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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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 보다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같이 일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았다. 저자는 생각으로도 말로도 식용 동물 농장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을 시작할 즈음에는 일터 사람들에게 나처럼 무지한 독자가 궁금해 할 법한 순진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고 고용주든 함께 일하게 된 고용인이든 간에 그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내려 노력하고 그들을 보며 자신이 배운 바도 함께 얘기하고 있었다. 저자의 그런 노력이 씨알도 안 먹히는 더러운 고용주 놈도 어김없이 있었지만. 

특히 농장의 노동자들 - 관리자급인 한국인과 조선족, 중국인, 동남아시아에서 온 고용인들의 성품과 장기를 언급하고, 출신이든 나이든 묶어서 일반화하지 않고 개별 인간의 생생함을 살려 전달한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완독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외면하고 싶은 하고 많은 세상사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에 드는 분야인데 견디기 힘든 수위는 아닐까 했던 것이다. 일의 내용도 그렇고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의 환경도 그렇고. 그렇지만 직접 현장에서 일한 사람도 있는데 책으로도 못 읽겠다는 건 세상을 살며 알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너무 좁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일터에 있으면서도 같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인, 짬밥(개밥, 음식물쓰레기) 운송을 맡은 김 실장은 조선족 봉휘 아저씨와 태국인 수리얀에 대해 국민성 운운하며 게으르다고 말했고, 저자는 이렇게 서술했다. '나는 김 실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국민성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가 봉휘 아저씨, 수리얀과 일주일만 같이 일해보면 그들이 자신 못지않게 부지런하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될 텐데.' 라고. 앞서 봉휘, 수리얀과 일하고 대화하는 장면들을 읽은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김 실장 보다는 편견에서 벗어난 인간이 되었지 않겠는가. 아마도 김 실장은 어느 자리에선가 내가 걔들하고 일해 봐서 아는데~라며 또 되도 않은 썰을 풀지도 모르겠다. 


문체라는 단어를 쓰기보다 말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어울리는 편안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저자는 하루 일과 후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그 일기가 이 책의 원본이었을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 무거운 내용을 각오했지만 저자는 쉽고 유머까지 겸비한 말투로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을 중화시키고 있었는데, 예를 하나 들면, 개 농장에서 짬밥 수거를 맡은 사람이(김 실장) 요크셔테리어를 13년 키우다 보냈다는 말을 하며 애틋해 하자 저자는 그러면 이 일이 부담스럽지 않은지 묻는다. '아아니! 그거는 애완견이고 이거는 식용으로 키우는 거니까. 두 개는 완전히 다른 거야.' 라고 한다. 참 자의적이다. 나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구분해서 목적을 정하고 '다르다' 라고 정리한다. 이 부분에 저자가 주를 달아 놓았다. [주 : 역사학자 키스 토마스는 "애완동물이란 집 안에 들이고 이름을 붙이며 절대 먹지 않는 대상"이라고 정의했다. 또 인류 동물학자 제임스 서펠은 애완동물에 대해 "우리와 함께 살지만 뚜렷한 역할은 없는 동물"인 것이라 했다. 학자들의 견해에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어째선지 두 경우 모두 백수로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시절의 나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설명이다.]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쉽고 편하게 구분하다 보면 이렇게 애완동물=백수가 되기도 한다. 


