 로버트 콜스의 내면에 더 쉽게 동일시되었던 까닭이리라. 성과 속의 대화를 엿듣는 자의 태도에 가까운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존경스러운 종교인 앞에서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로버트 콜스처럼 '말하는 자가 아닌 듣는 자'에 가까운 처지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 때문일까? 고백컨대, 나는 <환대하는 삶>과 <고백>을 읽은 후에도 여전히 도로시 데이가 낯설다. 그는 종교적 삶에 헌신한 사람이고, 또 영적 가치에 자신을 내던진 인물이다. 내게는 그의 종교적 신념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앞으로의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내게 종교적 헌신은 감동적일 뿐 설득적이지는 못했다. 이는 현재의 나의 삶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내가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한 내면적 거리감은 비교적 뚜렷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게 대공항 이후 미국 지식인 사회의 풍경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와 조지 오웰, 이그나치오 실로네, 시몬 베유가 당시의 미국 지식인에게 미친 충격을 실감하게 하는데도 유용한 자극을 주었다. 무엇보다 산업화 시대의 대량 생산 시스템에 저항했던 미국 사회운동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계기를 준 것도 큰 수확이었다.

나는 조그맣게 일궈낸 실천을 통해 사람들을 크게 움직인 인물로 그녀를 기억하고자 한다. 도로시 데이는 내게 공동체 운동을 통해 오히려 독립적 인간을 깊이 사유하게 한 '실천가'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렇듯 상이한 인물 접근법을 가능하게 해 준 책이 <환대하는 삶>임을 인정해야할 것 같다.

더불어 책을 읽는 내내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다소 불만이었던 저자 로버트 콜스에게 조그만 헌사를 보내야 할 것 같은 부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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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마이클 샌델이 참 고맙다.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를 비롯한 그의 탁월한 저서들과 교육방송(EBS)이 소개해 준 명강의 덕분에 우리 대중도 이제 나 같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정치철학적 논의 틀에 얼마간 익숙해졌다. 한국의 정치철학자들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해오지 못하던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샌델은 한국 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 시민들이 우리 사회의 커다란 부정의를 새삼스럽게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땅의 지식인들과 정치철학자들은 이제 그가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많은 시민들과 함께 좀 더 제대로 정의를 묻고 따지며 그 열풍이 이 땅의 불의를 혁파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그것을 잘 살려나가야 하리라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다른 한 편으로 이제 우리가 그의 정의 논의가 지닌 한계들도 좀 더 분명히 해 둘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시각들이 제출되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의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정의란 무엇인가>, 34쪽)으로 이해하는 '분배 패러다임'에 갇혀 진짜로 중요한 정의의 차원을 놓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나는 그가 소개한 정의 논의가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자칫 참된 정의의 문제를 오해하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의 논의에서는 '인권'이라는 가장 본원적이고 기본적인 정의가, 밀이나 칸트를 논의하는 데서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말고는, 거의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크게 잘못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릇 정의란, 샌델 자신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그랬지만, 단지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나누어줄 것인가라는 협소한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물론 이것이 아예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한 정치 공동체의 참된 정당성의 근거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정의의 문제란 기본적으로 그 정치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억압과 착취, 무시와 모욕, 종속과 배제 등에서 해방된, 한 마디로 지배가 없는 사회적 상호 관계 속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샌델의 정의 논의에서는 이런 차원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거의 통째로 빠져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고 나서 갈망하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대로 찾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 인권은 바로 그 근원적 정의의 문제에 대한 가장 탁월하고 역사적으로도 검증된 답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권의 발견>의 저자 윌리엄 탤벗이 이야기하듯이, 인권은 완전한 정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회를 정의롭게 하기 위한 사회적 동학을 만들어 내고 그 사회를 기본적인 수준에서나마 "용납가능하게(이 책의 역자는 'decent'를 이렇게 번역했다)" 만들어 줄 수 있는 초석인 것이다(42쪽). 인권 없이 정의는 없다.

