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 일기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장바구니담기


머리 위 어디선가 후두둑,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아마도 나뭇가지 끝에 걸려 미처 지상으로 추락하지 못한 빗방울이었으리라. 차가운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 뺨에 닿는 걸 느끼는 순간, 혼곤한 감상에 잠겨있던 나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상쾌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전율이 온몸으로 전달됐다.

언제부터 뿌려진 비였을까? 어제 내린 비였나, 한 시간 전, 아니면 방금 내려온 싱싱한 것이었나. 조금 전까지도 산 가지에 얹혀 숨쉬던 물방울은 내 뜨거운 이마에 와닿아, 과거로 증발해버릴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 살아서 과거의 비를 맞는다는 사실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비틀거렸다.-14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