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소설집 音樂小說集
김애란 외 지음 / 프란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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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강하게든 약하게든 깃든 이야기들인데 공통적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이 담겨 있고 인물들에 미치는 영향면에서는 죽음이 비할데 없으므로 ‘음악과 죽음‘을 담은 소설집이라고 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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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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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다. 이번 소설을 더 좋게 보았다. 아래 글에 결말을 제외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소설은 선교사이자 사절단의 통역을 맡은 사제 벨라스코와 사절단의 일원이 된 하급 무사 하세쿠라 두 사람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하세쿠라는 아버지 대에 위의 명으로 고향 땅에서 내쳐져 수확할 것도 변변찮은 척박한 골짜기 땅을 배당받아 마을 사람을 이끌고 살고 있는 하급 무사이다. 풍요롭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진 늙은 숙부와 달리 하세쿠라는 아무리 일해도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한 땅이지만, 골짜기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일본 소설이나 영상물을 보며 생각한 것인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덕인 것 같다. 살아 보진 못했으니 작품을 통해 느낀 것이긴 하지만, 일본인들은 대체로 자기 삶에 만족 못하고 불만을 가지거나 어떤 사안에 비판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거 같고 때로는 더 나아가 혐오감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하세쿠라도 분수를 아는 사람으로서 말없이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세쿠라도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인물을 속으로 싫어하는, 그러한 성격의 인물이다.


일본에서도 구석지고 척박한 땅에서 세상 모르고 골짜기에 붙어 식솔들의 끼니 해결에만 몰두하던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어째서인지 멕시코와의 무역을 트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이 되라는 명을 받게 되고 난생처음 큰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게 된다. 윗 분에게, 왜 저일까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임무를 완수하면 고향 땅을 되찾을지도?(어쩌면!) 어찌 되었든 명을 받았으니 명을 따른다,인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을 배에 태워 멕시코로 보내는 것이 토착 식물을 뿌리 뽑아 배에 던져넣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이 일의 은폐된 전모를 이 단계에선 아직 모르고 있지만 상황에 대한 이해나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이 배에 실린 순진하고 우직한 하세쿠라에 연민이 생긴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함께한 종자 요조가 붙어 있어 하세쿠라는 여정 내내 마음으로 크게 의지를 하게 된다. 하세쿠라와 처지가 같은 하급 무사 셋이 더해져 총 네 명의 사절이 통역자인 신부 벨라스코와 여정에 오른다. 배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폭풍으로 표류하여 일본에 있던 스페인 선원들이 일본 선원들에게 항해 기술도 전수해 주며 배를 운전하고 일본 상인들도 수십 명 함께 타고 출발한다.


고생스런 항해 끝에 아카풀코를 거쳐 멕시코시티로 가서 총독을 만나지만 총독은 통상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힘이 없으며, 그 과정에 사절단은 환영받지 못함을 깨닫는다. 상인들은 벨라스코의 의도대로 멕시코시티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일단은 가져온 물품을 처분할 수 있게 되고 새로 구입한 물건들을 싣고 사절단 한 명과 함께 일본에 돌아간다. 세 명의 사절과 벨라스코는 멕시코와의 무역에 조금이나마 긍정적 성과를 가지고 가기 위해(벨라스코의 교묘한 희망고문에 의해...) 멕시코를 움직이는 실세가 있는 마드리드로 가기로 한다. 험한 고생길은 계속 이어진다. 베라크루스, 대서양 항해, 세비야,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사절단은 정식 사절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하여 멕시코와의 통상을 트는데 힘을 싣기 위해 세례도 받는다. 세례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하세쿠라는 받기를 결심한 후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듯한 가책 속에서 '임무 수행을 위한 형식적인 것이다' 라며 틈날 때마다 중얼거린다. 마드리드에서 이들은 아무 희망이 없어진 후에도 최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로마까지 가고 형식에 불과한 것이지만 교황을 접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람도 없이 같은 길을 되짚어 돌아온다. 4년이 걸린 여정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니 이야기는 80페이지 정도를 남겨두었다.


