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고정적인 직업도 없으며, 결혼도 안 했고, 은행에 잔고도 거의 없으며, 꿈꿀 사랑도 없는, 그리고 서른 살에도 그대로일 가능성이 농후한 어쩌면 마흔 살에도 그리 다르지 않을 백수가 여기 있다.

아버지 집에 살고 있으니 집이나 먹을 것 걱정은 없을 테고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서 쓴다. 정신노동은 절대 사양이고 강도 높은 육체노동도 마찬가지다. 피시방이나 편의점, 주유소 같은 곳에서 서연은 잠깐씩 일을 한다.

아르바이트로 번 수입은 대부분 책 사는데 들어갔다. 서연의 유일한 낙이 바로 책을 읽는 것이었으므로. 일하기 싫다기보다는 책 읽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일할 수 없는 서연의 일상으로 메워진 소설은 더도 덜도 아닌 독서광의 일기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지금 책을 읽으면서 노닥노닥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십 대에 읽고 싶은 책이나 읽으면서 지낼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다는 건 어쨌든 축복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끔 심하게 욕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불행이라고 여기지 않는 부모가 있다는 것도. 아버지는 나에게 취직하라고 닦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명함을 가진 직업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78쪽)"

스물여덟 백수 상태의 주인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거나 그 나이가 지난 독자들이 유리할 것이다. 실제로 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인물들을 주위에 포진해 있기에 소설 속 주인공이 이채롭게만 보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부류의 일상을 체계화된 언어에 담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모든 게 불확실해도 책 읽는 순간만은 허무하지 않아

졸업을 하면 으레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천편일률적인 삶의 모델에서 비켜난 주인공의 현재는 남들과 많이 다르다. 서연에게는 하고 싶은 일도 미래를 꿈꾸는 일도 오로지 책으로 통하는 길에 관한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오로지 하나,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삶이 허무하지 않다는 확신이 서연의 온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연의 친구인 유희와 채린, 그리고 첫사랑 경과 절판된 책을 서연에게 팔던 남자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서연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도 서연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인물로 다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유희는 걸핏하면 직장을 때려치우나 특유의 능력으로 곧잘 새 직장을 구하는 문제아다. 유희에게는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유희가 이번에는 취직이 아니라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며 서연에게 조언을 구해 온다.

채린은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비디오가게를 겸한 책방을 하고 있는데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새 연인과 함께 할 수도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또한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첫사랑과 공유했던 책을 팔고 있는 남자가 있다. 서연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들을 그에게 구입하면서 차츰 그와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 모습을 경이 보게 된 것이다. 친구도 아닌 연인도 아닌 애매모호한 관계의 경은 그 광경을 보고 질투라도 하게 된 모양이다. 그동안은 그냥 만났던 거고 이제 연애나 하자고 꼬드기는 경이 서연은 낯설기만 하다. 그동안 몸을 사리던 경이었는데 어쩐 일인가 의아하면서도 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연은 사랑을 “난파가 예정된 배에 승선하는 것과도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동의하는 독자들이 많을까.

"우리가 제대로 된 이성 관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게 될 뻔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경도 알고 나도 안다. 욕망의 기호가 다른 사람들이 잠깐의 유혹에 넘어가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니,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만큼 불행한 경우가 없다. 그것은 난파가 예정된 배에 승선하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경과 나는 둘 다 영리했다. (213쪽)"

1년에 평균 500권의 책을 읽는 서연은 10년 동안 5천 권의 읽었고, 100년 산다고 해도 인간은 고작 5만 권 밖에 못 읽고 죽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나 짧다. 소설은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설에는 무궁무진한 소재들이 있지만 백수와 책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어쩌면 잠재적인 백수들의 양산에 이바지할지도 모를 이 책은 한여름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처럼 독자들의 가슴을 시나브로 적셔나갈 것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재미있고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떠올리게 만들며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소설이었다. 비상을 꿈꾸며 오늘도 내일도 오로지 책만 읽는 백수의 유쾌한 이야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200%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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