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를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은 좋지 못한 법이다. 결국은 탈이 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 우리는 이미 국가 독점적 계획 극단주의의 붕괴를 목도했었다. 다시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의 발발과 함께 우리는 그 정반대물인 시장 극단과 사적 독점주의의 붕괴 현상을 맞고 있다.
일찍이 자유 시장주의의 선봉장인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의 "치명적 오만"에 대해 비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이제 그 반대로 자유 시장주의와 금융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의 "치명적 오만"을 고발해야 한다. 자유 시장 경제학, "그들의" 경제학에 맞서 더불어 잘사는 "우리들의" 경제학을 세워야 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바보야, 문제는 복지야"라는 새 깃발을 세우고 정말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복지가 뭔지, "경제"가 뭔지조차도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전환 시대 경제학이 해야 할 일은 주객이 전도되어 물구나무선 채 있는 경제학을 바로 세워, 시장 극단과 계획 극단을 모두 넘는 '더불어 숲'의 경제학, 협력과 연대의 새 진보 경제학 패러다임(new progressive economics for cooperation and solidarity, PECS)을 여는 것, 이를 통해 '더불어 숲'의 경제, 살림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개시되고 계획 극단주의의 붕괴로 힘을 받았던 고삐 풀린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거대한 실패 앞에 책임을 져야 할 친구들은 많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고 조장해온 자들은 끝까지 그 책임을 정부 경제 정책 탓으로 돌리려고 애를 쓴다. 시장은 합리적이며 자동적 조절력을 갖고 있다고 되뇌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한 발 물러난 자들은 "시장의 실패"는 작은 실패에 불과하고 "정부의 실패"야 말로 엄청 더 큰 실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가려지겠는가. 2008년 시장의 거대한 실패와 함께 자유 시장 경제학은 코너에 몰렸다.
우리가 조앤 로빈슨을 따라 경제학이 1930년대 대공황에 직면하여 제1의 위기, 그리고 1970년대 초 대불황의 시작과 함께 제2의 위기에 빠졌었다고 본다면, 오늘날 경제학은 "제3의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너진 경제를 제대로 살려내려면 경제학 프레임의 혁신은 필수적이다.
위기의 경제학, 그 대안은?
2008년 위기 이후 경제학의 새로운 추세에서 가장 많은 빛을 받게 된 것은 아무래도 케인스 경제학이다. 우리는 "케인스가 다시 부활했다"라든가,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는 말도 듣는다. 이는 존 케인스가 자본주의하 정부 개입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또 금융 시장 규제의 옹호자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케인스인가가 문제다. 케인스 경제학을 들먹이는 사람도 가지각색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케인스주의는 이미 전전 뉴딜 전성기 때 가졌던 반독점 지향의 "사회적 케인스주의" 성격을 탈각했었다. 그래서 독점 대기업과 협력, 공생하는 틀 위에서 정부 지출과 군사 지출을 늘리고 어느 정도 감세 정책도 구사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속류적" 또는 "상업적" 케인스주의 그리고 군사적 케인스주의로 변질했다. 이어 군사적 케인스주의는 레이거노믹스(레이건식 신자유주의)의 필수적 구성 부분으로도 자리 잡았다. 이어서 클린턴 시기에 오면, 케인스주의는 루빈식 물 타기로 영 허물허물한 꼴이 된다.