비록 이 책이 정의라는 주제를 직접적이고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샌델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왜 인권이 오늘날 정의를 이야기하는 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불가결한 출발점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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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의 발견>(윌리엄 탤벗 지음, 은우근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데 인권 사상은 그 어떤 명시적인 창시자도 단일한 기원도 갖고 있지 않은 매우 특이한 사상이다. 발생론적으로 서양의 자연권 사상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험난한 도덕적 진보 과정을 거쳐 온 우리 인류 전체의 어떤 협동의 산물이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서구적 인권 사상이 서구의 세계 지배와 더불어 전 세계로 (어떤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보편화되었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통념은 사실은 완전한 잘못이다. 탤벗이 잘 보여주듯이, 인권은 근대 이전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근대 이후의 서구 사회에서도 아주 낯설었으며, 비서구 사회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인권을 발전시키고 수용해 왔다.

한국 사회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인권을 신장시켜 온 것이 단지 서양을 추종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며,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독재자를 쫓아 낸 인민들이 그저 서양을 모방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지금도 함께 모색하고 고민하며 인권과 그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래서 단 하나의 유일하게 타당한 '인권의 철학' 같은 것은 없다. 인권을 정당화하고 정초하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제안'일 뿐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접근이 인권의 설득력을 가장 돋보이게 하고 인권의 실천을 가장 잘 이끌어 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지 유일하게 올바른 인권의 철학적 기초 같은 것을 찾는 것이 과제는 아니다.

그래서 인권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접근법과 해석이 있다는 것을 인권 사상의 약점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오히려 그 사실은 인권 사상의 커다란 장점으로서, 인권이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권과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착근되는 데 본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인권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 발생 맥락의 서구적 자연권 사상 전통 같은 것을 함께 받아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

이 책에서 전개되고 있는 탤벗의 인권 철학은 서구, 특히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정치 및 도덕 철학 전통이 인권을 위해 지금껏 내 놓은 가장 정교하고 또 체계적으로 잘 다듬어진 정당화 시도들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책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지닌 도덕적 가치에 기반을 둔 인권이 지닌 도덕적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과 관련하여서는 조금의 우유부단함도 허용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단호함'을 보이면서도, '인식론적으로는 겸손하게' 인권적 도덕 판단의 오류 가능성을 솔직히 인정하는 새로운 인권 철학적 모색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와 같은 접근법은 인권에 대한 문화상대주의적 도전에 현혹되지 않으면서도 또한 인권과 관련한 '도덕적 제국주의'의 가능성도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동안 인권의 보편성 주장이 곳곳에서 부닥쳐야 했던 많은 난제들을 해결 해 줄 수 있다.

탤벗은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유익한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스스로에게 바람직한지에 대해 누구든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데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인권을 끌어내서 정당화하려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인권 철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탤벗은 서구 철학의 지금까지의 '증명 패러다임'을 버리고 그가 밀, 롤스, 하버마스에게서 재구성적으로 얻어 낸 '균형 패러다임'을 통해서 그러한 인권이 어떻게 단지 서구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문화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단순한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에게 인권은 기본적으로 바로 그런 자율성에 대한 존중이 역사적으로 심화되고 발전하는 가운데 '발견'된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인권 철학적 모색이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해 이 짧은 글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다. 사실 나 역시 그 동안 그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논증 목표를 가지고서 나름의 인권 철학적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인권의 철학 : 자유주의를 넘어, 동서양 이분법을 넘어>, 새물결 펴냄),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동아시아적인 사상 및 문화 전통이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그 동안 인권 철학적 논의를 지배해 왔던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논의 틀을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할 수 있는, 곧 포용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는 시각을 확립하려 해 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인권 철학 일반이 너무 강하게 롤스 식의 '자유 우선성의 원칙'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지 미덥잖아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저 탤벗의 새로운 시도도 커다란 예외는 아닌 것 같다는 정도만 이야기해 두자.

