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인가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그에게도 그렇게 젊은 날이 있었던가. 사진 속 작가는 참 앳된 모습의 새색시였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그 새색시의 모습이 떠올라 소설읽기가 참 즐거웠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동명의 단편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거기에 살을 붙여 장편을 만들었다니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한국전쟁 전후가 배경인 소설이 재미있기란 참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어 주인공들은 그 시대를 살아낼 수 있었을 게다. 
 

주인공은 대학에 다니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미군부대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너나없이 가난한 시절, 남자들은 모두 징집되고 밥벌이에 나서야 할 사람은 부녀자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미군부대에 나가는 딸이 탐탁지 않으면서도 입에 풀칠을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 70~71쪽    

 

이웃에 먼 친척 벌 되는 동갑내기 그 남자가 이사를 오는데 둘은 곧 친해졌다. 마냥 동기간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가난한 시절에 입 하나라도 덜어주어야 했다. 주인공은 미군부대에 같이 근무했던 전민호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휴전이 되고 나서 그는 은행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은행원은 최고의 신랑감이었고, 그 남자는 여전히 백수였다. 주인공에게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이 필요했다. 그런 집이어야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살 수가 있다. 그 남자네 집이나 주인공의 집은 말하자면 '사방이 비 새고 금 가 조만간 무너져 내릴' 집이었던 거다.

 

그 남자는 주인공이 내민 청첩장을 보고 눈물을 떨구었다. 오래 붙어 다녔지만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사이로 그 남자는 그저 '오늘은 왼종일 울고 싶을 뿐이라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남겼다. 주인공도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

 

그렇게 한 결혼이건만 결혼생활은 지루했다. 늘 뭘 해먹일 것인가 궁리만 하는 시어머니 아래 며느리는 하루 한 번 장을 보러 동대문시장에 가는 것으로 숨통을 트곤 했다.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야말로 나에게는 족쇄였다. 남편을 갈구고 따져서 어떡하든지 허점을 찾아내고 싶은 욕망은 족쇄를 느슨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색인지도 몰랐다. 이 집에서 내가 기대하는 대로 돼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의 꿈을 무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게 도처에 숨겨져 있었다. -162쪽

 

다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되자, 지루하던 일상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어머니일로 티격태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시어머니가 다락같이 높여 놓은 아들의 입맛에 아부하기 위해 솜씨를 있는 대로 부린 송이산적의 맛보다 그 남자하고 같이 시장바닥 진창에 쭈그리고 앉아 사먹는 돼지껍데기에 더 깊은 맛을 느끼고', 악취는 풍기는 청계천변 길이 영화로 본 세느 강변로보다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것을 어쩌면 좋은가.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 169쪽

 

하루 시간을 내어 함께 교외로 나가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종일 기다린 주인공은 감기에 걸려 며칠 앓게 되고, 후에 그 남자가 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축구선수로 활동하던 그 남자는 상이군인으로 제대해 더는 운동을 할 수 없어 휴학을 했고, 복학할 준비를 하는 듯했으나 몸이 아팠다. 뇌에서 기생충이 발견되어 제거하는 수술 중 실명하게 되었다. 첫사랑에 버림받고 실명까지 하다니 그 남자가 너무 가여워 눈물이 났다.

 

햇볕이 하루하루 도타워지고 있는 초봄이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봄의 화사함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완전한 암흑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귀를 거의 남기지 않고 전지해 놓은 가로수는 가지 끝이 너무 뭉툭해서 움틀 것 같지 않은데도 빛은 그 끄트머리를 열심히 간질이고 있는 것까지 내 눈에는 보인다. 발밑 양회바닥의 균열에 고인 흙을 밀고 올라오는 초록빛 풀끝도.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보고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앞으로 보긴 보아도 아무것도 못 느낄 것 같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무의미는 또 어찌 견딜 것인가. -194쪽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반 이상은 추억의 무게' 때문이라고 한다. 신문에서 그 남자의 부고를 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주인공의 후임으로 취직한 춘희는 양공주로 전락하는데 미군부대 주위에 얼마나 많은 양공주가 살아야 했고, 월남에 일하러 갔던 사촌동생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세 명이나 청각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게 된 것 등은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작가가 오래 숙성시켜 비로소 세상에 내놓은 사랑이야기는 구슬같이 빛나는 것이었다. 우리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기도 했다.    

 

전후라 출구가 보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답답한 시절, 범속하고 따분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은 힘은 바로 문학이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 남자네 집>은 일과 사랑, 육아, 지루한 일상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질식할 것은 현대인에게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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