케네디-존슨 시기 케인스주의는 속류적이라 해도 금융 시장과 나라 국경을 통제했음에 반해, 로버트 루빈이 주도한 클린턴식, "제3의 길"의 신케인스주의는 탈규제된 금융 시장에 올라탔을 뿐더러 강도 높게 금융 세계화를 밀고 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바마에 오면 정부가 앞장서 위기 주범인 월가 금융 권력에 엄청난 구제 금융을 퍼주고 비용을 사회적으로 전가하는 것조차 케인스주의로 불린다.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 시기, 아까운 복지 재정을 까먹으며 4대강 사업을 불도저식으로 밀고 가는 토건, 삽질 개발주의도 일종의 한국판 케인스주의라 하겠다.
|
▲ <경제학을 리콜하라>(이정전 지음, 김영사 펴냄). ⓒ이정전 |
이런 판국이니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 해도 도무지 그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위기 이후 경제학의 혁신은 단지 케인스의 손을 들어주거나 또 다른 인물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더 툭 트인, 복합적 경제학적 사유에 목이 마르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을 리콜하라"는 이정전의 목소리는 정말 시의적절하다.
이정전의 <경제학을 리콜하라>(김영사 펴냄)는 위기의 경제학이 던지는 도전과 마주하여 이 땅의 책임 있는 지식인이 내 놓은 진중한 응답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화와 질주하는 속도의 시대에 허다한 연구들이 너무 단기성과에 급급하거나 그때그때 이슈에 매달려 호흡이 짧은 폐단을 보이는 걸 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책은 시대의 화두와 마주하되 조급증에 걸리지 않고 긴 호흡으로 묵직하게 간다. 그러면서 저 깊은 지식의 샘에서 오래된 미래의 물을 길러 온다.
무엇보다 이정전의 경제학은 저자의 표현으로는 철학이 있는 "고차원 경제학"(397)이며, 내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통섭적 경제학"이다. 중심은 물론 경제학이지만 결코 파편화된, 일차원적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성을 껴안으며 삶의 풍요, 인간의 풍요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윤리적 경제학"이다. <경제학을 리콜하라>라는 책은 위기에 대한 자유 시장 경제학의 책임을 질타하며 이 땅에서 진보 경제학의 존재와 높은 안목을 증거하는 귀한 성과다.
그리고 <경제학을 리콜하라>는 현역에서 물러나 "명예교수" 직함을 달게 된 선배 경제학자의 쉼 없는 열정이 후학의 안일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질책의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미 그의 명저 <토지경제학>으로부터 한국의 토지 제도가 서구식 계획 지향형이 아니라 미국·일본식의 시장 지향형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의 공영 개발 방식이 스웨덴, 영국, 싱가포르, 홍콩 등의 공공 임대 보유제와 달리 개발 이익을 사적으로 전유하는 부당한 방식임을 배운 바 있는데, 이번에는 위기 이후로 가는 더 넓은 경제학의 세계에 대해 배운다.
행복의 경제학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경제학을 리콜하라>라는 책은 어떤 책인가. 책의 맨 앞에서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이유, 그래서 "그들의" 경제학이 리콜당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비현실적인 인간관 즉 인간이 '합리적·이기적으로 행동한다', '효용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핵심 가정을 문제 삼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이 적절히 지적했던 "합리적 바보(rational fools)"가 도마 위에 오른다.