내용은 먼저 닭 그 다음이 돼지 마지막이 개 농장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저자의 유머는 줄고 분위기는 무거워진다. 보통 새로운 농장에 취직해서 컨테이너 숙소에서 보내는 첫 날 밤을 전하는 글에선 외롭고 두려운 정서가 느껴졌다. 이 숙소라는 곳의 형편을 보면, 켜켜이 쌓인 먼지구덩이 바닥 한켠에 이불 비슷한 것을 깔고 몸을 누이면,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마지막 농장에선 이 정서가 강하게 느껴졌다. 저자의 개인적인 아픔도 슬몃 드러나고. 그래도 며칠 시간이 지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대화의 재미나 식사의 즐거움 같은 것으로 처음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희석되는데 마지막 농장은 고용인조차 본인 뿐이었다. 사장과 고용인인 저자 두 사람이 농장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개 농장을 두 군데 경험하는데 닭이나 돼지와 달리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곳의 환경은, 경험할수록 저자가(독자도) 감당할 수준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할수록 내면에 상처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적응할수록 영혼이 찌그러져 간달까. 개 농장의 특수함은 모든 조건들이 맞물려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기본 조건이 법적으로 식품으로 관리되지 않는다는 점과 음식물 쓰레기를 사료로 쓴다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가 닭이나 돼지 농장과는 비교 수준을 훌쩍 넘는 험악하고 혐오스러운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제목만 봤을 때 동물권에 초점을 맞춘 책인가 생각했는데 본문은 이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구조와 구체적인 일의 내용 그리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비중이 컸다. 물론 저자가 한 일의 내용을 상세하게 전개시킨 부분을 읽다 보면 동물들의 환경에 경악하게 되는 지식은 자연히 따라온다. 필요한 통계 자료 같은 경우 주를 달아 보충하고 있었다. 본문만 놓고 볼 때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이 두드러지는 책은 아니다. 마지막 40페이지 정도 되는 마무리 파트에 가서야 저자는 이 모든 경험을 따라온 독자가 보기에 결코 과하지 않은 소박한 방식으로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채식을 하자는 주장은 없다.(저자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고통 없이 살고 싶어 하는 점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우리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며 지금과 같은 농장 시스템에 대한 의심을 해 보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서는 너무 단순한 결론 아닌가를 비롯해서 글쓴이의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대한 불만스러움을 가질 여지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성격이 그러하다. 아마도 기대하는 바와 다르다면 그에 부응하는 다른 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글을 쉽게, 솔직하게 쓰며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객관화에 저자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어 한층 신뢰하며 다른 책을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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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의 죽음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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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의 여러 명 화자를 통해 동독 사회를 그림. 호른의 죽음을 중심으로 연결된 화자들이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모순과 아픔을 드러낸다. 나치의 시대와 공산화된 동독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밀고로 비극을 만드는데, 정당한 듯 진행되는 표면적 삶에 대항하여 ‘기억‘(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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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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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우성이라는 열일곱 살 소년의 성장 소설이자 시대물이다. 공간은 대만, 시간은 1970년대 중반에서 80대 중반 십 년 정도인데 이는 화자인 치우성을 따라가는 시간이고 이 소설을 추리물로 분류하게 하는 중심 사건은 역사적 굴곡을 품은 긴 세월을 배경으로 한다. 국민당 소속으로 중국에서 건너 온 예치우성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구들이 살아온 시간은 중일전쟁, 내전, 대만으로 와서 정착하기까지 이어지고 이들 세대의 삶은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그대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대를 이어 전해지는 핏줄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매우 활기차고 박력 있고 에너지가 충만한 소설이었다. 이웃이나 가족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인지 다툼인지 경계가 애매한 말들과 흔한 웃옷을 벗어젖히고 배를 내놓은 거리의 아저씨들과 날라리 친구로 인해 엮여서 질주하게 되는 사건들과 번화가 노점상 거리에서의 첫사랑과 데이트, 사람을 피해 날아다니는 닭과 출몰하는 바퀴벌레 등등이 글을 읽는 중에 청각적으로 뭔가 와글와글시끌벅적했다. 지금 나열한 이런 장면들에서 활력이 느껴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장면들 속에 잔잔히 녹아 있는 폭력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장면들의 기저에 다 폭력이 깔려 있거나 드러내놓고 폭력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런 바탕에 깔린 긴장이 일상을 부글거리고 과열되게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냥 일과 중 사소한 실수에도 부모나 선생은 아파야 배움이 따른다며 매질을 하고, 학교 급우들 간에도 눈만 잘못 마주치면 맞짱뜨기를 해야 하고, 군대 가서도 체벌은 기본이다. 소설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주인공은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매우 중요한 각오를 하기도 한다. 죽고자(죽이고자) 했더니 제3의 손에 의해 살아났다는 식으로 당사자 둘은 서로에게 직접 피를 내지 않는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긴 하는데, 이 소설 전반에서 폭력의 사용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위에 쓴 내용들 때문에 현재 나오는 소설과는 다른, 80년대나 90년대의 소설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2015년에 나왔다고 한다. 개인이 세대로 이어지는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한다는 정서도 그렇고 소설 전반에 과잉된 가족 중심 서사는 요즘 소설이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만은 80년대 중반까지 계엄령이 수십 년 계속되었으므로 그 즈음엔 생활 깊이 폭력성이 내면화, 일상화 되어 있었음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다. 

문장의 주저없음과 위에서 말한 활기와 유머 등이 가독성을 높였다는 것은 중요한 장점이라고 봤다. 

