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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고등학교 때 한 번 읽었던 책이다. 그때 읽고 나서 감동 받았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많이 잊었고 몇 년 전에 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에서 파도치는 바다와 바다에서의 십자가형의 장면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재미나 감동을 생각보다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꽤 예상 밖이었다. 어릴 때 성당을 다니던 시기에 읽었다는 점, 그 추억의 힘만으로도 각별한 감상이 더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략적인 내용의 전개를 안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살짝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심장이 딱딱해진 점이 가장 크지 않을까. 특히 종교에 대해 무심해졌고 날이 가면서 더 냉정하게 보게 된 점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기독교라는 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신념'의 문제로 확장해서 본다는 것은 어쩐지 초점을 비켜가는 감상이라고 생각한다.(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좀더 파고들어 생각을 정리 보충해야 되겠지만 지금은 건너뛰고 싶다.)
좋은 소설이 주는 감흥은 여러 방향에서 오는 것이라 대략 줄거리를 안다는 점이 과거와 다른 감상을 갖게 된 데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 기억했던 것 보다 고문의 엽기성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장면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지 않고 담담하게 절제하며 전개된 것은 소설의 장점이라고 느꼈다. 전체적으로 이런 점은 좋게 보았다. 크게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면이 없이 차분하게 가는 소설이었다.
세부적인 잔재미의 면에서는 조금 아쉬움도 있었다. 이 소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며 담담한 톤으로 전개된다고 하였지만 건조한 사실적 문체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유형은 아니고, 인물의 내면 갈등과 희비의 감정적 굴곡이 그대로 표현되는 소설이라, 기대한 재미 면에서 살짝 아쉬웠다. 예를 들어 외국인 신부가 마을 뒷산에 숨어 지내면서 생길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소소하게 더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소설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지만 싱겁게 넘어가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의 경우 일본인 관리들의 태도와 말이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다루는 일련의 행위에는 이유가 분명했고 그 행위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도 숙련되고 세련되었다. 확신과 여유가 있었다. 이들과 신부의 관계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이다.
신부의 내면이 표현되는 부분은 힘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신부의 상황과 갈등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포르투갈을 출발할 때부터, 그게 아니면 중간 기착지인 인도나 마카오에서부터 일본에서 펼쳐질 일들이 예상가능한 범위였지 않는가. 그런데 의지를 다질 때도 의지가 흔들릴 때도 붙잡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나 특히 신부가 어릴 때부터 사랑하고 떠올렸다는 예수의 얼굴에의 집착이 너무 부실한 의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 전처럼 종교가 있었다면 원래 진실한 것은 연약한 것이고 흔들리는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상처일 수밖에 없다는, 긍정적이며 감상적인 소감을 가졌을지도. 지금은, 이 소설의 감상으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의 아름다운 얼굴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종교적 상징이 필요한 보통 신자들의 약함이긴 하지만 세상 끝까지 찾아온 사제의 마음 속 풍경이 그러한 것은 너무 빈약해 보였다.
'침묵'에 있어서도 그렇다. 하느님의 침묵이 그렇게도 야속한 것인가, 그제야 새삼스러운 것인가, 원래 그런 분인지 몰랐단 말인가. 침묵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지...
실제로 순교한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고통 섞인 복잡한 마음이 든다.
홍성사의 이 책은 82년에 초판이 나왔고 그 이후 개정판이 나오고 쇄를 거듭했다. 그런데도 특정 종교를 다루는 책을 내면서 그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제대로 쓰려는 생각이 오랜 세월 없었음을 보니 지식 부족이든 성의 부족이든 암튼 부족한 출판사라는 의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 표기,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이 책에서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