그렇지만 이 책을 쓰게 된 더 중요한 이야기는 책의 맨 뒤, 저자 후기를 봐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독자들이 저자 후기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후기는 "그들의" 경제학이 거의 병적으로 자원 이용의 효율성과 성장에 집착한다는 점을 지목한다. "부자 되세요"의 가치를 높이 치든 이명박 정부의 머리에 들어 있는 경제학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효율과 풍요를 얻는다 해도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경제 대국이 돼도 생활 빈국의 처지라면, 인간이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것이 저자가 돈 가치가 아니라 행복 가치를 내세우는 이유다. 왜 성장을 해야 하는지, 어떤 성장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수출이 늘고 주가가 올라도 부자만 살찌고 서민은 점점 거지가 되고 삼성 재벌만 성장 과실을 독차지하는 "삼성 공화국" 꼴이라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래서 당연히 저자는 맹목적 성장 숭배를 넘어 빈부 격차와 사회 갈등을 무겁게 보는 경제학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독자들은 긴 호흡으로, 묵직하고, 진중하게 가는 이 책에 대해 혹시나 부담을 갖고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래서 나의 글이 할 가장 중요한 일이란 독자들이 그 부담을 덜고 최대한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 법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먼저 책 제목부터 생각해 보자. 나는 독자들이 "경제학을 리콜하라"라는 책 제목에서 "리콜(recall)"이라는 말의 뜻을 중의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싶다. 이 책에서 리콜이라는 말은 불량품으로 전락한 그들의 경제학을 "소환"해서 보수(補修)를 요구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또 리콜은 새로운 경제학을 하기 위해 고전을 불러낸다는 뜻도 갖고 있다. 즉 리콜은 온고지신(溫故知新), 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경제학을 리콜하라"는 책의 주된 내용은 고전을 새롭게 읽으면서 위기 이후 경제학의 새 길을 찾는 것이다. 다름 아닌 고전을 통해 독자들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둘째, 나는 독자들이 이 책에서 대가들의 사상·이론과 함께 그 사람들의 생애와 됨됨이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헨리 조지는 오늘날까지 수백만 부가 팔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책이라고 하는<진보와 빈곤>의 저자이고 20세기 전까지는 카를 마르크스보다도 더 유명했는데, 그런 사람이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대학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했단다. 데이비드 리카도도 그랬다고 한다(195쪽). 케인스는 어릴 때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돌아다닌 사람이란다. 그는 돈 버는 재주도 남달랐다(324~326쪽).
또 케인스는 스승인 알프레드 마샬을 넘어서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상당 부분 성공했으나, 경제학의 수학화를 경계한 점에서는 아주 스승을 닮았다. ( 그렇지만 마샬은 어찌된 영문인지 후계자 자리를 케인스가 아니라 복지경제학으로 유명한 아서 피구에게 넘겨주었다). 수학이나 영어를 잘하는 것도, 무작정 열공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케인스의 일화가 말하는 것은 문제의식을 바로 갖고 현실과 소통하고 통섭적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되면 좀 심하다 싶은 이야기가 많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고집쟁이, 건방쟁이, 욕쟁이, 낭비벽, 술주정꾼, 도박꾼, 방탕아, 난봉꾼, 불효자 등등, 한마디로 인격적 불량품이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셋째, 그런데 우리는 경제학 고전을 어떻게 새롭게 읽어야 하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만만찮은, 어려운 문제이고 독자들도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도 있는데, 다양한 고전 이론들과 대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배가 되도록 꿰어야 할지, 그 비법이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서 말 구슬로 흩어져 버리거나, 지루해지기 딱 십상이다. 우리는 고전의 울창한 숲에서 새 길을 찾기는커녕 아예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자. 이 책은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헨리 조지, 카를 마르크스, "존" 케인스(이상하게 저자는 케인스에 대해서만 이름을 달아주지 않는다)등을 주역으로, 그리고 간간히 저 걸출한 고대인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리콜하고 있지만,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바로는, 예컨대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같이 앉아 소통하기가 매우 불편한 사이가 아닌가. 또 케인스와 마르크스의 사이도 그리 편편치가 않다. 얼핏 생각하기에 서로 불편할 이들 대가들을 같이 앉게 해서 구슬을 보배로 꿰어낸 것이야말로 이 책의 진수다. 구슬 꿰는 법을 알려 주는 것, 바로 그것이 <경제학을 리콜하라>의 최대의 기여이자 이정전 통섭 경제학의 실력을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다.
경제학을 '리콜'하는 세 가지 방법
이를 위해 이정전은 들어가는 말과 저자 후기, 특히 후기에서 큰 지도를 알려 주고 있다. 즉 저자가 말하는 "고전을 리콜하는 법"은 경제학 대가들의 공통점이 단지 잘 놀고 어쩌고 했다라거나,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의 바탕위에 선 "고차원 경제학"을 했다는 걸 알고 그것을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21, 397쪽). 이것이 첫 번째 고전 리콜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스미스에서부터 케인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경제학이 제각기 어떤 철학적, 인문적 기반과 지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해서 읽어야 한다.