중심 사건이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물려 있다는 점은 작품에 무게감을 주어 호평하게 되는 큰 이유일 듯하다. 

그런데 일본 평단의 반응은 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70년대 대만이 배경이라 가능했을 혈연의 강조와 폭력적 문제해결이라는 배포 있어 보이고 거침없는 요소들이 최근 시점에서 이 소설을 오히려 신선하게 느낀다거나 보기 드문 소설적 재미가 있다는 평을 얻을 수 있게 한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균형을 잘 잡고 중국, 대만, 일본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듯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 내전은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먹을 거 주는 쪽에 붙어서 목숨을 이었다는 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익숙한 이야기로(낮에는 경찰, 밤에는 산사람) 많은 비극을 불러왔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침략기에 일본에 협조한 쪽도 같은 무게로 취급하는 것은 의아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명백한 원인을 지우고 모두 개인사로, 이 역시 개인적인 비극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 모 인물의 앞뒤 설명을 들으면 오히려 정당성을 주는 느낌도 들었다. '가정을 지키고자 한 아버지'....그러면 역사의 무게는 어디로 가는지. 작가는 대만 출신으로 아버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내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균형잡힌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어서 읽는 동안은 재미있었지만 다 읽고 생각해 보니 찜찜함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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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설집 音樂小說集
김애란 외 지음 / 프란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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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강하게든 약하게든 깃든 이야기들인데 공통적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이 담겨 있고 인물들에 미치는 영향면에서는 죽음이 비할데 없으므로 ‘음악과 죽음‘을 담은 소설집이라고 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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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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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다. 이번 소설을 더 좋게 보았다. 아래 글에 결말을 제외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소설은 선교사이자 사절단의 통역을 맡은 사제 벨라스코와 사절단의 일원이 된 하급 무사 하세쿠라 두 사람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하세쿠라는 아버지 대에 위의 명으로 고향 땅에서 내쳐져 수확할 것도 변변찮은 척박한 골짜기 땅을 배당받아 마을 사람을 이끌고 살고 있는 하급 무사이다. 풍요롭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진 늙은 숙부와 달리 하세쿠라는 아무리 일해도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한 땅이지만, 골짜기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일본 소설이나 영상물을 보며 생각한 것인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덕인 것 같다. 살아 보진 못했으니 작품을 통해 느낀 것이긴 하지만, 일본인들은 대체로 자기 삶에 만족 못하고 불만을 가지거나 어떤 사안에 비판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거 같고 때로는 더 나아가 혐오감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하세쿠라도 분수를 아는 사람으로서 말없이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세쿠라도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인물을 속으로 싫어하는, 그러한 성격의 인물이다.


일본에서도 구석지고 척박한 땅에서 세상 모르고 골짜기에 붙어 식솔들의 끼니 해결에만 몰두하던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어째서인지 멕시코와의 무역을 트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이 되라는 명을 받게 되고 난생처음 큰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게 된다. 윗 분에게, 왜 저일까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임무를 완수하면 고향 땅을 되찾을지도?(어쩌면!) 어찌 되었든 명을 받았으니 명을 따른다,인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을 배에 태워 멕시코로 보내는 것이 토착 식물을 뿌리 뽑아 배에 던져넣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이 일의 은폐된 전모를 이 단계에선 아직 모르고 있지만 상황에 대한 이해나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이 배에 실린 순진하고 우직한 하세쿠라에 연민이 생긴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함께한 종자 요조가 붙어 있어 하세쿠라는 여정 내내 마음으로 크게 의지를 하게 된다. 하세쿠라와 처지가 같은 하급 무사 셋이 더해져 총 네 명의 사절이 통역자인 신부 벨라스코와 여정에 오른다. 배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폭풍으로 표류하여 일본에 있던 스페인 선원들이 일본 선원들에게 항해 기술도 전수해 주며 배를 운전하고 일본 상인들도 수십 명 함께 타고 출발한다.