물론 탤벗은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자율'이 지니는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에서 출발하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의 접근법의 동기와 그 논증 목표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역시 (그에게는 불가피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적인 전통을 중심에 두고 인권의 보편성을 사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조금은 의심스럽다. 또 그가 비록 몇몇 사회권을 '기본적 인권'의 범주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협애화의 함정을 피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론 전략에서는 불가피하기는 해도 내가 보기에 조금은 지나치다 싶게 교육권에 큰 무게를 두면서도 주택, 의료, 고용 등과 관련된 다른 사회권들은 너무 약하게 또는 아마도 파생적인 권리로 취급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도 그의 논의의 자유주의적인 편향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이런 접근법으로서는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혐의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하지 않을지 걱정이다.

물론 나의 초점은 그가 이 책에서 제대로 논박해 내고 있는 문화상대주의적 인식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자율성이 지닌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를 확신하더라도, 나도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 확신을 공유하지만, '도덕적 개인주의' 전통이 약했던 우리의 동아시아적 사상 및 문화 전통이라는 배경 위에서는 인권의 정당화를 위해 조금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인권에 대한 의사소통적 상호 인정의 차원이다. 그래서 나는 인권을 탤벗처럼 '발견'이라는 관점에서보다는 기본적으로 상처 입을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덕적-정치적 '구성'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접근법은 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공화주의적'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가 샌델의 정의론에 열광하면서도 정작 샌델의 정치철학에서 우리가 진짜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한 측면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샌델이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기는 '시민적 공화주의'다. 그러나 내 생각에 부당하게도 샌델의 것을 포함한 서구 공화주의 전통 일반은 인권에 대해 상대적으로 냉담했다고 할 수 있는데, 샌델이 인권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지 싶다.)

물론 단순히 내가 옳고 그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시도는 그가 자라 온 지적 배경 위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와 같은 비서구 문화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설득력 있게 인권이라는 본원적 정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며, 충분히 주의 깊게 경청하며 배울 가치가 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대화를 통해 인권에 대한 상호문화적 이해가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이며 철학적 정당화도 더 두터워지고 그 수준도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3

끝으로 번역과 관련해서 몇 마디 해 두자. 역자는 매우 성실하게 그리고 많은 고뇌를 하면서 결코 녹녹치 않을 이 책의 번역 작업을 완수해 준 것 같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매우 깔끔하다. 크게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는 가령 'legitimacy'를 모두 '적법성'이라고 해버림으로써 '정당성'이라고 해야 더 나을 것 같은 문맥에서 저자의 주장에 대한 빠른 이해를 방해하는 등의 사소한 실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또 그는 이 책에서는 아주 중요한 개념인 'paternalism'을 일관되게 '온정주의'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관행이라(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가령 샌델 책에서도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반드시 그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조금은 더 주의가 필요했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 싶다. 그것은 온정주의가 아니라 '간섭주의'라 해야 맞다. 남의 일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며 당사자 스스로 해야 할 판단을 억압하고서는 이래라 저래라 남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며 간섭하려 드는 태도나 신념을 '온정주의'라고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런 태도나 신념에 대해 그야말로 지나치게 '온정적인' 처사라 할 수밖에 없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런 간섭주의를 극복하는 것에서 인권의 기원을 찾고 있는 탤벗의 의도에는 아주 많이 어긋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어를 잘 모르거나 철학 훈련이 부족한 독자로서는 논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이 책이 좀 더 많은 독자들을 찾아 이런 잘못이 교정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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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애니메이션은 단연 <미래 소년 코난>이다. "서기 2008년(이미 지나갔군!) 지구는 핵전쟁 위기에 처해있었다"는 멘트와 함께 전국의 아이들은 학교 담벼락을 넘어서라도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미래 소년 코난>은 생태 문제에 눈을 뜨게 한, 핵전쟁의 위험을 깨닫게 한, 기계 문명과 발전 혹은 개발에 질문을 던지게 한, 최초의 교과서였다.

다른 한편, <코난>은 건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근대적 대서사시이다.

<코난>이 대서사시인 것은 잘 짜인 이야기 구조 때문이다. '홀로 남은 섬'에서 출발한 코난은 포비와의 '우정'을 쌓아 자신의 '사랑' 나나를 구출하고 하이하바와 인더스트리아에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사람과 '봉기'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대륙으로 융기한 '(이제는 대륙이 된) 홀로 남은 섬'으로 귀환한다. 하나가 둘을 만나고, 다시 그것이 셋이 돼 압제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공동체', 즉 '나라'가 된다.

