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아내 - 위대한 예술을 내조한 화가들의 아내 이야기
사와치 히사에 지음, 변은숙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상황도 중요하지만 그의 주변에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화가의 아내>는 화가가 아닌 아내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화가 아내로서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화폭에 담긴 화가의 아내들, 캔버스 이면을 응시하는 눈빛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도, 삶의 애환도 모두 그 속에 녹아 있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살아있을 때는 빛을 보지 못해 가난하게 살았다. 생활고에서 오는 어려움이 컸지만 아내들에게는 그것뿐 아니라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바로 화가와 모델의 관계 때문에 힘들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아내가 그 사실을 알도록 노골적이었는지 등 정도의 차이는 존재했겠지만, 몇 시간이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보면 크고 작은 연애 사건이 생길만도 하다.

모델이었다가 애인이나 아내로 발전한 경우가 종종 있기에 결혼하고서도 아내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도 했고 별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랑하기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질투와 분노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비운의 여인, 올가 피카소

그 가운데 가장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피카소였다. 아내 올가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첫 아이를 출산할 무렵 피카소의 마음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가 있었다.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피카소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한 사람의 남편,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수다. 애당초 그에게 가정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연애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를 사랑했던 많은 여성들이 덜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조강지처 올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식적으로 피카소의 아내였다. 이혼해주지 않고 평생 속을 끓이다가 세상을 등졌다. 올가가 일찌감치 피카소를 떠나보냈다면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 사랑은 아이러니다.

구분하기 모호한 욕망과 천재성을 모두 가진 피카소의 인생에 여자들은 미노타우로스 같은 괴수의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자의 꽃 같다. 피카소가 눈독을 들인 여자들에겐 평온한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궁의 문에 들어가는 사람은 희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여자들이 알게 되는 것은, 피카소가 멀리 떠나버려 완전히 관계없는 존재가 되거나 악마의 화신이 되고 난 후이다. 임신 중인 아내를 배신한 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몇 번이랄 것도 없이 되풀이되는 피카소의 ‘일상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올가는 그런 피카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04쪽)

피카소는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운이 좋게도 살아서 인정받은 화가였다. 그것은 그가 다른 화가들보다 월등히 장수했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 말년에는 서른 중반의 자클린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녀는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자기중심적이었던 피카소는 결국 마지막에는 여자에게 된통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피카소에게 사랑은 작품 활동에 있어 늘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할지라도 인간으로서 피카소를 존경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와 아내 사스키아

자화상을 많이 그리기로 유명한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에서 환히 웃고 있다. 바보스럽게 보일정도로 천진한 웃음을 두고 저자는 두 번 봐도 두 번 모두 웃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렘브란트는 ‘인물을 그저 아름답게만 그린 화가가 아니었고 인물의 내면과 개성을 파악하여 캔버스에 옮긴 화가’였으며 그의 경계심 없이 웃는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사스키아는 아이를 네 명 낳았으나 셋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세상을 떠났고 네 번째 아이만이 살아남았다. 사스키아는 지병이 있었기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아무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회화의 세계에 처음 도입한 천재 화가’였지만 가장으로서는 부적격한 사람이었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수집광이었던 렘브란트가 무분별하게 사들인 작품 소재용 귀금속이나 다른 화가들의 소묘작품들 때문에 후견인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무능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스키아 몫의 유산은 렘브란트가 재혼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들과 렘브란트에게 남겨졌다. 후에 렘브란트는 그 재산 때문에 자신의 딸을 낳은 헨드리키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광적인 수집욕을 자신도 어쩌지 못한 탓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자 며칠 후 아내 잔 에뷔테른은 투신자살을 택한다. 사랑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여린 아내의 모습이 가슴을 울린다. 클로드 모네의 아내 카미유는 남편의 도약을 위해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을 견디며 그를 도왔다. 클로드 모네가 그린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를 보면 그들 부부의 사랑을 짐작하게 된다.

화가의 아내 19명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은 300년이라는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예술가의 삶에 있어 사랑이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림을 그리며 행복했을 화가들을 떠올려본다. 그 곁에서 묵묵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화가 아내들의 모습도 함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던 아내들 역시 화가만큼이나 그림을 사랑했을 것이다.

영혼의 동반자로서의 몫을 톡톡히 해왔던 아내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깊이 스며있는 사랑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실 예술은 사랑으로 꽃피는 그 무엇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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