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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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등장하는 사진 한 장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해주고 있는 듯 인상적이다. 비가 오는 것 같지만 비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영상은 소설처럼 묘한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있었다.

소설은 평온한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주인공 다이스케, 그는 부잣집 아들로 한량이다. 물론 이 정도로 그를 말하기는 뭔가 부족하지만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그는 이렇다 할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열정적이거나 조급하거나 그런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는 인물로 비춰진다. 말하자면, 생활을 위한 노동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노동을 위한 노동만이 신성한 것이라며 주위 사람들을 냉소하고 있다.

전에 읽다가 만 양서를 집어 들어 책갈피가 꽂혀 있는 곳을 펴보니 전후 관계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다이스케의 기억력에 비추어 그런 현상은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학생 때부터 상당한 독서가였다. 졸업 후에도 의식주의 구애를 받지 않고 책을 사봄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을 마음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하루를 보내게 되면 습관상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대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되도록 틈을 내서 활자와 가까이했다. 어떤 때는 독서 그 자체가 자기의 유일한 본령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본문 중에서.


다이스케는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결혼할 것을 강요당하지만 그는 몇 차례 거절했고 이번에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만 아버지에게 그녀를 소개할 수는 없다. 이미 친구와 결혼해버린 미치요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사랑했던 여자를 잊을 수 없었고 아버지를 위해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었다. 이번 혼처는 놓치기 아까울 만큼 재력 있는 가문이라 어쩌면 아버지의 경제적 원조는 끊어질 지도 모른다.

다이스케는 그 점이 두려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사랑 없이 결혼하기는 싫었다. 이쯤 되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를 왜 친구에게 보냈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학생 때부터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오빠인 스가누마와 미치요의 현재 남편인 히라오카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티푸스로 스가누마가 병사하게 되자 둘은 미치요를 잘 돌봐주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히라오카보다 먼저 미치요를 사랑한 건 다이스케였지만 맹탕 같은 다이스케는 표현에 서툴렀고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에게 미치요와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한다. 당시 둘은 다이스케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므로 큰 번뇌 없이 둘을 맺어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랑이 계속 되고 있다고 이야기할 게 뭐람.

사랑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비록 남의 아내가 되었지만, 병들고 아이를 잃었으며 남편의 사랑을 잃어 가고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미치요에게 예전보다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을 어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은 이렇다 할 극적인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백합이나 은방울꽃 같은 것에 투사되어 간접적으로 에둘러 표현되고 있다.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을 한 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큰 줄기는 세 주인공의 구도를 통한 사랑이야기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근대 지식인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이스케는 예술에 탐닉하면서 사회 속에 녹아들지 않는 인물로 그려놓고 있다. 그에 비해 다이스케의 아버지나 형, 히라오카는 속물적 인간으로 치부하여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다.

미치요는 갑자기 뭔가에 짓눌린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팔꿈치를 짚고 이마를 다섯 손가락으로 가렸다. 두 사람은 그런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마치 사랑하는 남녀의 조각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오십 년이란 세월을 눈앞에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정신적 긴장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긴장과 함께 두 사람이 서로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의 형벌과 축복을 함께 받으며 동시에 그 두 가지를 깊이 음미했다.
-본문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는 묘사가 아름다운 소설이다. 1909년에 발표된 소설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으면 세월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현재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한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는 좋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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