오직 자신이 잘 하는 인내와 순종의 의지 하나로 세상 끝에 다녀온 하세쿠라는 이 여행이 끝나고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일련의 일로 비로소 각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하급 무사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대처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세상일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각성이다. 이는 머리를 강타하는 형식이 아니고 깊은 밤에 이로리 옆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혼자 앉았을 때 종이에 물이 젖듯 찾아오는 것이다. 이 이상이 있을까 싶었으나 더 외지고 더 외롭고 더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자 방문했던 나라의 집집마다 걸려 있던 철사처럼 야위고 힘없이 두 팔을 벌린 채 못 박힌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떻게 저렇게 추하고 볼품없는 사람에게 이 사람들은 머리를 수그릴까, 볼 때마다 의아했던 사내의 모습이다. 이제 골짜기의 한밤에 홀로 앉아 떠올리는 그 모습은 예전처럼 멸시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고 그 가련한 사내가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야기가 벨라스코와 하세쿠라 두 사람의 시선으로 전개된다고 했는데 하세쿠라 입장에서만 내용 정리를 해 보았다. 

짧게 벨라스코 쪽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벨라스코는 일본에 교구를 만들어 주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이 사절단이 꾸려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며 에도와 영주의 속마음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본인이 일의 되어가는 바를 조정하는 줄 알고 있었다. 출발 이후엔 사절단을 어르고 속여서 여정이 로마까지 이어지게 도모한다. 사제이지만 천성적으로 오만한 기질이 있으며 선교에는 외교적 수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선진적인 것이 후진적인 것을 물리치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들의 개입이 물적 도움이고 정신적 구원이라는, 침략군과 함께 들어오는 선교사의 전형성이 있다. 무적함대의 문화에서 성장하고 신앙을 키웠으므로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작가는 벨라스코와 대척점에 어쩌다 멕시코까지 흘러들어와 인디오의 마을에 함께 사는 일본인을 등장시킨다. 짧은 분량으로 잠깐 나오지만 중요한 인물이다. 벨라스코와 비교하게 하면서 하세쿠라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게 되니까. 전직 수도사인데 스페인이 인디오에게 저지르는 짓을 보고 교회에서 이탈한 사람이다. 예수는 큰 교회가 아니고 비참한 인디오 안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며 그냥 인디오가 되어 살고 있다. 이 사람의 말과 신앙에 대한 메모가 하세쿠라의 마음에 드문드문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다.    


해설에 보니 엔도 슈사쿠가 이 소설 관련 인터뷰를 하며 '이 소설은 저의 사소설 같은 것입니다.'라고 했다한다. 작가가 어릴 때 세례를 받고 교회와 거리를 두다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유학을 한 경험을 연결지을 수도 있겠다. 조금 깊이 나아가서, 동아시아인이면서 기독교인이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봄직한 문제 - 외래 문화로서의 기독교를 어떻게 내면화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내면화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경로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소설의 제목이 참 묘한 것이 일본에서 특정 시기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모시고 섬긴다는 뜻인데, 소설속에 나오는 하세쿠라 식의 소박한 표현(일종의 신앙 고백)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는 평생 함께해줄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을 - 설령 그것이 병들어 쇠약한 개라도 좋아 - 찾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겠지. 그 사내는 사람에게 그런 가련한 개가 되어주는 거야.' 

이 소설에서 병들어 쇠약한 개와 종자인 요조와 예수는 동일하다.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 참견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존재이다. 

내게도 나이들고 병들어 쇠약한 개가 있다. 아직 잘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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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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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고등학교 때 한 번 읽었던 책이다. 그때 읽고 나서 감동 받았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많이 잊었고 몇 년 전에 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에서 파도치는 바다와 바다에서의 십자가형의 장면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재미나 감동을 생각보다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꽤 예상 밖이었다. 어릴 때 성당을 다니던 시기에 읽었다는 점, 그 추억의 힘만으로도 각별한 감상이 더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략적인 내용의 전개를 안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살짝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심장이 딱딱해진 점이 가장 크지 않을까. 특히 종교에 대해 무심해졌고 날이 가면서 더 냉정하게 보게 된 점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기독교라는 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신념'의 문제로 확장해서 본다는 것은 어쩐지 초점을 비켜가는 감상이라고 생각한다.(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좀더 파고들어 생각을 정리 보충해야 되겠지만 지금은 건너뛰고 싶다.)


