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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마이클 샌델이 참 고맙다.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를 비롯한 그의 탁월한 저서들과 교육방송(EBS)이 소개해 준 명강의 덕분에 우리 대중도 이제 나 같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정치철학적 논의 틀에 얼마간 익숙해졌다. 한국의 정치철학자들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해오지 못하던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샌델은 한국 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 시민들이 우리 사회의 커다란 부정의를 새삼스럽게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땅의 지식인들과 정치철학자들은 이제 그가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많은 시민들과 함께 좀 더 제대로 정의를 묻고 따지며 그 열풍이 이 땅의 불의를 혁파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그것을 잘 살려나가야 하리라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다른 한 편으로 이제 우리가 그의 정의 논의가 지닌 한계들도 좀 더 분명히 해 둘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시각들이 제출되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의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정의란 무엇인가>, 34쪽)으로 이해하는 '분배 패러다임'에 갇혀 진짜로 중요한 정의의 차원을 놓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나는 그가 소개한 정의 논의가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자칫 참된 정의의 문제를 오해하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의 논의에서는 '인권'이라는 가장 본원적이고 기본적인 정의가, 밀이나 칸트를 논의하는 데서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말고는, 거의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크게 잘못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릇 정의란, 샌델 자신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그랬지만, 단지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나누어줄 것인가라는 협소한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물론 이것이 아예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한 정치 공동체의 참된 정당성의 근거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정의의 문제란 기본적으로 그 정치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억압과 착취, 무시와 모욕, 종속과 배제 등에서 해방된, 한 마디로 지배가 없는 사회적 상호 관계 속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샌델의 정의 논의에서는 이런 차원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거의 통째로 빠져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고 나서 갈망하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대로 찾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 인권은 바로 그 근원적 정의의 문제에 대한 가장 탁월하고 역사적으로도 검증된 답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권의 발견>의 저자 윌리엄 탤벗이 이야기하듯이, 인권은 완전한 정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회를 정의롭게 하기 위한 사회적 동학을 만들어 내고 그 사회를 기본적인 수준에서나마 "용납가능하게(이 책의 역자는 'decent'를 이렇게 번역했다)" 만들어 줄 수 있는 초석인 것이다(42쪽). 인권 없이 정의는 없다.

비록 이 책이 정의라는 주제를 직접적이고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샌델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왜 인권이 오늘날 정의를 이야기하는 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불가결한 출발점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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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의 발견>(윌리엄 탤벗 지음, 은우근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데 인권 사상은 그 어떤 명시적인 창시자도 단일한 기원도 갖고 있지 않은 매우 특이한 사상이다. 발생론적으로 서양의 자연권 사상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험난한 도덕적 진보 과정을 거쳐 온 우리 인류 전체의 어떤 협동의 산물이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서구적 인권 사상이 서구의 세계 지배와 더불어 전 세계로 (어떤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보편화되었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통념은 사실은 완전한 잘못이다. 탤벗이 잘 보여주듯이, 인권은 근대 이전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근대 이후의 서구 사회에서도 아주 낯설었으며, 비서구 사회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인권을 발전시키고 수용해 왔다.

한국 사회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인권을 신장시켜 온 것이 단지 서양을 추종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며,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독재자를 쫓아 낸 인민들이 그저 서양을 모방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지금도 함께 모색하고 고민하며 인권과 그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래서 단 하나의 유일하게 타당한 '인권의 철학' 같은 것은 없다. 인권을 정당화하고 정초하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제안'일 뿐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접근이 인권의 설득력을 가장 돋보이게 하고 인권의 실천을 가장 잘 이끌어 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지 유일하게 올바른 인권의 철학적 기초 같은 것을 찾는 것이 과제는 아니다.

그래서 인권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접근법과 해석이 있다는 것을 인권 사상의 약점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오히려 그 사실은 인권 사상의 커다란 장점으로서, 인권이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권과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착근되는 데 본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인권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 발생 맥락의 서구적 자연권 사상 전통 같은 것을 함께 받아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

이 책에서 전개되고 있는 탤벗의 인권 철학은 서구, 특히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정치 및 도덕 철학 전통이 인권을 위해 지금껏 내 놓은 가장 정교하고 또 체계적으로 잘 다듬어진 정당화 시도들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책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지닌 도덕적 가치에 기반을 둔 인권이 지닌 도덕적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과 관련하여서는 조금의 우유부단함도 허용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단호함'을 보이면서도, '인식론적으로는 겸손하게' 인권적 도덕 판단의 오류 가능성을 솔직히 인정하는 새로운 인권 철학적 모색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와 같은 접근법은 인권에 대한 문화상대주의적 도전에 현혹되지 않으면서도 또한 인권과 관련한 '도덕적 제국주의'의 가능성도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동안 인권의 보편성 주장이 곳곳에서 부닥쳐야 했던 많은 난제들을 해결 해 줄 수 있다.

