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주유소
유애숙 지음 / 문이당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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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른두 살이 되던 해 봄, 세정은 종합 병원 임상 병리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활달하고 구김살 없는 성격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지니고 있으니 병원 내에서 세정은 뭇 남성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에 몇 바늘 기워야 할 상처가 생겼고 새로 온 레지던트 훈재가 치료해주게 되었다. 다음날 세정에게 배달된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이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직장 내 연애의 여러 유형 가운데 가장 흔한, 일단 소문부터 내고 보자는 방역제 살포형과 잠수함형 중 그들은 후자였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소문에 즉각 반응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아서 그들의 '모든 거래와 진행'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끔 훈재는 초조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이상 증세를 보이긴 했지만 세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고,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것이 마약 금단 현상임을 알게 된다.

훈재가 마약을 하게 된 건 사고로 친구를 잃은 후부터였다.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친구는 죽고 훈재는 중상으로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 후 육체의 고통을 잊기 위해 진통제의 사용량은 늘어만 갔고, 정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약물의존도도 높아갔다.

죽은 친구의 누나가 바로 황 간호사였다. 그녀의 저지로 훈재는 몇 번의 자살이 실패로 돌아갔고 약물도 매번 그녀를 통해 공급받았던 것이다. 황 간호사는 훈재의 치료와 극복을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결국 그들은 돌아오기 힘든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날 수술실에서 갑자기 쓰러진 훈재는 검사를 통해 그것이 금단 현상의 하나라는 사실로 밝혀졌고 그간의 경력을 박탈당했다. 그리고는 뉴욕으로 떠나 요양을 받게 되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이별을 준비했다. 사랑은 늘 실체 없이 사라지지만 이번만큼은 추억 속에 영정이라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는 이미 조등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나는 떠나기 전에 그를 보러 갔다. 얼굴만 잠깐 보고 올 작정이었지만 수많은 의문과 망설임 사이에서 그만 아득하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내 어안 렌즈는 뿌옇게 서린 물기로 청명한 기록 사진을 담아내지 못했다. - 30쪽

서른둘에 찾아온 사랑을 그렇게 허망하게 잃게 되다니 세정은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다.

'잘라 낸 마음의 그루터기에서 물기가 천천히 걷히고 살얼음 같은 얇은 딱지가 앉을 무렵' 훈재에게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너와의 단절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금단 현상은 이제껏 겪었던 어떤 고통보다 더 괴롭고 가혹하다.' 그러나 무서운 세월 앞에서는 최소한의 윤곽만 남긴 채 해체될 것이라며 훈재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세정은 그렇게 훈재를 떠나보냈고, 상처는 아물어 갔다. 서른네 살이 되던 해 줄기차게 청혼해 오던 내과의 방 과장과 세정은 결혼한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황 간호사를 만난 세정은 훈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뉴욕에는 가지도 않았고 떠나기 전날 훈재가 목을 매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세정은 몇 해 전으로 시계를 되돌렸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천식 증세처럼 기관지가 조여드는 괴로움을 느낀다는 세정은 그동안 그를 떠올리며 마음 아팠던 것으로 얼마간 마음의 빚을 탕감해왔다고 생각했다.

세정은 귀에서 들리는 허밍 코러스 같은 소리 때문에 이비인후과 약을 받아왔는데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훈재가 저 세상으로 떠났을 무렵부터 생긴 이명은 어쩌면 훈재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숨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정은 '내 마음을 따라가는 소리로, 기대는 그의 숨결로 간직'할 요량으로 귀울음을 그냥 견딜 작정이라고 했다.

유애숙의 소설집 <장미주유소>에는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위에 소개된 '기대는 숨결' 외에 '이별 클리닉' 표제작 '장미주유소' 뿐 아니라 다른 단편들도 하나 같이 빛났다.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삶과 사랑, 상처와 극복, 인간의 한없이 나약한 모습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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