그렇다면, 이 나라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인류학자 클리퍼드 거츠가 사용한 개념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나라는 동시대인을 동료로 끌어 모아서 만들어진다.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은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 동시대인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은 '아직' 의식적으로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동료는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감각을 공유한 것이 동료이다. 또 동료는 시대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다. 동시대인 전부를 끌어 모아 동료로 만드는 것, 그것이 어찌 보면 인류 공동체라는 근대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근대의 이상은 현실적으로 '국가'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국가를 통해 맺어진 동료, 그들이 '국민'이다.

그러나 이 국가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국가란 무덤 위에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건국 신화가 죽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증거이다. 국가는 일종의 '애도 공동체'이다. 지금 서남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낡은 질서에 의해서 누군가가 죽는다. 그 죽음을 통해 동시대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대 인식이 공유되면서 동시대인들은 '혁명의 동료/형제자매'로 일어난다. 마침내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저들의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킨다.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나라'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

'나라'가 붕괴되고 그 여파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집어 삼켰는가에 대해 주트는 지금까지 그 어느 신자유주의 비판서보다 더 격양되고 울분에 찬 목소리로 가차 없이 폭로하고 비판한다. 사회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불평등은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불평등해진 사회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병리학적 현상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탐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강하다는 것'은 과거에는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으로 이해가 되었지만 이제는 '남을 괴롭히는 능력'으로 전환되었다. 가난한 이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신뢰, 절제, 정직, 공공선처럼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체제로부터 얻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들 역시 이 '라이프스타일'에 빠져있다. 그 결과 사회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꿈을 꾸지도, 꿀 수도 없게 되었다.

불평등을 조정하고 탈락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보살피면서 실패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것, 그것이 20세기의 진보를 규정짓는 사회 개혁의 핵심이었으며, 그 결과가 복지 국가다. 보편주의에 기초한 복지 국가는 소득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사회 부조와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누렸다. 책에 나온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1960년대에 이르면 유럽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국가가 나라, 즉 정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공동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다. 세금이 바로 이런 협동과 신뢰의 상징이다. 세금은 당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그리고 그 세금을 국가가 올바르게 사용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신뢰가 있을 때에만, 마지막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렇게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시민 공동체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우리'의 근대적 최대치가 바로 '국가'이다. 국가를 통해서 그 공간 안에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동료라는 감각을 확보하고 서로 신뢰하게 된다.

68 세대 탓에 '나라'가 망했다?

주트가 지적하듯이 이 정치 공동체인 국가는 1970년을 시작으로 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든 신자유주의 비판서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1970년에 들어와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것에 큰 공헌을 세운 것으로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복지의 자식들이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신좌파의 흐름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 즉 공동의 것에 대한 의식을 명백히 퇴조시켰다. 여기에는 오로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뿐이었다고 주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에 빠진 복지의 자식들이 하이에크와 같은 보수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한 것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

문제는 오늘날 그들(노인들을 의미함)이 받는 혜택의 비용을 지불하는 자들이 대공황과 전쟁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즉 복지 국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담해야하는 비용에 분노했다. (151쪽)

그 결과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망쳐놓은 세계이다. 무엇보다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에 따른 공공 부문의 민영화와 같은 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우리가 다른 시민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인을 동료로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그저 동시대인으로 해체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세계화는 이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나의 '동료'는 지구 저편에서 나와 채팅하는 사람이지 우리 동네에 사는 김 씨 아저씨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김 씨 아저씨와 하는 것이지 지구 저편의 페르난도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화된 동시대인들 사이에는 '정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저자에 따르면 정치는 특정 공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 운동이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애틀에서부터 시작된 저 거대한 반지구화 운동이 있지 않은가?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의 사회운동이 모여서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지 않는가.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세계화에 대항하고 지구 온난화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여럿이 모여 감정을 표출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하는 한 이것은 정치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삶에서 그저 소비자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한 마디로 응수한다. "이보다는 잘해야 한다."