둘째, 나아가 이정전은 고전의 고차원 경제학 속에서, 오늘날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행복 경제학과 행태 경제학의 주요 내용을 발굴하려고 시도한다. 행복 경제학은 그런대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 저자가 쓴 별도의 책도 있다. 그런데 행태 경제학(behavioral economics)(보통 '행동 경제학'이라고 번역하지만 저자처럼 '행태 경제학'이 더 적절할 것 같다)은 덜 알려져 있는 편이라 간단히 부연한다면, 이 이론은 경제 주체의 선택 및 의사 결정이 일관성도 없고 정보 처리에도 아무 미숙하다고 본다. 이 때문에 우리들의 경제 생활에는 '사익 추구→공익 실현'의 주류 프레임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anamolies)이 허다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행태 경제학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신고전파의 기본 가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그간 경제학에서 낯설었던 실험이라는 경험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기존 경제학에 큰 충격을 준 새 흐름이다. 저자는 이 행태 경제학과 행복 경제학이 경제학의 재생을 위해 희망을 준다는 판단 아래 고전에서 그 선구자적 자취들을 캐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만하면 <경제학을 리콜하라>가 고전의 "정리 소개"라는 저자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고전의 새로운 재해독, 즉 법고창신의 의미를 가진 책이라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넷째, 나는 이정전이 머리말이나 후기에서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책 내용 속에는 꽉 차게 실려 있는 고전 리콜 법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안타깝게 새로운 진보 개혁을 염원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케인스도 말했듯이, 낡은 사고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구(특권) 체제와 거기에 둥지를 틀고 버티고 있는 특권·기득권 세력 탓이 가장 크다. 대한민국의 경우, 지난 날 세계 경제 사상 흔치 않게 성장 기적을 이뤄놓고도 민주화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극심한 양극화, 양질의 일자리 빈곤, 후진적 복지로 고통 받는 이른바 "민주화의 역설"과 부조리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나라 경제가 재벌에 발목 잡힌 문제가 있다.
삼성을 꼭짓점으로 해서 지금 재벌들이 벌이고 있는 온갖 천민적이고 오만한 사익 추구 행태를 보라. 다수 국민들은 생존의 고통에 시달리며 복지 국가로 가자고 하지만 재벌들이 스트라이크를 놓으면, 재벌들을 복지 국가로 싣고 가는 민주적, 시민적 규율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 길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삼성 공화국" 상황은 복지 국가로 가는 한국적 길에서 중대한 장벽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가 리콜하고 있는 경제학의 마스터들이 어떻게 구체제 및 사익 특권 세력과 싸우며 자신들의 고유한 경제학 경지를 개척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즉 공정-협동-연대-행복 경제의 길을 여는데 있어 어떤 보수적 장벽과 마주하며 씨름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스미스의 경우는 중상주의적 특권 체제와, 리카도와 조지는 지가 상승, 토지 투기 및 지주 계급과, 마르크스는 자본제적 특권 체제 및 계급 권력과, 케인스는 금융 투기 거품 및 금융 권력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 저마다 구축한 경제학 체계는 달랐고 독특했지만, 특권적 사익 체제 및 불로소득( 넓은 의미의 지대) 세력을 상대로 싸우며 진보 개혁의 새벽을 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인다. 나는 당대의 주된 모순과 대면하기, 그리고 보편적으로 좋은 삶을 추구하기, 이렇게 두 바퀴에 착안해서 고전을 보는 것이 <경제학을 리콜하라>를 더 잘, 재미있게 읽고 배우는 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제안한다.
경제학자들의 갈등에서 찾을 지혜는?
