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용규가 쓴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펴냄)에 따르면 기독교의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것은 꽤 좋은 방법이다.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지 않고 언제나 비종교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의 신에 대해 '신은 존재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네 개의 명제를 논하면서 여기서 파생된 서양 문명의 성취를 훑는다.

나는 9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이미 <데칼로그 :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바다출판사 펴냄)에서 확인한 바 있는, 철학자 김용규의 기독교 신학과 현대 과학에 대한 통찰에 감탄하였다. 그는 신의 전지전능성을 증명할 근거로 '무(無)에서 만들어 낸 창조'를 들면서 기독교 신학과 빅뱅 이론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창조는 곧 구속(救贖)'임을 설명하면서 진화론을 포용할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런데 비전문가인 내가 반박할 수는 없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김용규는 기독교 신의 유일성은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바탕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본질은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지 않다고 한다. '질투하는 신'으로 묘사되는 야훼는 성서에 나오는 신의 모습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기독교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 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의 본질인가?


▲ <신의 이름으로>(존 티한 지음, 박희태 옮김, 이음 펴냄). ⓒ이음
최근 출간된 <신의 이름으로 : 종교 폭력의 진화적 기원>(박희태 옮김, 이음 펴냄)은 바로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종교학 교수인 저자 존 티한은 종교 철학과 인지 과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종교 과학 잡지 <자이곤(Zygon)>에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종교 윤리의 진화적 토대'를 발전시켜서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한마디로 '진화가 종교와 종교 폭력을 일으키는 과정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그 전제란 첫째, 생명체의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은 바로 진화생물학이며 둘째,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 호트가 <다윈 안의 신>(김윤성 옮김, 지식의 숲 펴냄)에서 정의한 대로 도대체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성서적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나 "물리 법칙과 자연 선택의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우주적 문자주의(cosmic literalism)'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척 불편하든지, 꽤나 유치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두 전제를 다 받아들인다. 전직 생화학자로서 진화 이론을 알고 감동받고 있으며, 순복음교회를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의 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집사로서 하느님의 '창조(creationism이 아니라 creation)'를 고백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의 입장에 서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이 책을 보면, "종교적·도덕적 전통은 일종의 문화적 표현이며, 그 배후에는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지적·정서적 사전-경향이 있다. 사전-경향이 진화한 까닭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통의 도덕적·종교적 인지 구조 틀을 갖게 되었다."

종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다. 종교의 능력을 이해하고 싶다면, 종교의 심리적 토대를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가장 좋은 이론은 무엇일까? 존 티한은 진화 심리학, 인지 심리학, 행동 경제학, 뇌 과학 분야의 최신 연구를 종합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싹 틔울 인지 구조를 드러낸다.

여기서 다윈 이론의 강점이 나타난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에 대해서는 유전학, 미생물학, 인류학, 동물 행동학, 식물학, 고생물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증거를 토대로 한 반박할 수 없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에서 성공적인 유전자란 다음 세대에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유전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들보다 자신의 유전자가 번식에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려 한다고 했다.

성공적인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면, 그 유전자가 만들어낸 생명체 역시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생명체에서는 '이타적'인 양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존 티한은 '죄수의 딜레마'를 비롯한 게임 이론으로 설명한다. 같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려면 '협동'이 합리적인 자기 이익의 전략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번식을 위해서는 먼저 번식 가능한 나이까지 성장해야 하고, 적절한 이성을 만나야 한다. 번식에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모든 도전들에 끊임없이 대응하는 동시에 자녀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서 그 모든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협상을 이끌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존 티한은 그 기술로 이타주의를 해결하는 다섯 개의 지층을 제안한다. (1)친족 선택 (2)호혜적 이타주의 (3)간접적 호혜성 (4)문화적 집단 선택 (5)도덕 정서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를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의 17, 18, 20장에 쉽게 풀었다. 문화적 집단 선택에 대해서는 피터 리처슨과 로버트 보이드의 <유전자만이 아니다>(김준홍 옮김, 이음 펴냄)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유일신 종교 전통에서 진화된 인지 구조 틀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티한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해서 살핀다. 도덕적 전통이 발전하면 도덕의 '입법자'이자 '집행자'가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모든 것을 아는 이해 당사자인 하느님은 사회를 하나로 결속하고 협동적 사회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결합을 보장해주는 존재로서 역할을 한다."

유대교에서는 십계명과 모세율법을 통해 '호혜성'이 확보되었다. 이 호혜성의 '경계'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은 배타의 대상이어서 심하면 '절멸'되어야 한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못한다'인데, 여기서 금지된 살인은 유대인에 대한 'murder'를 말하는 것이지 신의 허락을 얻어서 주변 이방인들에게 행한 'killing'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가 등장하여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외친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확산시키는 데 어떠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대상에까지 이타주의를 확대하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산상수훈에는 105개의 도덕적 주장이 있지만, 가족적 연관이나 출신을 도덕적 구분의 근거로 삼는 주장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예수의 이타주의는 진화 심리학의 논리 구조를 벗어난 것인가?

티한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복음 12:50)라며 새로운 '경계'를 제시하고,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해 주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6:36)라며 현세적인 물질적 보상 대신 하느님을 통한 특별한 '보상'을 제시한다.

예수도 간접적 이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보편주의 배후에는 "모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지만, 오직 기독교인만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배타주의'가 깔려 있다. 따라서 예수의 경우에도 나와 남을 나누고 보상이 있어야만 이타주의가 가능하다는 진화 심리학의 설명이 유효하다.

집단 도덕의 최고 관심사는 집단 구성원 간에 보상을 보장하여 이타적 행동을 고무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성원이라는 동전의 뒷면에는 배척이 있다. 종교가 곧 폭력적인 신념 체계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이 진화에 필요한 자원을 두고 경쟁할 때, 종교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공동체성을 발휘하며, 종교는 집단 내부적으로는 이타주의라는 도덕, 외부적으로는 폭력의 원천이다. 즉 종교적 도덕과 종교적 폭력은 같은 것에서 진화된 심리다. 종교적 폭력은 일부 몰지각한 성도들의 그릇된 행동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인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해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종교와 도덕, 그리고 종교와 폭력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저자가 내놓은 해법치고는 허무하다. 그는 도덕 전통에 대한 비판과 실용적 접근을 수용하는 휴머니즘 종교가 세계와 도덕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게 뭘까? 세 번 읽어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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