자, 여기까지다. 그는 '이보다는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첫 단추는 공적 대화를 재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해서 만들어야 하는 그 공적 대화의 공간이자, 결과는 '도로' 복지 국가이다. 그는 책의 맨 마지막에서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그 변혁을 통해 복귀해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이다.

주트는 신자유주의가 유럽을 18세기로 돌려놓았다고 흥분하였지만, 그가 변혁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것도 짧게 보면 1945년에서 1970년 사이에'만' 존재하던 바로 그 '복지 국가'이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신중함을 요구하며 우리는 20세기의 업적들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에 맞선 최선의 중재 기구는 다시 '국가'이며, 국가만이 시민에게 응답할 수 있고, 시민만이 국가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철도나 운동장과 같은 공공시설을 만드는 것, 즉 개인의 욕망을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한데 모을 수 있는 것으로 세금보다 더 나은 제도는 아직까지 없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그 어떤 외형도, 그 어떤 아류도 실패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최초에 사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사람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을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저 이상에 불과해 보였던 것들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적인 정치가 되었다. (229쪽)

'68 혁명', 자본주의의 구세주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이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1960~70년대 청년들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 운동에 대한 주트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사실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한울 펴냄)를 쓴 데이비드 하비도 신자유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던 문화적, 사회운동적 배경으로 68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니 주트와 의견을 같이 한다. 요컨대 앞에서 주트가 말한 '사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공적 간섭에 대한 짜증'이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와 친화력이 상당하였다는 점이다.

68 혁명은 이미 모순에 처해있던 자본주의가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포디즘 체제의 축적 양식이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에 따라 노동을 더욱 심하게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통하여 새로운 축적 양식이 출현해야 하는 때에 자본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오히려 68 혁명이라는 이야기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학을 들 수 있다. 미셸 푸코도 1968년의 혁명은 19세기에 시작된 고등 교육 형태, 즉 소수의 젊은이를 사회적 엘리트로 변환시키는 신기한 제도로서의 대학을 효과적으로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이란 가면 아래 자신을 전달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은 그대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등학교이다. 이에 반해 오히려 대학은 자신의 낡은 구조를 제거하고 신자본주의의 요구에 실질적으로 적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68 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일상생활의 혁명>(주형일 옮김, 이후 펴냄)을 쓴 라울 바네겜 역시 다른 혁명과는 달리 수천 년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혁명인 68 혁명은 억압적 폭력의 회오리 속에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1968년에 경제는 자신의 '전성기와 전멸기의 매듭'을 지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보다 일반화된 소비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상품 체계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스펙터클로 전환하였다.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시장의 유혹으로, 저축에서 낭비로, 청교도주의에서 쾌락으로 땅과 인간을 볼모로 만드는 착취에서 환경의 영리적 재구성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자본은 이제 사람과 사람의 창조력이 더 중요한 자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68 혁명 이후의 자본주의는 '개인보다 소중한 자본'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으로서의 인간'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살아있는 자의 수익성은 더 이상 그의 소진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구성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 결과는 다품종 소량 생산, 유연 생산 방식의 포스트포디즘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이라는 68 혁명의 구호는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셈이다.

성공한 '복지 국가'가 '삶의 감옥'이 된다면…

그러나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68 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괴물과 같은 적응력,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본이 젊은 세대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들의 주장을 포섭하는 동안,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 혁명 자체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 구좌파는 자본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의 자본주의적 의미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포섭하는 동안 젊은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했다. 그래서 그것이 사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징징거림 혹은 조직적 당을 파괴하려는 짓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다.

