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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Blu ㅣ 냉정과 열정 사이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덧 시간은 쏜살같이 우리를 1월 하순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미 몇 주 전에 내린 비로 정원수들이 잎을 다 잃어버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에서 새삼 겨울을 느끼며 <냉정과 열정사이>(츠지 히토나리, 블루편)를 읽었다. 소설과 영화를 이미 본 터라 권태롭지는 않을까 우려하면서 책장을 펼쳤는데, 그 순간 기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화자가 되어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1인칭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맥락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는 소설이라기보다 누군가 써 놓은 일기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친밀하게 독자를 이끌었다.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그에 반하는 슬픈 감정의 기복으로 쥰세이는 힘겹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가고 오지 않을 것은 기다리지 않음이 현명하고, 애당초 아닌 일에는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말장난처럼 흘린 약속을 오랜 세월 잊지 않고, 재회하는 두 주인공의 설정이 어쩐지 현실감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스무 살 언저리, 사랑하게 되는 쥰세이와 아오이는 샘이 날만큼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행복했다. 아오이를 내 마음에 가득 담아 둘 수 있었으므로. 매일,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는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공원의 나지막한 언덕 위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뿌옇게 밝히는 달을 즐겨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오이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렇게 행복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딘가 미래를 신용하지 않는 듯한 쓸쓸한 표정을 보일 때가 있어서, 때로 나는 불안했다.
"사랑해." 처음으로 그 말을 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그 행복한 시간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날. 그 때까지 우리는 그 시대의 젊은이답지 않게, 좋아해, 라는 말을 주고받았었다. - 본문 중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면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날도 찾아오게 마련이라고 어떤 이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건, 익숙함과 권태에서 비롯되었건...
황금에 눈이 어두운 쥰세이의 아버지 때문에 쥰세이와 아오이는 이별하게 된다. 아오이의 낙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쥰세이는 아오이에게 떠나라고 하고, 아오이는 끝내 낙태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둘의 교제를 주선했던 다카시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쥰세이는 그제야 아버지를 찾아가 원망하지만 시간을 되돌리기에 그들은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
만약, 당시에 오해가 풀렸더라면 쥰세이와 아오이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리고 비록 그들이 사흘간의 재회 후 다시 헤어지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강렬히 드는 건 왜일까. 소설을 읽으며 독자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도 책을 읽는 기쁨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고 있을 이에게는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사랑하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사랑을 꿈꾸게 하는, 언제고 다시 읽어도 좋을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는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