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 점프를 하다 - 할인판
김대승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이 있다. 어떤 이는 시나리오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또 어떤 이는 주연 배우의 연기가 너무 탁월해서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고 한다. 그 두 가지가 환상적인 조합을 이룬다면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개인에게 다가오는 영화의 울림은 각자 다르기 마련이다. 한 번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런 나의 습성을 바꾸어 놓은 영화가 있었다.

몇 해 전이었다. 봄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차가웠던 3월, 내게 평생 잊지 못할 여운을 안겨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떤 이는 영화를 두고 동성애 코드를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에 불과한 것 같았다. 기대하지 않았고, 영화에 대한 지식도 없이 문을 두드렸기에 감동은 배가되었을 지도 모른다.

조금은 낡은 듯한 촌스러운 그 시대의 복장이, 캠퍼스가, 내가 어렸을 때나 보았던 옛날 버스와 택시의 등장이 더없이 정겹다. 누구나 한번쯤 학창시절에 경험했을 풋사랑의 정서가 한여름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우리들 가슴에 스며든다.

어느 날 문득 인우의 우산 속으로 들어 온 태희. 운명적인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장대비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버스에 올라 탄 태희를 바라보는 인우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들이 많을 것 같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젊은이의 사랑은 관객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지속되지 못하고, 행복과 불행의 간극을 좁히며 시나리오는 빠르게 전개되었다.

인우가 입대하던 날 아무리 기다려도 사랑하는 태희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후에 인우는 태희의 죽음을 듣게 된다. 너무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 인우는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영화에서 이런 극적인 요소들이 빠진다면, '김빠진 맥주'가 되고 마는 것일까.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못마땅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첫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세월이 흘러 인우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고, 부인도 아이도 있는 가장으로 안정된 등장을 한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반 아이들과 만난 인우에게 다시 잔잔한 파문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반 아이 형빈에게서 태희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태희가 형빈으로 환생이라도 한 걸까. 형빈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인우와 태희만이 공유했던 특유의 행동, 소품이 하나씩 뿜어져 나왔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태희가 손수 그린 자화상이 깃든 라이터, 차를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구부리는 사소한 행동까지…. 내가 인우라 해도 그런 걸 두고 태희라고 생각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들으면, 그 곡에 맞춰 왈츠를 추던 인우와 태희가 생각난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찰나의 만남에 불과했던 사랑이어서 더없이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다. 아름답지 않은 사랑이 없고, 슬프지 않은 사랑이 없다. 그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영화를 더욱 힘 있게 만드는, 영화를 극적이게 만드는 에너지의 원천이 아닐까.

어떤 영화를 두고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 스태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혼신을 다했을 것이므로 영화들은 저마다 진주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가장 가까이 마음에 와 닿는 영화는 있기 마련이고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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