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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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머니와 시장에 함께 간 일이 있었다. 캄캄한 밤이 되었고 다리도 아파서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칭얼대자 어머니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장을 더 보러 가셨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어머니가 오지 않자 나는 점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기다림'이란 일종의 인내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일도, 그 모두는 내 마음속에 일렁이는 바람을 유보시키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동통을 수반한다. 행복할 수도 영영 행복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일, 그것이 바로 '기다림'이다.

매년 여름이면 휴가를 내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린은 군의관이다. 부모의 뜻을 거절하기 어려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고 딸 하나를 낳았다. 고향에서 아픈 어머니와 아버지를 봉양하고 딸을 키우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린의 아내 수위는 시대착오적이게도 전족을 했다. 그래서 발이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다. 수위의 부모는 미색이 뛰어나지 못한 딸의 결혼을 위해 전족을 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종종 전족을 한 사람을 볼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린은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신보다 한 살 연하지만 예닐곱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외모에 전족까지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린은 같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만나와 친한 동료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랑하니까 함께 살면 될 텐데 시대 상황은 그들이 제대로 사랑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병원 밖에서는 함께 걸어다닐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이 함께 생활하려면 이혼하고 결혼하는 수밖에 없는데 아내는 쉽게 이혼해주지 않았다. 매번 린의 부탁을 수용하였다가 법원에 가서는 마음이 바뀌고 만다.

만나는 늘 수위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린은 휴가 때마다 아내를 설득하지만 수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만나와 린은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수위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게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별거한 지 18년이 되면 아내의 동의가 없어도 이혼이 가능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려 결혼한 둘은 행복했을까.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수위는 어땠을까. 
 

린과 만나는 늦은 나이임에도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쌍둥이 아들은 그들이 사랑했다는 하나의 결정체일 뿐 행복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기다리는 동안 사랑이 모두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그들에게 남은 건 권태로운 일상뿐이었다. 만나는 병이 들었다. 만나가 세상을 떠나면 린은 다시 수위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수위에게 돌아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거다. 

소화가 잘 되는 유동식처럼 소설은 잘 읽힌다. 간결한 문장 속에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촌각을 다투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토록 오랜 기다림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하진의 <기다림>은 문화혁명기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 속에 놓인 세 남녀의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다림'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진의 소설은 현실에 타협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현대인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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