그렇지만 경제학에 대해 나름대로 주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경제학을 리콜하라>의 고전 다시 읽기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좀 보태고 싶을 것이다. 먼저 서술 방식 문제인데, 고전 리콜 법에 대해 좀 더 자상한 로드맵을 쥐어 주지 않은데 대해 독자들이 불친절하다는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 저자는 고차원의 통섭 경제학적 관점, 그리고 행태·행복 경제학으로 고전 다시 보기라는 두 가지 지침을 주긴 했다. 그러나 책머리에서 이 두 가지 지침을 좀 더 풀어서 스미스에서 케인스까지를 엮는 구체적 방법을 설명해 주었더라면 독자들에게도 친절하고 책의 모양새도 더 짜임새를 갖출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저자가 말했듯이 고전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고차원의 통섭적, 윤리적 경제학을 했고 행복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윤리, 그들이 추구한 행복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들의 체제관, 그들이 추구한 체제 비전도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공통점을 찾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못지않게 차이와 갈등 지점들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예컨대 중상주의적 구특권 체제를 비판하고 자유 경쟁, 자유 무역을 지향한 스미스와 자본제적 특권 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 마르크스에서 공통점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개개인별로 조금씩 언급해 보겠다.
먼저, 스미스의 경우 <도덕감정론>의 스미스와 <국부론>의 스미스가 긴장관계에 있음은 스미스 사상에 대한 전문 연구들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다. 이는 존 포칵의 책, <마키아벨리언 모멘트(The Machiavellian Moment: Florentine Political Thought and the Atlantic Republican Tradition)>에서도 잘 말하고 있듯이, 부(wealth)와 덕(virtue) 간의 갈등이냐 보완이냐로 논의되어 왔던 오랜 문제다. 그렇지만 스미스가 시장에서 사익 추구가 공익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법과 정의가 확립되어야 함을 말했다 해도, 그 법과 정의는 아무래도 상업 사회를 작동시키기 위한 법과 정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는 경제적 자유주의-자유 방임주의가 아니라-를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저자가 특권적 지대 추구를 비판할 때 조지 스티글러나 고든 툴럭 같은 학자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인용하는 것도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 이들은 자유 시장 경제학의 대표적 논자들이기 때문이다. 또 리카도의 경우는 사실 오늘날 경제학의 전환적 흐름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 행동론에서나 경제 체계론에서나 기계론적, 물리학적, 자연 필연주의적 사고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이 점에서 리카도와 신고전파 경제학이 매우 흡사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그렇게 본다면 리카도는 저자가 제시하는 고차원 경제학 그리고 행태·행복 경제학의 지침에는 영 맞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런 경제학의 사조에 대해 일찍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에서 마샬은 통탄할 일이라며 소리 높여 비판한 바 있다. 이 책에서 리카도와 헨리 조지는 "지가 상승을 몰락의 징조로 본 학자들"로 같이 묶여 있지만, 조지조차도 리카도의 차액 지대설이 지대의 증가를 인구 증가와 수확 체감에 귀착시킴으로써 맬서스의 인구론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고 한다(<헨리 조지>(경북대학교출판부 펴냄), 182쪽). 요컨대 <경제학을 리콜하라>의 구성에서 리카도 같은 사람은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끼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에 대한 서술은 그중 분량도 많고 저자가 공을 퍽 많이 들인 부분이기도 하다. 날 더러 이 책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을 묻는다면 저자의 마르크스 해석 부분을 들 것이다. 저자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별도로 <두 경제학의 이야기>를 쓴 바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그 책도 같이 보면 더 좋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이정전 선생의 통섭 경제학적 독해는,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어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의 연구와 견주어도 단연 돋보인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그는 죄수의 딜레마 논리를 도입하여, 자본제적 사적 소유 및 자본가 계급의 기득권이 협력으로 모두 승자가 되는 길을 가로막는다고 본다. 이는 현대 포스트발라적 진보 경제학의 흐름과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하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마르크스의 윤리학이 단지 정의의 윤리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기원을 갖는 행복의 윤리학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정전의 이런 통섭적 마르크스 해석에 동감하면서도, 두 가지 점을 지적해 보겠다. 하나는, 저자 방식대로 마르크스를 읽으려면, <자본론>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론>의 핵심 논리는 시장에서 자본과 노동력의 등가 교환, 공장의 '비밀 실험실'에서 착취라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론적 비판의 틀이며, 자유주의 사상적 요소가 깊이 들어있는 협소한 비판이라 하겠다. 저자가 의도하는 통섭적, 행복론적 관점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 될 수가 없다. 거기에 비한다면 오히려 노동력 상품화가 가져오는 삶의 실체적 터전의 해체와 인간 총체성의 황폐화를 드러낸,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의 비판이 더 예리하고 심대하다 할 것이다.
