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제1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영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상진이 밤에 보았던 은빛 여우는 환영이었을까? 그것이 가공의 산물이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겠지만 여우를 처음으로 본 날은 첫눈이 내린 날이고 특별한 경험을 한 날이었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지만 여우는 좀처럼 상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여우는 아마도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지금은 힘들지만 꿈꾸는 자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왠지 쓸쓸해 보이는 눈빛으로 여우는 상진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상진은 동네에서 가장 허름한 청운연립, 그것도 옥탑방에 산다. 201호나 301호처럼 호수도 없어 '하늘호'라 스스로 이름 지은 옥탑방에 상진의 가족이 살고 있다.

상진에게는 형이 한 명 있다. 형은 덩치가 상진보다 크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아이다. 그런 형을 둔 덕분에 늘 말썽이 생기면 상진은 가해자, 형은 피해자 처지에 놓이기 일쑤다.

그래서 상진은 언제나 불만이다. 다친 아버지나 모자란 형 대신 이 집의 희망인 상진은 어깨가 무겁다. 기둥이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다.

창문을 열면 노란 물탱크가 보인다. 상진은 거기에다 지난 밤 보았던 은빛 여우도 그리고 1층에 사는 동갑내기 소연의 모습도 그린다. 상진은 무언가 다시 보고 싶은 것을 주문처럼 거기다 그렸다.

만만치 않은 세상과 마주하는 열세 살 소년의 성장기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방 안에 누워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자주 보이면서 집안 분위기는 바뀌어갔다. 건물 폭파작업을 하는 아버지가 부상으로 다리 수술을 하게 돼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어머니가 집의 기둥이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트럭을 타고 장사하다가 여의치 않아 포장마차로 전업했다.

"어머니는 밤늦게 들어와서 씻지도 못하고 돈주머니만 겨우 방 한구석에 끌러놓고 곯아떨어졌다. 아버지가 돈주머니를 들고 절룩거리며 마루로 나왔다. 아버지는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마룻바닥에 편편하게 깔았다. 흐린 불빛 아래 내복 바람으로 등을 구부리고 앉아 옷 위에 대고 돈 주머니를 거꾸로 흔들었다.

(중략) 만 원짜리를 간추린 다음 오천 원, 천 원 순으로 차곡차곡 분리해나갔다. 간추린 지폐를 한 편에 쌓아두고 동전을 분류했다. 아버지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행복해보였다. 한편으로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진지'와 '행복'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그 밤 풍경을 나는 오줌을 누러가다가 목격했다."
(117쪽)

장사가 잘되면서 점점 어머니의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어머니의 유일한 화장품이었던 존슨즈베이비 로션은 먼지를 뽀얗게 덮어쓰게 되었고, 더 향이 진한 화장품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급기야 빨간색이나 진분홍색 립스틱도 화장대 위에 등장했다. 상진은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꼬치 재료를 손질해 꿰고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차츰 집안 분위기가 밝아오는가 했더니, 집주인이 바뀌면서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다른 집들은 임대차계약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 법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는 모양인데, 상진이 사는 옥탑방은 무허가여서 일이 어렵게 된 것이다.

곧 중학생이 될 꿈 많은 소년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여러 상황들이 현재를 힘들게 하지만 상진은 '전인슈타인' 같은 인물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으며 안식을 찾았다. 얼마 후 '전인슈타인' 할아버지마저 떠나버렸지만, 또 다른 어딘가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나타나 줄 것이라고 상진은 믿는다.

"전인슈타인이 색소폰을 집어 들었다. 숨을 고르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색소폰 소리가 내 가슴을 살살 흔들었다. 색소폰 소리에는 서글픔이 배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히 울음이 나왔다. 까닭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방구석에서 64빌딩 도면을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주꾸미를 입 안 한가득 밀어 넣던 모호면(기자 주 - 상진이 형의 별명)이 머릿속으로 스쳐갔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들던 엄마, 그 품에서 풍기던 비릿한 꽁치구이 냄새가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소연이의 하얀 가르마가 어른거렸다. 색소폰은 이 모든 것을 달래주었다."
(156쪽)

열세 살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을 재치 있는 어조로 풀어나가는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는 성장 소설이다. 어려운 상황이 연이어 찾아오더라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따뜻한 감동'을 선물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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