이것을 위에서 이야기한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을 통해서 살펴보자. 68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써진 이 책에서 그는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권태와 그 원인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주의의 확산과 사회의 스펙터클화에 따라 세상이 안온한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사실 '삶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 대한 자유로 완전히 대체되고, 박탈된 자유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삶의 열정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

그래서 나온 68 혁명의 언어는 "착취자에게 죽음을!"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삶을!"이다. 이것이야말로 68 혁명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무엇을 지향하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

바네겜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상생활이 주된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곧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집단적 생존의 문명은 개인적 삶의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기만 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스펙터클과 소비 상품들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신성한 것이든 통속화된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어떤 환상도 일상적 행위들의 빈곤함을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욕망을 해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비 사회는 소비와 스펙터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라고 고발한다. 따라서 이들의 무기는 화염병만이 아니라 언어였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성이며, 창조성의 존재 양식인 자발성이었다. 따라서 68 혁명이 말과 구호, 아니 시(詩)의 축제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68 혁명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알제리에 있었던 푸코조차도 68 혁명이 없었다면 감옥과 섹슈얼리티 등의 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5월의 운동은 교육 체제에 종속되었던 반복적인 상황과 보수주의의 가장 구속적인 형태에 종속되었던 개인들이 혁명적 전투를 전개"한 것이며 이로 인해 촉발된 "사유의 위기'는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안정화되어 있던 스웨덴이나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폴란드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항거가 증폭되고 있던 튀니지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다른 제도들 혹은 억압적 집단들이 행했던 일상생활에 대한 계속적 억압, 그리고 이런 불편함을 생산한 권력에 대한 항거가 68 혁명이다.

푸코가 간파했듯이, 68 혁명의 주역들은 국가 권력뿐만이 아니라 대학 당국에서 텔레비전 그리고 길거리 등 사회 속에서 다양한 경로와 제도들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통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한 제도들이 이성이나 정상성의 이름으로 행위, 존재, 실천, 발언의 방식을 확립하고 개인들을 비정상, 광인으로 낙인찍음으로 개인들의 집단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아갔던 방식을 추적하였다. 68 혁명은 사회의 특정한 계층과 청년 문화에 영향을 발휘하던 권력 형태의 전체 연결망에 대한 반란이었다.

이처럼 푸코는 68 혁명의 독특성은 전통적으로 정치의 공식 영역이 아니던 부분들 전반에 걸쳐 정치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주의 언어가 혼재하여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을 이들 언어로 적어보려고 하였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문제와 직면하는 것에 무기력하다는 것만 입증하였다.

이것으로 정치적 교의의 틀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는 종언을 고하고 정치 자체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던져졌다. 68 혁명이 언어의 혁명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혁명이 그동안 갇혀있던, 혹은 제기되지 않던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를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더 이상 진리와 권위, 그리고 당의 이름으로 의문에 붙여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전혀 사적인 징징거림이 아니다. 또 주트가 말하는 것처럼 공동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치의 재구성이다.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가 만개해 있던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봐야한다.

주트는 젊은이들이 역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1968~70년대를 다시 돌아봐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왜 청년에게 감옥으로 느껴졌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요구에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보아야한다.

신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

다시 <코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인더스트리아에서 나나를 구출하고 구질서를 무너뜨린 코난은 하이하바로 돌아가지 않는다. 코난이 봤던 가장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는 하이하바였지만 코난은 동료들과 함께 '홀로 남은 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홀로 남은 섬'은 더 이상 '홀로 남은 섬'이 아니다.

코난이 떠나 있는 동안 섬은 융기하여 대륙이 되어 있다. 그 대륙에 코난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왜냐하면 모든 건국은 파스카, 즉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모든 옛 것과의 단절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이하바를 품은, 그러나 하이하바보다 더 큰, 그런 정치 공동체이다.

내가 이 서평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낡은 흘러간 옛 노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보라. 지금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박근혜부터 진보신당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었다.

동구 몰락 이후 모두가 민주주의자가 되었을 때 자신만 민주주의자인 척하다 망해버린 좌파의 전철을 또 밟을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 복지에 대한 진짜/가짜 논쟁은 장충동 족발 집에 붙어 있는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어쨌든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실험해왔던 체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나은 것이었으니 그리로 돌아가자는 주장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에 대한 요구는 그 때보다 더 많아지고 더 커졌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

지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고민해야하는 것은 저 주장들이 신자유주의를 불렀다는 타박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은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만큼이나 그때의 사회민주주의도 넘어서는, 그런 정치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해방에 대한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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