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앨버트 칸 지음, 김병화 옮김, 파블로 카잘스 구술 / 한길아트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 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카잘스.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피아노로 가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 중 두 곡을 쳤다. 그것은 '집에 내리는 일종의 축복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카잘스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생애에 은퇴라는 말은 없다'고 단언했다. 가치 있는 일에 흥미를 두고 할 수 있는 것은 '늙음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이라고 강조하며 매일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카잘스는 음악 속을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다녔다.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일은 어린 카잘스에게도 황홀한 경험이었고 그에게 음표는 글자처럼 친숙한 것이었다. 네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카잘스는 모든 악기가 궁금했고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다고 한다.

부모에게 등 떠밀려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과는 당연히 그 결과가 다를 수밖에. 카잘스는 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그 다음엔 오르간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첼로와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세 개의 플랫'이라는 떠돌이 그룹의 연주를 광장에서 들은 후 아버지에게 그 빗자루 같은 악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첼로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되었다.

열한 살 때 연주회에서 첼로 소리를 처음 들은 카잘스는 첫 음절을 듣는 순간부터 압도되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했다. 이처럼 음악은 동서고금 노소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감동 그 자체로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그 후 카잘스는 그의 말처럼 첼로와 결혼했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등 다른 악기도 좋았지만 카잘스에게 첼로는 다른 어떤 악기보다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카잘스의 어머니는 첼로에 열심인 아들을 바르셀로나의 시립음악학교에 입학시켰고 카잘스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의 첼로 선생님은 밴드렐에서 그를 깊이 감동시킨 호세프 가르시아였는데 그는 훌륭한 첼리스트이자 교사였다. 카잘스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런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카잘스는 고악보 서점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래되고 변색된 악보 다발이 바로 그것이었다. 첼로만을 위한 곡이라는 점에 놀란 카잘스는 첼로 독주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임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전에 그런 모음곡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세 살 때 만난 그 악보 뭉치만 보면 '희미하게 바다 냄새가 몰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먼지투성이의 오래된 가게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던 카잘스는 그 모음곡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흥분' 속에서 12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 곡을 연습하고 연구하고 모음곡 가운데 하나를 공개 연주회에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그 후 그는 마드리드로 가 두 번째 아버지와도 같은 길레르모 데 모르피 백작에게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카잘스의 개인교수이자 후원자 조언자이기도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음악에 관한 것뿐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 교육하려고 애썼다. 그 후에도 여러 스승에게 착실한 음악 수업을 받았고 그도 마침내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내 관점에서 볼 때 드레퓌스 사건의 가장 무서운 측면은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그를 반대했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파리, 그 모든 교양과 인권의 고귀한 전통이 있는 그곳, 빛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 도시에서 반유대주의가 흉악한 전염병처럼 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질병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병이 나중에는 결국 한 나라 전체에 전염되어 '유대인의 피'가 혈관에 흐른다는 이유로 수백만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학살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게 되는 거지요. - 본문 중에서

카잘스가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 터진 '드레퓌스 사건'은 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예술과 배움의 영역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지만 그와 동시에 무지와 사회 부정의의 증거'를 함께 지니고 있는 파리의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여러 차례 전쟁은 그를 조국에만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은 책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카잘스는 음악회를 열면서도 음악을 듣는 청중의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음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청중들은 대부분 여유롭고 잘 사는 사람들로 노동자들은 입장권을 살 형편이 못되었을 뿐 아니라 간신히 비용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제일 싼 복도좌석을 차지할 따름이었다. 말하자면, 카잘스는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음악회를 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희망은 현실로 나타났다. 카잘스는 1928년 바르셀로나 올림피아 극장에서 제1회 노동자 음악회를 열었다. 2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모였고 소박한 옷차림의 관객들을 보며 카잘스는 벅찬 감정을 경험했다. 그리고 어떤 박수갈채보다도 그들이 보내주는 것에 의미가 컸다고 전했다. 음악가로서 그는 훌륭한 일을 해내었던 것이다. 부자들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빈자들도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다했다.

카잘스는 스스로 '육체 노동자'라고 표현했다. 독자들은 오만하지 않은 음악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카탈루냐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어냈는지, 그럼에도 그의 예술혼은 별빛처럼 빛이 났다. 단순한 연습곡 정도로밖에 인정받지 못하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발굴은 그의 생애 가장 주목받을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카잘스는 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을 오로지 첼로라는 무기로 견뎌온 '첼로의 성자'였다. 평생을 첼로와 함께 한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생애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줄 것이다. 허공을 넘나드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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