탤벗은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유익한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스스로에게 바람직한지에 대해 누구든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데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인권을 끌어내서 정당화하려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인권 철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탤벗은 서구 철학의 지금까지의 '증명 패러다임'을 버리고 그가 밀, 롤스, 하버마스에게서 재구성적으로 얻어 낸 '균형 패러다임'을 통해서 그러한 인권이 어떻게 단지 서구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문화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단순한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에게 인권은 기본적으로 바로 그런 자율성에 대한 존중이 역사적으로 심화되고 발전하는 가운데 '발견'된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인권 철학적 모색이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해 이 짧은 글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다. 사실 나 역시 그 동안 그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논증 목표를 가지고서 나름의 인권 철학적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인권의 철학 : 자유주의를 넘어, 동서양 이분법을 넘어>, 새물결 펴냄),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동아시아적인 사상 및 문화 전통이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그 동안 인권 철학적 논의를 지배해 왔던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논의 틀을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할 수 있는, 곧 포용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는 시각을 확립하려 해 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인권 철학 일반이 너무 강하게 롤스 식의 '자유 우선성의 원칙'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지 미덥잖아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저 탤벗의 새로운 시도도 커다란 예외는 아닌 것 같다는 정도만 이야기해 두자.

물론 탤벗은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자율'이 지니는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에서 출발하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의 접근법의 동기와 그 논증 목표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역시 (그에게는 불가피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적인 전통을 중심에 두고 인권의 보편성을 사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조금은 의심스럽다. 또 그가 비록 몇몇 사회권을 '기본적 인권'의 범주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협애화의 함정을 피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론 전략에서는 불가피하기는 해도 내가 보기에 조금은 지나치다 싶게 교육권에 큰 무게를 두면서도 주택, 의료, 고용 등과 관련된 다른 사회권들은 너무 약하게 또는 아마도 파생적인 권리로 취급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도 그의 논의의 자유주의적인 편향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이런 접근법으로서는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혐의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하지 않을지 걱정이다.

물론 나의 초점은 그가 이 책에서 제대로 논박해 내고 있는 문화상대주의적 인식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자율성이 지닌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를 확신하더라도, 나도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 확신을 공유하지만, '도덕적 개인주의' 전통이 약했던 우리의 동아시아적 사상 및 문화 전통이라는 배경 위에서는 인권의 정당화를 위해 조금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인권에 대한 의사소통적 상호 인정의 차원이다. 그래서 나는 인권을 탤벗처럼 '발견'이라는 관점에서보다는 기본적으로 상처 입을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덕적-정치적 '구성'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접근법은 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공화주의적'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가 샌델의 정의론에 열광하면서도 정작 샌델의 정치철학에서 우리가 진짜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한 측면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샌델이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기는 '시민적 공화주의'다. 그러나 내 생각에 부당하게도 샌델의 것을 포함한 서구 공화주의 전통 일반은 인권에 대해 상대적으로 냉담했다고 할 수 있는데, 샌델이 인권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지 싶다.)

물론 단순히 내가 옳고 그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시도는 그가 자라 온 지적 배경 위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와 같은 비서구 문화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설득력 있게 인권이라는 본원적 정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며, 충분히 주의 깊게 경청하며 배울 가치가 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대화를 통해 인권에 대한 상호문화적 이해가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이며 철학적 정당화도 더 두터워지고 그 수준도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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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번역과 관련해서 몇 마디 해 두자. 역자는 매우 성실하게 그리고 많은 고뇌를 하면서 결코 녹녹치 않을 이 책의 번역 작업을 완수해 준 것 같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매우 깔끔하다. 크게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는 가령 'legitimacy'를 모두 '적법성'이라고 해버림으로써 '정당성'이라고 해야 더 나을 것 같은 문맥에서 저자의 주장에 대한 빠른 이해를 방해하는 등의 사소한 실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또 그는 이 책에서는 아주 중요한 개념인 'paternalism'을 일관되게 '온정주의'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관행이라(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가령 샌델 책에서도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반드시 그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조금은 더 주의가 필요했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 싶다. 그것은 온정주의가 아니라 '간섭주의'라 해야 맞다. 남의 일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며 당사자 스스로 해야 할 판단을 억압하고서는 이래라 저래라 남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며 간섭하려 드는 태도나 신념을 '온정주의'라고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런 태도나 신념에 대해 그야말로 지나치게 '온정적인' 처사라 할 수밖에 없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런 간섭주의를 극복하는 것에서 인권의 기원을 찾고 있는 탤벗의 의도에는 아주 많이 어긋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어를 잘 모르거나 철학 훈련이 부족한 독자로서는 논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이 책이 좀 더 많은 독자들을 찾아 이런 잘못이 교정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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