고생스런 항해 끝에 아카풀코를 거쳐 멕시코시티로 가서 총독을 만나지만 총독은 통상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힘이 없으며, 그 과정에 사절단은 환영받지 못함을 깨닫는다. 상인들은 벨라스코의 의도대로 멕시코시티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일단은 가져온 물품을 처분할 수 있게 되고 새로 구입한 물건들을 싣고 사절단 한 명과 함께 일본에 돌아간다. 세 명의 사절과 벨라스코는 멕시코와의 무역에 조금이나마 긍정적 성과를 가지고 가기 위해(벨라스코의 교묘한 희망고문에 의해...) 멕시코를 움직이는 실세가 있는 마드리드로 가기로 한다. 험한 고생길은 계속 이어진다. 베라크루스, 대서양 항해, 세비야,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사절단은 정식 사절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하여 멕시코와의 통상을 트는데 힘을 싣기 위해 세례도 받는다. 세례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하세쿠라는 받기를 결심한 후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듯한 가책 속에서 '임무 수행을 위한 형식적인 것이다' 라며 틈날 때마다 중얼거린다. 마드리드에서 이들은 아무 희망이 없어진 후에도 최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로마까지 가고 형식에 불과한 것이지만 교황을 접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람도 없이 같은 길을 되짚어 돌아온다. 4년이 걸린 여정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니 이야기는 80페이지 정도를 남겨두었다.


오직 자신이 잘 하는 인내와 순종의 의지 하나로 세상 끝에 다녀온 하세쿠라는 이 여행이 끝나고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일련의 일로 비로소 각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하급 무사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대처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세상일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각성이다. 이는 머리를 강타하는 형식이 아니고 깊은 밤에 이로리 옆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혼자 앉았을 때 종이에 물이 젖듯 찾아오는 것이다. 이 이상이 있을까 싶었으나 더 외지고 더 외롭고 더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자 방문했던 나라의 집집마다 걸려 있던 철사처럼 야위고 힘없이 두 팔을 벌린 채 못 박힌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떻게 저렇게 추하고 볼품없는 사람에게 이 사람들은 머리를 수그릴까, 볼 때마다 의아했던 사내의 모습이다. 이제 골짜기의 한밤에 홀로 앉아 떠올리는 그 모습은 예전처럼 멸시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고 그 가련한 사내가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야기가 벨라스코와 하세쿠라 두 사람의 시선으로 전개된다고 했는데 하세쿠라 입장에서만 내용 정리를 해 보았다. 

짧게 벨라스코 쪽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벨라스코는 일본에 교구를 만들어 주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이 사절단이 꾸려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며 에도와 영주의 속마음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본인이 일의 되어가는 바를 조정하는 줄 알고 있었다. 출발 이후엔 사절단을 어르고 속여서 여정이 로마까지 이어지게 도모한다. 사제이지만 천성적으로 오만한 기질이 있으며 선교에는 외교적 수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선진적인 것이 후진적인 것을 물리치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들의 개입이 물적 도움이고 정신적 구원이라는, 침략군과 함께 들어오는 선교사의 전형성이 있다. 무적함대의 문화에서 성장하고 신앙을 키웠으므로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작가는 벨라스코와 대척점에 어쩌다 멕시코까지 흘러들어와 인디오의 마을에 함께 사는 일본인을 등장시킨다. 짧은 분량으로 잠깐 나오지만 중요한 인물이다. 벨라스코와 비교하게 하면서 하세쿠라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게 되니까. 전직 수도사인데 스페인이 인디오에게 저지르는 짓을 보고 교회에서 이탈한 사람이다. 예수는 큰 교회가 아니고 비참한 인디오 안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며 그냥 인디오가 되어 살고 있다. 이 사람의 말과 신앙에 대한 메모가 하세쿠라의 마음에 드문드문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다.    


해설에 보니 엔도 슈사쿠가 이 소설 관련 인터뷰를 하며 '이 소설은 저의 사소설 같은 것입니다.'라고 했다한다. 작가가 어릴 때 세례를 받고 교회와 거리를 두다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유학을 한 경험을 연결지을 수도 있겠다. 조금 깊이 나아가서, 동아시아인이면서 기독교인이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봄직한 문제 - 외래 문화로서의 기독교를 어떻게 내면화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내면화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경로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소설의 제목이 참 묘한 것이 일본에서 특정 시기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모시고 섬긴다는 뜻인데, 소설속에 나오는 하세쿠라 식의 소박한 표현(일종의 신앙 고백)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는 평생 함께해줄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을 - 설령 그것이 병들어 쇠약한 개라도 좋아 - 찾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겠지. 그 사내는 사람에게 그런 가련한 개가 되어주는 거야.' 

이 소설에서 병들어 쇠약한 개와 종자인 요조와 예수는 동일하다.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 참견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존재이다. 

내게도 나이들고 병들어 쇠약한 개가 있다. 아직 잘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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