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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라이브즈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 다코타 패닝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영화는 꼭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 같다.
제목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9개의 단편들이 모여 영화 한 편을 이루고 있었다. 우연히 들른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만난 <나인 라이브즈>, 이 영화를 볼 생각은 없었는데 기대 않고 본 영화가 이토록 긴 여운을 안겨주다니, 일견 그것은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단편마다 감독이 의도한 어떤 것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일부는 문화적 차이로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영화는 그 내용을 다시금 음미해보게 만들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산드라는 한 달에 한 번 딸의 방문을 기다리는 죄수다. 하고 많은 날 중 하필이면 오늘, 여러 대의 전화 가운데 자신의 것만이 고장 나 딸과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산드라에게는 몹시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산드라는 난동을 부린다. 교도관들은 즉시 산드라를 제지하고 나서는데 그 장면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온다. 딸과 대화하고 싶은 어머니의 실낱같은 희망을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되는데, 면회 전에 미리 기계결함 여부를 확인해주면 안 되었을까.
폐쇄된 생활에서 오로지 낙이라고는 딸과의 만남뿐이었는데 그것마저 결렬되었을 때, 누구나 산드라처럼 흥분 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 같다. 다시 시작될 한 달이라는 시간이 또 얼마나 더디 흐를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다이애나는 동네마트에서 우연히 옛사랑을 만난다. 다이애나가 몇 번이고 카트를 이리저리 돌리며 누군가를 찾아보고 있는 모습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저리도 다급하게 쫓아가고 있는 걸까. 알고 보니 그는 옛사랑이었다.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 만나게 된 두 사람,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다.
사랑의 감정이 소진되어 이제 찾아볼 수 없다고 하기에 두 사람의 눈빛은 너무나 진지했다. 지나치게 짧은 인사다 싶으면서도 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듯한 두 사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았는데 결국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은 아직 남아있는 '사랑'이었다.
애써 감정을 감추고 다른 물건을 고르는 척하지만, 방금 일어난 재회의 순간이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두 사람은 가끔씩 서로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삭인 다이애나는 이건 아니라고 되뇌면서도 옛사랑을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데이미언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있을 땐 자주 어긋나곤 했지만 헤어져 있어보니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부류들이 있다. 아마 이들도 그랬던 게 아닐까. 데이미언은 다이애나의 배에 입맞춤을 하고 사라지며 두 번째 에피소드도 막을 내린다.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되었지만 다이애나의 말이 가슴 속 깊이 각인되어 자꾸만 떠올랐다.
"너랑 겨우 5분 있었는데, 내 인생이 갑자기 허구처럼 느껴져…."
누구나 가슴 속에 하나쯤은 사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화에서 본 것이건, 실제 상황이었건, 소설에서건 간에.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의 모든 것을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단편영화의 힘이 아닐까.
매기는 1년에 한 번 누군가의 무덤을 찾는다. 처음에는 딸 마리아와 함께 가지만 돌아갈 때는 홀로 돌아간다. 딸과 함께 담소를 나누다가도 울음을 터뜨리는 매기, 어쩐지 모녀 사이라고 하기에 둘의 나이 차는 너무도 많아 보인다.
아마도 매기는 마리아의 무덤을 찾았던 게 아닐까. 1년에 한 번 딸을 만나러 오는 것이리라.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도 몰랐던 사실이다. 그 후에 몰려오는 감정들은 오로지 관객들의 몫이었다.
그 외에도 두 사람의 비밀을 친구 앞에서 털어 놓는 게 못마땅한 소니아, 전남편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뜻밖의 사랑 고백을 받는 로나, 어린 시절 아빠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던 간호사 홀리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휘몰아치는 듯 격정적이면서도 면밀하게 흐르는 감정의 곡선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감독은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로 유명한 로드리고 가르시아다.
어떤 화두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관객들에게 느끼라고 무언의 말을 하고 있는 로드리고 가르시아의 <나인 라이브즈>는 따뜻하게 우리들의 가슴 속에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