둘째, 이와 관련하여 이정전은 케인스가 "화폐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경제학자"라고 언급하면서도 마르크스의 화폐론, 그리고 이와 밀접히 연동된 '자본'의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사실 <자본론> 앞부분에서 전개하고 있는 상품-가치-화폐-자본의 논리 구조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른바 가치 형태와 실체의 문제야말로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사를 수놓은 오래고도 새로운 논쟁적 주제인데, 저자의 마르크스 독해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 그렇게 본다면 저자의 마르크스 리콜하기는 아직 미완으로 열려 있다 하겠다.
케인스 리콜에 대해서는 한마디만 하려고 하는데, 케인스가 <일반이론> 말미에서 제안한 이른바 "투자의 사회화" 대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투자의 사회화"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 실정이지만, 여하튼 이 대목은 케인스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지점이면서, 포스트케인스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할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케인스와 마르크스가 같이 앉아 대화하는 교량 역할을 할 수도 있는데, 아쉽게 빠져 있다. 이 책에서 케인스 리콜은 다른 대가들의 서술에 비할 때 대안론이 미약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서술 전체와 관련된 것으로 내가 아는 한, 행복 경제학이라면 센과 마르타 누스봄이 제창한 능력 접근(capability approach)을 빠뜨릴 수 없는데, 저자가 이 접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고전의 대가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주역으로 올릴 일은 아니겠지만, 행복 또는 복지의 개념에서 이들에 대한 논의를 빠뜨리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자는 접근 방법론에서 행태 경제학과 행복 경제학의 두 견지에서 고전을 리콜하고 성장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 견해를 보이고 있지만, 서술 내용상으로는 모두를 위한 성장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 성장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현대의 제도 및 진화 경제학의 도도한 흐름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 흐름으로 들어오면, 스미스의 자유주의가 중상주의적 "지대 추구(rent-seeking)" 체제를 비판한 부분도 결코 스미스의 손만 들어줄 수는 없는, 복잡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불생산적 지대 추구 체제도 있지만 "지대에 기반을 둔 발전(rent-based development)"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성장 기적도 일종의 지대 기반 발전 모델이다. 따라서 자유 시장 경제학의 주장처럼 지대를 없애고 완전 경쟁 체제를 만드는 게 능사가 아니라, 지대를 관리하는 방식이 관건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스미스 비판은 워낙 잘 알려져 있는 바지만, 케인스도 자유주의에 대해 중상주의를 옹호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을 리콜하면 덤으로…
<경제학을 리콜하라>라는 책에 대해 필자가 보탠 몇 마디는 군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만 하는 주례사 서평은 오히려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소견에서 부쳐 본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쓴 최대의 목적은 되도록 많은 독자들이 <경제학을 리콜하라>를 더 잘 읽도록 도우기 위한 것이다. 장담하건데, 독자들은 정말 이 책에서 고전에 주눅 들지 않고 고전을 리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복지국가 의제를 올려놓고 씨름하고 있지만, 정작 복지가 뭔지, 정말 잘 사는 게 뭔지에 대한 논의는 뒷전이다. 독자들은 <경제학을 리콜하라>에서 복지론을 리콜하는 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