좋은 소설이 주는 감흥은 여러 방향에서 오는 것이라 대략 줄거리를 안다는 점이 과거와 다른 감상을 갖게 된 데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 기억했던 것 보다 고문의 엽기성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장면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지 않고 담담하게 절제하며 전개된 것은 소설의 장점이라고 느꼈다. 전체적으로 이런 점은 좋게 보았다. 크게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면이 없이 차분하게 가는 소설이었다. 


세부적인 잔재미의 면에서는 조금 아쉬움도 있었다. 이 소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며 담담한 톤으로 전개된다고 하였지만 건조한 사실적 문체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유형은 아니고, 인물의 내면 갈등과 희비의 감정적 굴곡이 그대로 표현되는 소설이라, 기대한 재미 면에서 살짝 아쉬웠다. 예를 들어 외국인 신부가 마을 뒷산에 숨어 지내면서 생길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소소하게 더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소설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지만 싱겁게 넘어가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의 경우 일본인 관리들의 태도와 말이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다루는 일련의 행위에는 이유가 분명했고 그 행위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도 숙련되고 세련되었다. 확신과 여유가 있었다. 이들과 신부의 관계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이다. 

신부의 내면이 표현되는 부분은 힘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신부의 상황과 갈등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포르투갈을 출발할 때부터, 그게 아니면 중간 기착지인 인도나 마카오에서부터 일본에서 펼쳐질 일들이 예상가능한 범위였지 않는가. 그런데 의지를 다질 때도 의지가 흔들릴 때도 붙잡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나 특히 신부가 어릴 때부터 사랑하고 떠올렸다는 예수의 얼굴에의 집착이 너무 부실한 의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 전처럼 종교가 있었다면 원래 진실한 것은 연약한 것이고 흔들리는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상처일 수밖에 없다는, 긍정적이며 감상적인 소감을 가졌을지도. 지금은, 이 소설의 감상으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의 아름다운 얼굴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종교적 상징이 필요한 보통 신자들의 약함이긴 하지만 세상 끝까지 찾아온 사제의 마음 속 풍경이 그러한 것은 너무 빈약해 보였다. 


'침묵'에 있어서도 그렇다. 하느님의 침묵이 그렇게도 야속한 것인가, 그제야 새삼스러운 것인가, 원래 그런 분인지 몰랐단 말인가. 침묵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지...

실제로 순교한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고통 섞인 복잡한 마음이 든다. 


홍성사의 이 책은 82년에 초판이 나왔고 그 이후 개정판이 나오고 쇄를 거듭했다. 그런데도 특정 종교를 다루는 책을 내면서 그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제대로 쓰려는 생각이 오랜 세월 없었음을 보니 지식 부족이든 성의 부족이든 암튼 부족한 출판사라는 의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 표기,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이 책에서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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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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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 벡의 시선을 통과한 부랑자, 윤락 여성, 이민자들을 본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를 들어 본다. 그들 안에 있는 합리와 불합리의 기준, 타협과 균형의 묘를 보며 닥과 같은 시야를 갖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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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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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뷰를 올리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에 감상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다. 글을 많이 고쳤다.


책읽기를 너무나 좋아하고 작가들을 숭배하는 소냐(소네치카)는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로베르트와 결혼한다. 사서로 일하던 소냐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로베르트와 만나게 되고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반하여 순식간에 결혼을 결정한다. 이 부분에서 다른 소설이 생각났다. 특정한 책도 아니고 단지 책이라는 이유로 혹하는 장면이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이 작품에서 시골 카페에서 일하던 테레자가 여러 손님 중에 토마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고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그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책'이란 초면의 두 사람을 영원의 끈으로 묶어버리기도 하니 과연 별별 기능을 다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냐는 결혼한 다음 책과 멀어진다. 아이를 키우고 넓은 집을 얻기 위해 가사 일과 더불어 부업에까지 전념하면서 바쁜 일상의 행복에 잠긴다. 남편의 재능과 일이 소냐의 행복이 되고 결혼 생활 자체가 언제나 자신에게 과분한 행복임을 감사해 한다. 소냐는 왜 언제나 과분한 감사를 느낄까. 남편은 자신보다 나이가 아주 많고 유배 생활을 한 예술가라 경제적 형편도 어려운데 말이다. 소냐는 학교 다닐 때 모욕당한 짝사랑의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자신을 여성으로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정의하였고 그래서 결혼을 선물로 여기고 남편을 '추앙'하게 된 것일까. 그것만일 리가. 여기에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소냐는 딸 친구 야샤와 관계한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 후에 이것은 벌써 오래 전에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며, 그와 자신의 결혼 생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사실 알고 있었다고 내면의 독백을 한다. 더 나아가 야샤가 남편의 어린 애인인 동시에 모델이 되어 시리즈 작품의 창작을 가능하게 한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 옆에 그렇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겼다는 건 정말 공평한 일이야.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걸맞게 말이야.' 


