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재일 한국인이라는 저자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이름만 보았을 때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지만 저자는 소설 속 주인공 스기하라에 투사된 자신의 모습을 면밀하게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떠다니는 일개 부초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재일 한국인의 슬픔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인 것 같았다.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의 주인공 스기하라는 고등학생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줄곧 사고뭉치였다. 권투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탓인지 언제 어느 때나 피가 끓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민족학교에 다녔다. 거기서는 김일성의 업적에 대해 배우고 한국말과 글,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고등학교만은 민족학교가 아닌 보통 일본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했다. 성적도 바닥이었으므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마침내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서두에서 밝혀두고 있듯 스기하라는 재일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연애소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연애는 스기하라의 삶의 일부이고 전 생애에 걸쳐 은근하게 그를 내리 누르는 '정체성'이 바로 소설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들은 조국이 분단되는 바람에 둘 중 하나의 국적을 택해야 했다. 일본에는 ‘조총련’과 ‘민단’이라는 두 기관이 있는데, 북조선과 한국을 각각 대표하는 것으로 재일 한국인은 두 기관 중 한 곳에 소속하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면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되는 줄 알았는데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하더라도 국적은 한국이라니. 그들은 일본 당국에 세금을 내더라도 일본 국적은 취득할 수 없는 외국인이었다.

스기하라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어쩌면 드센 일본 아이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무장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를 가볍게 넘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열심히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그만 반해버린 여자애가 있었다. 이름은 사쿠라이. 벚꽃을 닮은 예쁜 아이인지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스기하라도 사쿠라이가 좋았다.

"나는 사쿠라이를 만지고 싶었다. 어떤 부분이라도 상관없었다. 만졌을 때, 사쿠라이가 내 손을 받아들여준다면, 이 가슴에 충만해 있는 초조감을 틀림없이 지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미소짓고 있는 여자를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만난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인지 거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인데, 놀랄 만큼 강렬하게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라면 내 손을 받아들여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본문 중에서

사쿠라이 집에 놀러가서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주말에 데이트도 즐겼다. 사쿠라이의 부모도 스기하라가 마음에 드는 눈치다. 아마도 스기하라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스기하라는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사쿠라이의 아버지는 평소 딸에게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피가 더러워’라고 교육을 했던 것이다. 스기하라는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부정하기가 쉬웠지만 사쿠라이는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죽어버린 삼촌을 생각했다. 일본에서 북조선까지 비행기를 타면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까? 두 시간? 세 시간? 나는 비슷한 시간에 한국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북조선에는 갈 수가 없다. 뭐가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깊은 바다가? 넓은 하늘이? 인간이다. 돼지 같은 놈들이 대지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자기 영역을 주장하면서 나를 몰아내고 삼촌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테그놀로지의 발전으로 세계가 놀랄 만큼 좁아진 이 시대에 불과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장소에 갈 수 없다는 것을." - 본문 중에서

차별 받으며 일본에서 가난하게 사느니 차라리 북조선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던 삼촌은 북으로 갔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건 삼촌의 부고였다. 고혈압인가 영양실조인가 그런 것으로 병사했다는 것이다. 소설의 곳곳에는 이렇듯 재일 한국인의 상흔이 묻어나 있다. 처음에는 가볍고 경쾌하게 무거운 주제를 양지로 끌어내지만 시간이 더할수록 점점 그 무게는 어두움을 덧칠해 가고 있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유 없이 차별당하지만 그러나 그곳을 떠날 수도 없다. 그들이 할 줄 아는 언어는 일본어 밖에 없고 일본을 떠나서는 아는 사람도 없다.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이기에 그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쿠라이는 스기하라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랑에 국적이 무슨 소용인가하는 생각에 이르자 스기하라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운명 같은 사랑은 스기하라와 사쿠라이를 그냥 헤어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사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에 살지만 온전한 일본인으로 살 수 없고 한국인이지만 한국말을 할 수 없는 그들은 ‘한 번도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시원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경쾌한 문체 속에 녹아있는 ‘재일 한국인의 삶’은 분명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제목 'GO'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딘가에 머물지 않겠다는 젊음의 표상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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