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 인문학자와 함께 걷는 인상파 그림산책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덧 2011년도 반이 지나가고 있다. 봄인가 싶었는데 여름이다. 아이가 크는 것을 보며 세월을 느낀다. 아이는 성장하고 어른은 성숙해야 하거늘, 제대로 성숙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며 살아야겠다.

 

첫 작품으로 실려 있는 클로드 모네의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을 보니, 몇 해 전 동생이 유럽여행 중 찍은 풍경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동생은 바로 에트르타 절벽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던 거다. 2세기가 지났지만 이곳은 아직도 여행자들에게 카메라에 꼭 담고 싶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나보다. 

 

저자에 따르면 명화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 그림'이라고 한다. 곧 가치란 사물의 중요성을 판단하게 하는 주관적인 믿음 체계라 볼 수 있고, 그림은 경험의 감각을 바꾸어서 이런 믿음 체계를 뒤집는 역할을 하며 이것이 바로 그림이 그냥 그림 한 점으로 끝날 수 없는 까닭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옛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물을 닮은 이미지라기보다, 그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낯선 가치 체계'라는 것이다. 인상파는 근대의 초입에서 자본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화가들이었다. 인상파가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모네, 자연을 그렸다기보다 시선을 그리다

 

모네는 인상파 화가 중 가장 오래 살아 인상파의 성공을 목격한 행운아였다. 모네와 아내 카미유는 화가와 모델로 만나 동거에 들어가 아이까지 낳았다. 당시 부모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모네는 이로 인해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파리를 떠나 시골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보불전쟁까지 일어나 친구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던 바지유가 전사해 모네는 더 궁핍해지고 만다.

 

마네가 모리조를 열성적으로 그린 것처럼 모네도 카미유를 열심히 화폭에 담았다. 가난했지만 카미유와 함께여서 모네는 행복했을 터, 카미유는 32세의 나이에 골반에 생긴 종양으로 생을 마감한다.

 

아내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카미유의 임종>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잔상이 꽤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게 한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여유'는 화두였고, 야외 풍경을 주로 그렸던 '모네는 자연을 그렸다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렸다'고 한다.

 

여성혐오주의자 드가

 

모든 여인에게 친절했던 마네의 극단에 드가가 있다. 드가의 여성혐오는 단순한 개인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믿을 수 없지만 19세기까지도 해도 유럽에서 여성은 고상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애처로운 존재였다고.

 

드가의 불행한 가족사가 여성혐오를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드가의 어머니는 남편의 남동생과 내연의 관계였으나 드가의 아버지는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에 이를 알고도 묵인했다. 드가의 어머니는 32세에 요절하고 그 여파로 드가의 아버지는 폐인으로 전락해버린다. 그 때 드가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고.

 

작품에서 여가수를 개에 비유했던 여성혐오주의자 드가는 의아하게도 메리 커샛이라는 미국출신 여성화가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둘은 생김새가 닮기도 했거니와 서로에게 좋은 동료이자 조언자였다. 커샛에 대한 드가의 마음은 우정보다 농도가 짙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기에 그의 말년 작품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고 저자는 말했다. 외로움이 없다면 명화도 탄생할 수 없다는 의미일 터.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드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도 쉴 새 없이 구상하는 그림에 대한 메모를 남겼다. 그는 색채에 대한 생각까지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드가는 즉흥성이나 감정의 분출 같은 것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그림은 과학적 관찰의 결과였고 인식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드가는 쓸데없이 모여서 예술에 대해 헛소리나 늘어놓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는 사교모임을 경멸했다. 그에게 예술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이었지, 어떤 천재적 영감의 표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87쪽

 

드가의 작품에 유독 발레리나가 많이 등장해 동경이나 흠모하는 마음으로 그렸을 법했는데, 실상은 정 반대였다니 놀라웠다. '19세기에 발레리나는 지금처럼 우아한 직업이었다기보다 '쇼걸'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드가의 <발레수업>은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그림을 좀 안다는 관객에게는 파격적인 시선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인상파 여성화가 커샛과 모리조

 

메리 커샛은 미국인이지만 미술 공부를 위해 프랑스에 와서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커샛의 모습은 모리조처럼 모델을 할 정도 수준은 아니었지만 드가와 금방 친해졌다. 커샛은 드가 평생 유일하게 가깝게 지낸 여성이었다. 커샛은 주로 여성모델을 많이 그렸는데,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모리조와는 달리 훨씬 부드러운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모리조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웠고, 후일 피사로에게 영향을 미쳤던 코로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로 입문했다. 마네를 만날 때 그녀는 이미 살롱에 풍경화를 출품한 어엿한 화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리조는 화가이기에 앞서 당대에 뭇 남성들의 시선을 붙잡는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평소에 검은 옷을 즐겨 입었던 모리조는 파리의 사교계를 사로잡는 팜므파탈이었는데, 마네가 그린 <발코니>에서 이런 모리조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고 있다. - 92쪽

 

모리조는 평소에도 검은색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모리조는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으리라 추측된다. 당시 검은색은 보헤미안의 색채이자, 프랑스혁명 당시의 무정부주의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19세기 파리에서는 화가가 피디나 영화감독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화가가 피디나 감독이라면, 모델은 연예인 정도 되는 셈이다. 모델은 가난한 화가들에게 걸리는 날이면 차가운 스튜디오에서 오들오들 떨며 작업을 하는 경우가 잦아 화가들은 모델로 가족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가족을 고생시키고 싶은 화가는 없을 테니.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는 이 외에도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카유보트 등 많은 인상파화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세기 파리, 인생파 화가들의 행보가 궁금하다면 이 책이 갈증을 해소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쉽게 읽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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