왜 이럴까. 고도의 야유가 물론 아니다. 나는 소냐('소네치카'란 소설)를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보았다. 소냐는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했던 자세로 예술가 남편을 대하는 것 같다고. 이것은 소냐가 책벌레였던 성장기에 책에 빠져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던 정신 상태였음을 서술하는 부분을 근거로 한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문단을 옮겨 본다.

  '인쇄된 글자에 너무나 공감한 나머지 상상 속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의 친구들 사이에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죽어가는 안드레이 공작 침대맡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나타샤 로스토바의 해맑은 고통이 어리석은 부주의로 네 살짜리 딸을 잃은 언니의 격렬한 슬픔과 동등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옆집 여자와 수다를 떨던 언니는 뚱뚱하고 굼뜬 자기 딸이 우물 속으로 미끄러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예술에 전제되는 유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미숙한 어린아이의 덜 깨인 순진한 믿음인가, 상상력의 부재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자아를 잊을 정도로 환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경계 바깥의 모든 것들이 의미와 내용을 상실하는 것일까?'

결혼생활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닫는 부분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귓전에 울리는 투명한 종소리와 함께 그녀는 완전히 텅 비어 몸이 붕 뜬 듯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책장으로 다가와 선반에서 아무 책이나 잡히는 대로 골라 중간쯤을 펼치고 누웠다.(중략) 그러자 이 페이지들 속에 있는 단어의 완벽함과 구현되어 있는 고상함으로부터 오는 조용한 행복이 소냐를 비추었다.' 

소냐는 결혼생활이라는 무대가 막을 내리자 다시 책읽기에 빠져든다.


소냐에게 로베르트와의 결혼생활은 일종의 책 속 세상처럼 인식된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예술가 남편과의 결혼생활 17년은 책을 통해 알던 세계(예술)의 실사화와 같은 것이었나 보다. 소냐는 자아를 잊고 소설에서 배운 가치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소냐에게는 이해 못할 일도 수용 못할 것도 없는가 보았다. 어떤 행사에 소냐, 야샤, 로베르트 세 사람이 함께 동행하여 가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어찌 받아들이는가 같은 것은 신경쓰지도 않는단 말이지. 세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것이 앞서 표현되었던 소냐 자신에 대한 오랜 세월 계속된 자존감 부족의 결과는 혹시 아닌지. 


소냐는 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그렇게 없는지? 독자(소냐)는 창작자(로베르트) 앞에서 그렇게 겸양해야 하는지? 예술이 인간에 대한 존중에 우선하는 다른 차원의 것인지? 생각하다 보니 마치 예술에 가스라이팅 당한 억압된 여성의 일생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감상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남편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다. 로베르트는 예술성이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그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기 행동에 책임은 져야한다. 아마도 딸친구와의 외도 문제에 책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훨씬 뛰어난 그림이 나올 수도 있고. 그냥 셋이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행위는 아닌 것이다. 이 소설이 저 남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며 예술을 위해서, 라는 이유로 읽히지 않고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면, 세 사람이 어울린다해도 그러고 싶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이해를 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소냐에게는 책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 표현된 책에서 얻는 행복이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로베르트와 계속 별문제 없이 살았다면 소냐는 책읽기를 했을까 안 했을까. 이 작품은 제 이해가 부족한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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