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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통해 알랭 드 보통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작품을 눈여겨 봐왔는데, <우리는 사랑일까>를 통해 한 번 더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환기하게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은 똑같은 상황을 두고 남자와 여자가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 뛰어난 심리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수긍하게 만든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광고회사에 다니는 '몽상가' 앨리스와 파티에서 만나게 된 에릭의 사랑, 그리고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누구나 낭만적인 만남에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자신이 가공한 상상에 기초해 실제의 사랑보다 더 미화되고, 아름답게 포장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애초에 사랑에 빠지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랑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적어도 고통스런 무언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을 원하는 건 아닐까. 사랑은 '동사'다. 움직이는 '무엇'이다. 그렇게 태어났기에 기질적으로 한 곳에 머물기는 힘든가 보다.
사랑은 상대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는 일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에서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사랑이란 일부분을 빚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에릭은 빚을 제때 갚긴 했지만, 앨리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너무 급하게 빚을 갚고 그대로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 남자는 그녀와 똑같은 감정의 성숙을 실현하지 못했다. - 본문 중에서
알랭 드 보통은 가볍고 통속적으로 흐르기 쉬운 사랑이야기에 철학 이야기를 동원하고, 유머를 곁들인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의 간극을 조절해 나간다. '사랑은 상대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는 일'이라니, 그런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좀처럼 다툴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은데,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고통은 성숙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천생연분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 맞는 두 주인공은 서서히 권태에 빠져든다. 앨리스는 점점 에릭이 자신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되지만, 자신은 여전히 '에릭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으며 사랑을 놓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시작하게 되고 마침내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고통은 성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함께 할 수 있는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한동안 합치되었던 것은, 넓고 갈림길이 많은 길에서 일어난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에릭이 줄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런던의 레스토랑을 훤히 아는 것, 우아한 아파트, 사회의 사다리에서 굳건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녀도 얻을 수 있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 본문 중에서
그런데 에릭은 앨리스의 결별선언에 '쿨'하게 답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애원한다. 앨리스는 겉으로는 대담한 척했지만, 에릭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헤치고 지나가며 드는 상실감에 마음이 아픈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에릭을 사랑해서 드는 감정이 아님을 알기에 앨리스는 '관계의 회복'에 대해서 단호했다. 사랑에 상처받은 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그런 앨리스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에릭과 같이 있으면 앨리스는 항상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그에 비해 필립은 어떤 생각이 들게 하는가. 필립과는 도자기 전시회에 동행하게 되면서 차츰 가까워졌다. 물론 그때는 에릭이 있었기에 다가서려는 서로를 의식적으로 거부해 관계가 진전되지 못했지만, 에릭과의 결별 후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어진 것이다.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에릭은 실제로 앨리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자신과 취향과 가치관이 비슷하며 따뜻하고 다정한 필립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사랑일까>는 끝을 맺는다.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솔직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능가할 만한 그의 소설은 없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독자들은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로지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유머와 재치, 철학적 사유가 곁들어진 연애소설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